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에세이] 지식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가
삼월
/ 20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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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가
삼월
1. 오이디푸스와 지식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상상해낸 불운한 왕자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호메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으로도 남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오이디푸스를 이야기하면서 흔히 운명과 욕망을 떠올린다. 인간이 벗어나기 힘든 강한 운명의 힘,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소유의 욕망. 푸코는 오이디푸스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다른 무언가를 읽어낸다. 오이디푸스가 가졌던 지식, 그 지식이 권력과 연결되는 지점들. 현대사회의 ‘지식-권력’을 성찰했던 푸코가 오이디푸스에게서 읽어낸 지식과 권력은 어떤 형태였을까.
푸코는 오이디푸스 이야기 중에서도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참고한다. 비극 안에서 오이디푸스는 무언가와 계속하여 싸워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부모에게 버려져 코린토스의 왕자로 살아가던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는 신탁의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 집을 떠난다. 그러다 길에서 시비 끝에 한 무리의 사람들을 죽이게 된다.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친아버지가 포함되어 있다. 테바이에 도착해서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이었던 스핑크스를 이겨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오이디푸스의 여정 속에서 이어지는 싸움들은 어떤 면에서 모두 지식과 연결되어 있다. 신탁이 전하는 지식에 대한 거부, 친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식의 결핍, 그리고 스핑크스를 이겨 도시를 구하는 지식의 소유까지.
스핑크스를 처치한 오이디푸스는 테바이를 통치하게 된다. 오이디푸스의 지식이 도시를 통치할 능력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원래 테바이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았으므로, 오이디푸스의 권력은 혈통이 아닌 통치능력을 인정받음에서 기인한다. 푸코는 이런 오이디푸스에게서 혁명가인 참주의 형상을 본다. 시민들은 참주가 왕으로서 도시를 다스릴 능력이 있는지 검증하기를 원했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유용한 지식을 갖췄음을 보여주어 시험에 통과했다.
그러나 신탁은 계속하여 오이디푸스의 무지를 문제 삼는다. 도시에 재앙이 닥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통치능력으로 다시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소포클레스가 묘사한 오이디푸스는 신에게 답을 구하지 않고, 인간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간다. ‘조사’라는 방식이었다. 신의 노여움을 산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증거와 증인이 있는지가 조사를 통해 밝혀진다. 조사의 결과는 오이디푸스 자신을 향한다. 오이디푸스의 지혜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무지를 밝혀낸다. 신은 오만방자한 오이디푸스를 비웃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무지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눈을 찌른다.
신들의 질서를 복원하기 위해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이디푸스는 도시에서 쫓겨난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의지로 신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자들이다. 이오카스테는 아버지를 죽일 운명을 타고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몰래 아들을 버렸고, 오이디푸스 역시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키워준 부모를 떠났다. 두 사람의 불행은 신탁을 거스른 데서 오지 않는다.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지식의 과잉과 자만심이 두 사람을 몰락시켰다고 사람들은 이해한다. 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지식,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지식은 신탁과 점술 앞에서 무력해진다.
푸코는 오이디푸스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지식과 권력의 상반된 형태를 읽어낸다. 바로 순수한 지식의 형상과 불순한 권력의 형상이다. 지식은 유용함이 아닌 진리를 향하는 순수한 의지에서 비롯되고, 권력은 오만과 탐욕으로 이어진다는 오래된 믿음. 지식의 유용함을 통치능력으로 입증하여 지식과 권력을 연결시킨 오이디푸스가 몰락할 때, 사람들은 오래된 교훈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지식은 권력과 연결되어선 안 된다는 교훈이다. 권력을 억압의 형태가 아닌 다양한 힘 관계로 사유하는 푸코는 이 교훈에 맞서 지식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지식의 의지야말로 권력과 생존에 관한 의지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냐고.
2. 니체와 지식
푸코는 1970년 ~ 1971년 사이에 콜레주드프랑스에서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개설했다. 강의의 주제는 분명하게 니체에서 비롯되었다. 니체는 인식이 본능이 아니라 하나의 발명이며, 복잡한 조작의 결과임을 주장한다. 니체는 인식의 배후에서 인간의 악의를 읽어낸다. 사물 혹은 타자를 무시하거나 거리를 두고, 물리치거나 파괴하기 위한 악의. 인식하는 자는 사물의 본질을 캐내고 지배하려 하고, 악의는 사물의 존재론적 토대를 부수는 데까지 나아간다. 객관적 인식의 환상은 사라지고, 우리가 인식의 지지대 혹은 원천이라고 믿었던 것이 오히려 우리의 인식을 방해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인식이 폭력과 다름없음이 드러나면, 진리를 향한 순수한 의지에 대한 믿음도 사라진다. 인식의 출발점이라 믿었던 주체-객체 관계도, 인식을 통해 구성되었음이 밝혀진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관계의 세계이고, 관계는 그 자체로 인식이 불가능하다. 인식은 이 관계들의 망에 바탕을 두며, 그것은 파괴·전유·징벌·지배의 관계일 수 있다. 여기서 사유는 인식행위로서 자신을 인정하는 심급이 아니라, 폭력과 환영이라는 효과에 불과하다. 그 폭력이나 환영이 사물이나 타자를 사용하고 지배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인식은 이 사용이나 지배의 관계를 확장시키려고 한다. 푸코는 니체의 권력의지를 이렇게 읽어낸다.
인식은 기만을 통해 이 지배관계의 확장을 다른 무엇으로 꾸며낸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인식의 목표 혹은 본질을 도입한다. 인식이 진리를 위하여 나타난 것이 아니라, 진리가 인식에 의해 만들어졌다. 진리를 욕망한다는 것은 진리의 출현, 진리의 존재를 갈망함을 뜻한다. 권력의지가 자신을 위해 진리를 갈망하며 만들어낸다. 진리는 인식에 가해진 폭력이며, 누군가에 의해 이미 변형되고, 왜곡되었으며, 지배되었다. 이제 우리는 인식에 대한 의지가 전혀 순수하지 않으며, 잔혹한 파괴의 관계를 수립하는 권력의지임을 알 수 있다.
권력의지는 진리에 대한 갈망을 넘어 진리를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권력의지가 인식과 진리의 관계를 끊고 서로를 공격하도록 만들 때, 진리는 두 가지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하나는 참이 아닌 오류, 기만, 환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 또 다른 하나는 영원불변하고 참된 이데아의 세계에서 현실을 해방하기. 해방된 현실은 모방이 아닌 그 자체로 생성이다. 존재는 더 이상 이데아의 모방이 아니며, 각자의 진실을 생성할 수 있게 된다. 진리를 통한 기만이 폭발하는 지점에서 인식은 더 이상 진리가 필요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3. 참을 수 없는 것에 대항하는 지식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를 진행하던 1971년 초에 푸코는 ‘감옥정보그룹’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새로운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감옥정보그룹’이 발행한 소책자의 제목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맨 뒷장에는 단두대의 칼날 아래 다음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것, 재판소, 경찰, 병원, 요양소, 학교, 군대, 신문, 텔레비전, 국가.’ 푸코는 이 모든 곳에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은폐된 권력의 메커니즘을 읽어냈다.
푸코는 오이디푸스의 방식을 선택했다. 조사였다. 신의 말씀에도, 진리에도 기대지 않고 인간의 방식으로 지식과 권력의 문제를 연결하려 했다. 권력을 억압이 아닌 다양한 힘 관계로 사유하는 푸코에게 저항은 권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물론 각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매우 불균등하다. 권력의 불균형은 지식의 불균형과 직결된다. 진리보다 중요한 지식은 각각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진실이다. 푸코는 조사를 통해 수감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다. 수감자들의 말을 대신 전하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푸코에게 모든 조사는 투쟁의 첫 번째 사례였다. 조사를 통해 전략적으로 전선을 형성했다. 조사자는 조사대상에 속해있었다. 조사를 통해 그들은 스스로 ‘참을 수 없는 것’의 목록을 만들고, 싸움의 대상을 정해야 했다. 지식인 집단의 의식화 대상이 되는 일이 그들의 역할이 되어서는 안 됐다. 푸코는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고 기자회견을 하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그들의 일을 도왔다. 감옥정보그룹은 새로운 사회운동으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1972년에는 죄수행동위원회가 자신들의 발언을 시작했다. 1974년 죄수행동위원회는 더 이상 지식인들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고, 푸코는 감옥정보그룹의 해체를 선언했다.
사람들은 푸코가 실패했다고 말했지만, 푸코는 자신이 해야 할 사회운동과 참여의 방향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1975년에 《감시와 처벌》이 출간되었다.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푸코의 책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는다. 《감시와 처벌》을 통해 푸코는 인간을 복종시키고 규율하는 지식-권력의 메커니즘을 매우 훌륭하게 설명해냈다. 순수한 지식과 불순한 권력의 이미지에 사로잡힐수록 ‘참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우리의 투쟁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사실 역시.
어떤 정치노선에도 참여하지 않으면서 푸코의 사회활동은 더욱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투쟁의 전면에 서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연설을 하고, 흐름을 뒤집는 글을 기고했다. 민중에게 말할 기회가 있음을 알리고, 실제로 말할 기회를 주려는 활동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의 기억을 위한 연대기’를 만들고 싶어 했으며, 그 기억을 통해 민중운동의 역사를 복원하고 싶어 했다. 노동자들과의 대담 역시 여러 번 이루어졌다. 푸코가 지식인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르노의 한 노동자와 했던 다음의 대담 내용 중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당신이 지식인의 역할을 너무 과장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기 위해 지식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 너무나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지식인이란 생산장치가 아니라 정보장치에 접속되어 있는 사람이다. … 그는 다른 사람들이 직접 소유하지 못하는 어떤 종류의 책들을 읽고 그 독서가 제공하는 지식을 갖게 된다. 따라서 그의 역할은 노동자의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의식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역할은 노동자의 이 의식, 이 지식이 정보체계 안에 들어와 널리 유포되도록 돕는 것이다. …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식인의 앎이란 노동자의 앎에 비하면 언제나 부분적이라는 것을. 프랑스 사회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노동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그 거대한 경험에 비해 보면 너무나 왜소하고 국부적이다.
결론을 내리려면, 다시 이 글의 제목으로 되돌아가 물어야 한다. 지식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가. 단언하건대, 그렇지 않다. 지식의 의지는 권력과 생존의 의지이다. 지식은 순수하지 않으며, 권력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니 생존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권력이 필요하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알아야 싸울 수 있다고. 더불어 오늘 우리가 배운 지식이 단 하나의 전략과 무기로라도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