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발제 (1129)
준민
/ 201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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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준민
헤겔의 상호 인정 개념에서는 거울이 암묵적으로 작동한다. 거울이 작동하려면 타자와 내가 비슷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인정을 하다 보면 외재성이나 불투명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인정에 대한 포스트-헤겔적인 독해로 나아가야 한다. 나의 불투명성이 타자를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야기한다는 것. 이것은 윤리적 폭력, 즉 항상 자기-동일성을 표명하고 타자들 역시 그래야 한다는 폭력에 맞서는 일이다. 주체의 능력은 규범적 담론에 의해서만 야기된다. 담론의 시간성안에서 우리는 방향을 상실한다. 우리는 담론의 시간성으로 인해 자기-동일성 획득을 실패하는 한에서만 인정을 주고받게된다. 버틀러는 자신이나 타인의 불투명성을 승인하는 자발성과 승인의 한계, 즉 앎의 한계들을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윤리가 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나 자신을 설명하려는 모든 노력에 실패해야 한다. 따라서 네가 누구냐고 물을 때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타자를 살려두는 것이 윤리적인 인정에 대한 일환이라면, 이런 판형의 인정은 인식적 한계들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다. 카바레로는 “너는 누구인가?”를 묻되, 완전한 대답은 기대하지 말라고 제시한다. 이 질문은 타자를 완전히 포착할 수 없다. 따라서 질문에 인정욕이 존재한다면, 질문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야 한다. 질문을 멈추는 순간 말걸기는 중지되고, 메시지를 전달받지 않게 된다. 이폴리트는 헤겔의 욕망과 인정을 욕망욕으로 개조했다. 라캉은 이폴리트를 통해 헤겔을 접했다.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존재욕망은 오직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통해서만 충족된다는 걸 기억하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인정이 욕망을 포획하기 위해 작동한다. 스피노자는 모든 인정 이론의 토대를 이루는 욕망을 우리를 위해 표식한다. 욕망은 인정 자체를 작동시키기 위한 한계와 조건을 설치한다.
판단의 한계들
버틀러는 유무죄를 판단해야 하는 윤리적이고 사법적인 상황들이 있지만, 그때의 결정이 사회적 인정과 같아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한다. 그렇다면 인정이 제공하는 틀 안에서 도덕적 판단을 평가할 순 없을까? 니체는 도덕의 가치가 도덕을 잴 때 사용하는 초-도덕적 가치에 있다고 했다. 따라서 오직 도덕만이 가치의 장을 이루진 않는다. 판단하는 자와 판단당하는 자 사이엔 항상 도덕적 거리가 정해져 있다. 그러나 버틀러는 모든 윤리적 관계를 판단 행위로만 환원할 수 없으며, 판단은 인정 이론으로서의 자격을 절대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정하지 않아도,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판단하기에 앞서 그/그녀와 분명히 어떤 관계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비난해야 하는 이들한테도 “너는 누구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관계를 단절하는 순간 그들이 윤리적으로 교육을 받거나, 그들에게서 메시지를 전달받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 따라서 판단의 윤리적 가치는 말걸기의 형식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자기를 알게 되는 한 가지 방식은 판단이 중지할 때의 성찰에 의해 촉진된다. 비난, 탄핵, 통렬한 고발은 우리가 심판당하는 자와의 공통성을 부인하면서 자기를 도덕화하는 방법이다. 비난은 자기의 불투명성 또한 추방하고, 비난받는 자 또한 포기하며, 그들에게 윤리를 운운하며 폭력을 가한다. 따라서 판단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방식이다.
카프카는 윤리적 폭력의 여러 사례를 보여준다. <선고>에서 게오르크는 그의 아버지가 내린 물에 빠져 죽으라는 선고에 떠밀려 죽는다. 그러나 이 선고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게오르크의 의지도 담긴 것이고, 그의 아버지 또한 선고가 자신에게도 내려진 듯 영향받는다.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양쪽의 조건의 동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게오르크의 자기-파괴는 최후의 사랑의 선물이다. 그의 자기-파괴는 희열에 찬 마조히즘의 광경이다. 아버지의 발화가 행위를 촉발한 것 같지만, 자기-파괴 행위는 분명 게오르크의 것이고, 아버지의 행위는 아들의 행위로 바뀐다. 그러나 아버지의 선고는 분명 게오르크의 삶과 윤리적 능력을 파괴한다. 이 처벌은 자율성의 조건들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자기 성찰과 사회적 인정을 위한 주체의 능력을 침식시킨다. 이것은 윤리적 판단이 생산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선 인정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걸 시사한다. 즉 주체가 미래에 다르게 행동할 기회를 경험하게 하려면 판단은 삶을 유지하고 증진하는데 작동해야 한다.
정신분석
모든 설명은 말걸기에서 일어난다. 나는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정교하게 만든다. 정신분석적인 전이에서 “너”는 상상의 영역에서 정교화된 디폴트 구조이고, 말은 대화 장면에 영향을 주려고 하는욕망의 도관으로 기능한다. 정신분석은 자기-노출적 발화 행위를 항상 이해하고 있었다. 전이는 말걸기의 양태를 구조화하는 소통과 합리성의 전제조건들을 재창조한다. “나”는 말걸기 장면 맥락 안에서 명료해진다. 상상의 것인 “너”가 구성하는 대상과의 연관 속에서 욕망의 목적은 분명해지지만, 이런 말걸기 장면을 통해 분명해지는 건 완전히 조명되지 않는 불투명성이다. “나”가 전이의 맥락에서 “너”에게 들려주는 말은 함께 뭔가를 하고 어떤 식으로 너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나”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정신분석의 어떤 집단이나 교리의 목적은 말하는 자의 과거를 구성하고, 그가 반복해서 만나는 난국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임상치료사가 개입한다. 서사적 재구성을 통해 이야기를 다시 짜고, 말하는 자의 소망을 만족시킬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서사적 재구성이 정신분석의 목적일 순 없다. 항상 타자가 있어서 삶은 근본적인 방해를 통해 구성된다. 분열의 조건들에 속하는 고통겪기를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오히려 심리와 경험을 너무 많이 연결하는 것은 편집증적 고립의 극단적인 형태가 된다. 삶은 반드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진 않다. 인정할만한 라이프 내레이션은 비개인적인 본성을 갖는 발화를 통해 방향을 상실한다. 자신에 대한 일관적인 설명을 제공하는것이 정신분석의 임무라는 생각은 잘못됐다.
내가 정해지기도 전에, 타자의 언어 혹은 말걸기가 나의 개체화에 앞서 온다. 이런 주장을 하는 철학자와정신분석학자가 있었다. 레비나스와 라플랑슈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말걸기가 나를 구성하고, 라플랑슈는 요구로서 타자의 말걸기가 “나의 무의식”안에 나를 이식한다고 주장한다. 이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내가 소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소유할 수 없는 무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역설적이게도 무의식은 나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무의식은 소속의 수사를 무시하고 타자의 말걸기를 통해서 탈취된다. 라플랑슈에서 “나”는 요구를 통해 활기를 얻고, 그것에 압도당한다. 타자는 처음부터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이 “너무 많음”에 기탁되어선 안된다. 무의식은 생존과 개체화의 필요, 그런 과잉을 관리하는 방식, 과잉 자체의 불투명한 삶으로 형성된다. 전이는 말걸기의 장면에서 서술될 수 없는 것과 무의식을 실연한다. “나”와 분석가, 두 대화자는 무의식으로 접근한다. 두 대화자 모두가 탈취되지만 “나”는 분석가가 탈취를 더 잘 다루기 때문에 압도당했다고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질문이 생긴다. 내가 압도당한 너는 누구인가? 누구는 당연히 잡히지 않는다. 이런 만족시킬 수 없는 질문은 다채로운 요구들로 간주되는 수수께끼적 타자가 나를 취임시키는 방식을 보게 해준다. 여기서 “나”는 분석가와의 전이적 장면에 기여한다. “나”는 분석자에게 무엇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가? 바로 역-전이가 일어난 것이다.
볼라스는 분석가 개념을 “변형적 대상”으로 도입했다. 분석가는 분석자가 자신을 이용하도록 용인해야 되고, 때로는 아픈 사람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볼라스는 환자 한 사람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을 때, 혼자가 됐다는 느낌에 빠졌다. 볼라스 스스로가 환자에게 이 느낌을 얘기했을 때, 환자와 볼라스가 상실감에 빠졌던 환경을 재창조한 것이 된다. 여기서 볼라스가 제공한 것은 서사라기보다는 방치된 소통과 방향을 상실한 접촉이 재창조된 장면이었다. 그 뒤에 볼라스는 서사적 차원의 개입을 한다. 그러나 핵심은 전혀 다른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이고, 말걸기의 디폴트 장면이 변경됐다는 것이다.
다시 “나”는 나를 완전한 지식으로 만들 수 없다. 나는 자기-앎으로서의 정교화보다 먼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경험은 삶의 한 차원에 불과하다. 우리는 의존성과 감수성과 같은 언어를 통해 지배당하지 않는다. 자아는 자아에 선행하는 관계들, 어딘가에서 오는 자국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위니콧은 분명한 자아보다 관계성이 먼저라고 주장한다. 자아가 주체의 도착보다 훨씬 앞선다면, 자아는자기를 정의해줄 최초의 양육자들의 세계에 연루된다. 우리는 위니콧이 말하는 대로 품에 안길 때 자기 이야기를 더 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서사적 수단으로는 기술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서술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심적 제재의 접합과 표현의 자격을 갖는 것은 내레이션을 초과한다. 가끔 서사적 목소리는 서사적 권력이 잘려 나간 후에도 존재한다. 카프카의 이야기에서 게오르크가 삶을 끝낸 후에도 서사적 목소리는 남아있다. 이는 어떤 신체, 이름도 없는 목소리이고, 말걸기 자체의 목소리, 말걸기 자체가 생존의 토대를 형성하는 목소리이다.
아도르노와 벤야민은 카프카의 <가장의 근심>를 두고 편지를 나눈다. 버틀러는 아도르노와 벤야민이 이 소설에 나오는 “오드라덱”을 설명하는 데 정신분석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개념화 할 수 없는 오드라덱이 그 자체로 어떤 동기가 되어 계속 산다고 쓴다. 인간의 형태를 비우는 움직임을 기화로 희망과 비슷한 것이 도착하고, 희망의 신호를 확립하는 것이다.
개인의 사회적 기원들은 생존을 위협하는 하나의 방식을 구성한다. 결국 메시지를 전달받지 않는다면 누구도 생존하지 못한다. 언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메시지를 받고, 전달하는 방식으로 소통 환경 안으로 들어간다. 버틀러는 말걸기의 구조가 서사의 방해 내지 차단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를 하는 순간, 이야기는 누군가를 근거하여 행위 한다.
일관성은 윤리적 자원을 폐제하면서 서사에 들러붙는다. 일관성 있는 서사는 그/그녀의 삶의 허위화를 요구한다. 대화자들의 관계는 증거를 검토하는 판관과 해독 불가능한 증거의 부담에 부합하려고 노력하는 탄원자의 관계로 설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프카에게 가까워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전이를 윤리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체가 통일성을 재취임시키려고 할 때 폭력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어떤 차단을 허락, 유지, 수용하고서 비폭력의 실천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짊어진 의무가 유도하는 지배에 집요하게 도전하는 살기로부터 비폭력이 따라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