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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황인찬 시 발제 :: 0708(금)
케테르 / 2016-07-09 / 조회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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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개 발제문을 올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오라클 님이 올리라고 해서 올립니다.
  제가 별나게 길게 써서 다른 분들께 부담을 드리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이건 제 스타일로 보시고 그냥 자기 스탈대로 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참석하지 못한 분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임 후기는 오늘이나 내일 저녁에 올리고자 합니다. 모두들 반가웠습니다. 

 

황인찬 시 소개

 

한 사람의 시인을 알기 위해 그의 시 전부를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시 몇 편을 읽었다고 그 시인의 세계를 탐색하였다거나 그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역설적으로 시 한 편에 그 시인이 다 담겨있다. 시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그의 알파와 오메가이며 인물화이자 요약이다. 모든 시인들은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한평생을 살았고, 삶의 길이만큼의 시간동안 시작(詩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시 속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담는다. 도대체 이 낯선 시를 쓰는 황인찬은 누구일까? 그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시인에 대하여

시인 황인찬은 1988년 생이다.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201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구관조 씻기기>(2012년 12월, 10쇄), <희지의 세계>(2015년 9월, 4개월간 6쇄)가 있다. ‘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는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여 주목받았다.

그는 주목받고 뜨는 신인이자 시세계에서 성공한 일종의 인기 시인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일단 나의 느낌으로는 그는 젊어보였다. 그리고 나와는 좀 다르다 싶다. 처음 읽을 때의 느낌은 시가 사오차원적이다. 포스트모던하다. 싸늘하다, 어둡다, 좀 묘한 컬트적 냄새가 난다. 종교적 이슈에 침잠한 흔적이 보인다. 자주 사이코처럼 논리를 전개한다. 왜 이렇게 분위기가 텅 빈 방 혹은 마른 사막 같을까? 등이었다.

 

<구관조 씻기기>

나는 새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이 시에서 ‘도서관 바깥’과 ‘책 안’이 비현실적으로 연결되어 작동한다 : 창 밖의 빛이 책 속에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추고, 구관조를 씻길 때 물이 사방으로 튀어 젖는 현상이, 복도를 벗어나 거리에서 일어난다.

책 속에 있는 글을 인용문으로 따옴표에 담아 표현하는 기법이 특이해 보인다. 따옴표가 벗겨지면 그건 현실이 된다?는 듯이.

제목에 나타난 구관조와 본문의 문조는 각각 다른 새인데 시 속에서 연속성(새)과 불연속성(다른 새, 다른 공간)을 지닌다.

마치 나는 구관조가 되고, 도서관은 새장이 된 듯한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무지 혹은 이유 없음의 모티브가 반복된다.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고 추정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보인다. 막연한 추측이나 질문을 던진다.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해 :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어째서였을까” 혼동이나 불안이나 헷갈림도 아니다.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1) 나는 어린 새가 되어 새처럼 책을 다룬다(부리로 책을 쪼아 넘기는 듯한).

2) 나는 어린 새를 다루는 것처럼 책을 다룬다(조심스럽게, 사랑스럽게?).

후자에 가까워 보인다. 

음 ~~~ 독특한 전개와 시적 완결성이 돋보이는 시로 보인다.

 

<유독>

제목이 이해가 안된다. ‘몹시, 매우’라는 뜻인가? 다른 뜻인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한, 편지체 혹은 대화체의 문제가 특이하다.

아카시아 꽃과 냄새가 가득한 교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의 반응은 계속 특이하다 :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나도 계속 웃었고

‘냄새’란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화자가 웃음과 상황을 해석하는 상황이 생뚱맞다.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덤 냄새가 무언지 몰라, 혹은 영문을 몰라 웃는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인과율의 해체 같은 것이 보인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가 웃으니까 나도 계속 웃는다. 웃음이 아닌 웃음이요, 웃는 비극이다.

웃는 아이 중에 예쁜 너를 발견하고 너를 그 냄새와 연결시킨다. 이쁘다는 것과 후각(냄새)은 전혀 상관이 없는데, 이 둘을 서로 연결시켜 단정하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구도이다. 단어 뜻에 대한 무지와 상황 이해, 어울림 등에 있어서 인지적 결핍과 부조화, 행위의 엇갈림, 불연속성 등이 이어진다. 헐 ~~

 

<여름 이후>

아이들(학생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죽 나열하고 있다. 화자가 선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건들의 연속이다. 죽음, 교통사고, 기억상실,, 이사(이주), 꿈, 채식주의 결심, 결석, 가출 등 불행한 일들이다. 어떻게 보면 병증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나 담담하게 기술하여 보편적인 일이고 일상처럼 보인다. 

실제 경험한 일들로 보이고, 애들의 이름을 나열하여 구체성을 높이고 있다.

죽은 경미와 살아있는 아이들의 대조가 흥미롭다.

애들은 아직 살아있다! “아직 살아있다‘는 표현은 묘한 표현이다. 살아있음에 대한 진술이자 죽음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므로.

학교에서 보이지 않는다, 가출했다 : 이는 자주 등장하는 ‘사라지다’는 표현과 맥을 같이한다.

시에서 전환이 일어나는 지점은 흰 국화가 노란국화로, 애들이 입고 있는 교복이 교복에서 체육복으로 바뀌는 지점으로 보인다. 국화에 대한 착시, 교복이 담고 있는 규율성, 의식?용 복장 이미지와 체육복이 담고 있는 활동성이나 이탈성 혹은 탈주성?이 대조된다. 

수업시간에 마음이란 것 배웠다 : 애들의 마음? 누구의 마음? 그는 애들의 사건과 행동에서 마음을 배우고 있는 듯

 

<개종>

문을 두드렸기에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아무도 없다.

소리를 듣고 문을 연 나의 착각이나 환청으로 보이지만, ‘개종’이라는 제목과 시 전체의 분위기를 보아 그 두드림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성서나 종교에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 열라!는 메시지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황인찬이 느끼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여름 메타포 : ‘올 여름의 아름다운 일’, ‘무더운 여름이었다’

“열린 문으로 뜨거운 빛이 들어온다.” 이에 대한 어떤 평가나 반응조차 없다.

그가 말하는 개종이란 무엇인가?

  

<번식>

시 속의 배경 혹은 공간은 병원이다. 방문자는 차가운 과일통조림을 들고 병문안을 가서 문안 아닌 문안을 하며 웃음과 침묵으로만 소통한다.

누가 환자일까? 병문안 간 자가 환자처럼 보이기도 하지 않는가?

묘사의 싸늘함이 느껴진다. 무인격이다. 입원한 자는 ‘누군가’이고 ‘맞은 편에 앉은 사람’으로 묘사되고, 방문자가 통조림을 건네는 행위는 ‘죽지 않는 과일을 내미는 손이 있었다’로 표현된다. 누가 누구인가? 뒤집어 보면, 입원자는 나(시인)일 수도 있고 방문을 받는 자일 수도 있겠다 싶다.

백의의 남자 간호사는 ‘백의의 천사’라는 상식에 대한 약간의 반전?이다.

질문과 웃음과 침묵으로 이어지는 분위기의 흐름에서 침묵의 번식을, “죽은 것이 입안에 가득한” 상태가 되는 방식으로 죽음의 번식이 진행되는 듯 읽혔다. 제목이 ‘번식’이군. 에이 ~~ 열나 잼없고 기분 나쁜 시를 읽었다.

 

<나의 한국어 선생님>

문법적 오류가 가득한 표현들이 반복되고 있다. 주어, 조사(특히 목적어), 단수/복수, 양/수. 존칭의 실수가 드러나고 반복된다. ‘이 인분의 어둠’은 화자가 경험하는 세계, 한국어 문법의 세계이다.

“문법이 어렵다고 너가 말했습니다” : 문법이 어렵다! 이것이 포인트로 보인다. 그걸 왜 ‘너’가 말할까? 내가 느끼지 않고

 ‘너’(선생님)는 색연필로 OX를 표시하는 심판자가 되고, ‘나’를 부정하고 무시한다.

 화자는 마치 서투른 한국어 수강생 혹은 이주외국인처럼 보인다. 그는 이방인이다. 아마 이 시에서 이 화자인 나는 시인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이기도 한 것 아닐까?

이 시는 얼핏 불통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약간의 고립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단절과 분노, 그리고 버림받은 이의 냉소가 느껴진다.

문법 세계에 대한 부정이 두드러진다. X표시를 당하며 정죄당하고, 당장 사라지라고 배제당하는 소수자 혹은 루저에 대해 생각했다. 규율, 문법에 대한 부적응과 그러한 룰의 세계에 대한 부정이 이 시의 거시기처럼 보인다. 질문 하나, 왜 저항하지 않을까?

 

<혼자서 본 영화>

다분히 상상과 착각, 논리적 연관성이 결여된 경험들이 이어진다 : 그와 함께 영화를 봤다고 하지만 제목은 혼자서 본 영화이다. 영화 속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베낀 각본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폐쇄된 세계, 편집된 세계이다. 나와 대화하는 그는 누구일까? 독백이자 환청적 대화로 보일 정도이다. 나와 그는 함께 영화를 보았지만 영화 속의 장면에 대한 목격담과 경험이 다르다.

2연은 시인의 세계를 매우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일상과 슬픔과 고독에 대한 영화” 이것은 시인의 내면세계이자 삶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는 비가 자주 내리고 장면이 너무 많은” 영화 속 세계는 그가 경험하는 세계가 아닐까?

“지나치게 절제된 배우의 연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시인의 스타일로 보인다.

영화 안의 장면이 극장 바깥에서 재현된다. 영화 속의 비가 내리는 장면이 ‘비옷을 입은 아이들’을 통해 현실 속에서 재현되는 듯이. 영화와 현실, 영화 속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배우의 연기/각본과 나의 행동이 겹치는 듯이 암시한다.

시인의 세팅 : ‘집’ ‘극장’ ‘도서관’ ‘교실’. 그는 이 속에서 사라지거나 적응하지 못하거나 다른 것을 경험한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의 제4부에 몇 편의 시를 모아두었는데 이 시 ‘혼자서 본 영화’와 ‘히스테리아’, ‘재림’, 꿈 이야기 등에서 전형적인 편집증적 사고가 드러난다. 편집증적 진술과 묘사가 하나의 시가 되고, 그것이 법칙인듯 자기의 문법으로 전개하고 있다. 별나다.

편집증적 스토리이다. 표현으로서의 시적 비약과 편집증적 진술은 다른 것이 아닐까? 이것이 시인의 특이성이자 파격이자 차이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방 안에 단 하나 백자가 있다. 어둠과 고요만이 깔려 있다 :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물론 화자인 나도 방 안에 있다. 움직이는 것은 전혀 없다. 있다, 없다, 알았다, 본다, 발견한다. 사자졌다 등 상태만이 묘사된다. 매우 냉정하고 정적이다.

사라지면서, 집중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나는 사라졌다 : 이 진술에서 어떤 공백 같은 것이 발견된다. 나의 부재, 사라짐.

빈 방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 고독, 명징성.

그리고 무채색의 분위기이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이는 백자의 분위기이며(1연) 이는 사라지는 나의 분위기(마지막 연)이기도 하다. 백자와 나는 동일시되면서 불연속성을 지닌다. 나는 사라지므로. 그러나 연속된다. 백자가 됨을 통하여. 사라짐이 일종의 되기(becoming)처럼 느껴진다.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 마음” : 시인의 실존이자 마음으로 보인다.

“수많은 여름들이 지나갔는데” : 여기서도 여름 모티브가 등장한다.

쥐고 있는 ‘단 하나의 질문’(2연)은 무엇일까? 질문하지도 않았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질문이 백자에게 전달되었다고 믿는 듯하다.

분위기가 매우 특이하다. 개인적으로는 시인이 그리 심오한 사상을 가진 자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아니 그는 사상 같은 것, 생각 같은 것 자체를 부정하는 듯하다. 다르게 보는 사람, 다르게 느끼는 사람이겠지.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우주가 여기에 집중되는 듯하다. 하하하, 여튼 나는 이런 사유나 분위기 별로다.

 

<개종 5>

뭐 이런 것도 시냐?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개종 시리즈 중의 하나이므로 이해해주기로 하자.

‘시간의 공백’, ‘계절의 사라짐’을 느끼게 한다. 여름성경학교는 보통 며칠 동안 하는 교회당의 여름 행사이다.  

황인찬에게서 개종이란 그 종교로 귀의하거나 개종한다는 의미에서의 Conversion이 아니다. 그 세계에서의 엇박자, 이상함, 망상 같은 것을 다루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시의 행배치에서 여름-봄, 갔다-왔다가 대조를 이룬다. 봄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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