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에세이] 당신의 벗이 되겠습니다
삼월
/ 2018-12-14
/ 조회 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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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벽에 부딪힌 나머지
1925년부터 1927년까지 3년여 간 루쉰은 꽤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우리에게 익숙한 《무덤》, 《방황》, 《화개집》, 《화개집 속편》, 《들풀》, 《아침꽃 저녁에 줍다》, 《이이집》 등의 작품집들을 이 시기에 쓰거나, 출간했다. 사는 곳도 자주 옮겼다. 베이징에서 샤먼, 샤먼에서 광저우, 광저우에서 상하이까지.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청년들을 만났고, 사건이나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나 싸움이 이미 나이 마흔을 넘긴 루쉰을 저리 떠돌아다니도록 만들었을까. 또 쉼 없이 글을 쓰게 만든 동력은 무엇이었일까. 그런 질문들과 함께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루쉰의 글 몇 편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시기 루쉰을 거쳐 간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사건을 꼽을 수 있다. 1924년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총장으로 부임한 양인위는 아주 보수적인 방식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학생자치위원회(이하 학생회)가 이에 반발하며 총장사퇴운동을 벌이다가 퇴학당하고, 학교는 폐쇄되기에 이른 사건이다. 베이징의 교육계와 지식계는 이 사건으로 분열되었고, 베이징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루쉰은 학생들의 편을 들었다. 보수 지식인들과의 끈질긴 싸움이 시작되었고, 싸움의 대상에는 이전에 루쉰과 신문화운동을 함께 했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쉰은 이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과거와 단절하고, 현실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게 되었다.
사건을 가까이서 겪었던 루쉰이 기록한 몇 개의 글들에는 당시 베이징여자사범대학의 정황과 루쉰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총장 양인위에 반대하다 제적된 뒤에, 학생회 임원들은 루쉰을 포함한 교원들에게 학교 운영을 위한 회의에 참석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루쉰은 양인위 교장이 ‘학교는 가정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데서, 자신이 양씨 집안의 가정교사와 다름없었음을 깨달았다. 교장과 학생들이 가족이라면 이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루쉰은 학생들과 싸움을 벌이는 교장을 보며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라고 유추한다. 회의장에는 학교 밖의 호텔에서 공식회의를 연다는 교장의 인쇄물이 놓여 있다. 겸임교원에 불과한 루쉰은 그 공식회의에 참여할 권한이 없다. 루쉰은 자신처럼 ‘벽에 부딪힌’ 학생들을 본다. 그들은 미약한 신음만 냈을 뿐인데도, 신음하자마자 살육당하고 말았다!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자치회 임원들은 학교의 해산에도 학교 밖 교실을 운영하면서 저항을 계속했다. 계속되는 교육부의 간섭에 베이징대학 평의회는 교육부와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이들의 싸움은 승리로 끝나 1926년 교육부는 루쉰에게 복직 명령을 내린다. 루쉰은 복직 명령에 응하지 않고 샤먼으로 떠난다. 루쉰 자신과 루쉰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이미 변해있었다. 베이징여자사범대학의 어린 학생들은 처음 루쉰의 눈에 가혹한 시어머니에게 고통 받는 가련한 민며느리들처럼 보였다. 그러다 그 민며느리들이 결국 싸워서 이기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루쉰이 이 어린 학생들에게 품은 마음은 어느새 연민으로 시작하여 존경에 가까운 무엇으로 변해 있었다.
2. 토비와 세상물정에 밝은 노인
1926년 3월에 루쉰은 베이징여자사범대학의 학생회 임원 몇이 군벌정부에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루쉰은 비통해한다. 한때 루쉰과 신문화운동을 함께 하기도 했던 당시의 지식인들은 죽은 학생들을 모욕하거나, 헛된 말들을 퍼뜨린다. 루쉰은 정부의 흉포함과 소문을 양산하는 지식인집단에 분노한다. 그들에게서는 이제 ‘시신의 무게’를 아는 마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누군가 루쉰에게 〈아Q정전>의 결말에 대해 물었다. 하찮은 아Q를 체포하기 위해 기관총을 겨눈다는 설정은 과도하지 않느냐고. 고작 학생들이 가슴에 편지를 품고 나온 시위에 동원된 기관총을 보며, 루쉰은 자신의 표현이 과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며 되물었다. 기관총을 토곡사(아Q의 집) 밖에 설치하지 않으면, 어디에 설치할까요?
자신의 상상이 미래를 필요 이상으로 정확하게 예측했다는 사실은 루쉰이 느낀 비통함을 더욱 증폭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이 무렵 루쉰은 보수 지식인들에게서 세금을 축내는 ‘토비’라는 비난을 듣고, 일부 청년들에게는 ‘세상물정에 밝은 노인’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는다. 비난과 비아냥거림의 표현들을 루쉰은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돌파해내려고 한다.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사건을 거치는 동안 루쉰은 싸움의 문제에 있어 더욱 냉정해졌다. 싸움은 사랑이나 정의의 이름으로 가능해지는 게 아니다. 연민을 넘어서는 어떤 냉혹함, 가차 없음이 필요하다. 루쉰의 이런 싸움론은 《무덤》에 실린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에는 ‘물에 빠진 개’를 때려야 하는 이유가 상세하게 설명된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며, 싸움은 생존의 문제가 될 뿐 더 이상 정의와 연결되지 않는다.
자신을 무는 개를 때리던 중에 개가 물에 빠지면 무작정 페어플레이를 구사해서는 안 된다. 물에 빠진 개가 허우적댈 때, 사람들은 측은하게 여긴다. 개는 동정을 구걸하고, 바로 이때 사람들은 의협심에 빠져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 좋은 사람은 다음날 다시 개에게 물린다. 이것이 당시 루쉰이 처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질문해 볼 수 있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일이 이렇게 길고 상세한 이유를 들어 논증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인가? 그렇다. 어려운 일이다. 사람을 보고 짖어대는 사나운 개를 때리는 일은 쉽다. 정당방위에 해당하므로 정당성 충족은 물론,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하여 개에게 대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일은 어렵다. 발을 들었다가도 멈칫 하게 되고, 잔인하고 편협한 사람이라 욕을 먹을까 걱정도 된다.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관대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듣는다. 그 개가 다음날 사람을 물어 죽인다고 하여도.
사람들은 늘 싸움에서 선과 악의 대결을 상정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선량한 피해자와 악독한 가해자의 구도는 이렇게 나타난다. 그러나 명백히 따져보자면, 선량한 피해자와 악독한 가해자는 거의 없다. 고만고만한 피해자와 고만고만한 가해자가 있을 뿐이다. 고만고만한 싸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그 싸움의 끝이 모두 무덤이라는 사실을 루쉰은 분명하게 알았다. 모든 것은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하고 있다. 그 지나감 속에서 싸움의 이유가, 명분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어차피 결국엔 모두 죽으니 싸움이란 쓸데없고,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매한가지니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자는 말을 루쉰이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루쉰은 끝나지 않는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몇 개의 무덤들을 만들며 나아가고 있다. 그 무덤은 자신이 싸워온 흔적, 자신이 죽인 것들의 무덤이다. ‘아프지도 않는데, 신음하고 있다’며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면직시킨 교육부 총장에게 루쉰은 분명히 말한다. 아프지 않다면, 신음할 필요가 없다. 아프기 때문에 신음을 하는 것이다. 싸워야 할 일이 있다면 싸워야 한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물에 빠진 개’도 때려야 한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 같은 건 버려야 한다. 자신이 욕하는 옛사람들의 가증스런 사상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아야 하고, 자신 역시 전복되어야 할 무엇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싸움을 해 나가는 길에 마치 이정표처럼 여러 무덤들을 남긴다. 그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 바로 자신의 무덤이다.
3. 차라리 벗을 구해 힘을 합쳐
베이징에서 샤먼으로 떠났던 루쉰은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광저우로 발길을 옮긴다. 샤먼대학에서 또 한 차례의 소요를 겪었는데, 이번 일은 베이징여자사범대학 때처럼 풀려가지 않았다. 학생조직은 분열되었고, 소요를 주도한 학생들은 퇴학되어 상하이로 떠났다. 루쉰도 더 이상 샤먼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샤먼을 떠나는 길에는 소문이 무성했다. 루쉰이 쉬광핑을 만나러 간다는 소문이었다. 쉬광핑은 베이징여자사범대학 학생회 임원으로 루쉰과 인연을 맺었고, 여러 사건을 겪으며 루쉰과 연인 사이가 되어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특히 루쉰과 적대하던 사람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오로지 어머니의 뜻의 따랐다고는 해도, 루쉰은 이미 결혼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구시대의 인물이라 자처하던 루쉰은 원래 봉건시대의 계약으로 묶인 아내와의 결혼생활을 허울이나마 유지하려 했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 쉬광핑을 만난 루쉰은 자신을 ‘꽃이 없는 장미’라고 느낀다. 니체의 말대로 엄격한 도덕주의자는 타인에게도 도덕을 강요한다. 도덕이란 혼자만 지키기엔 억울한 법이니까. 꽃 없이 시퍼런 넝쿨과 뾰족한 가시만 남은 장미는 당연히 타인을 옥죄고, 찌르는 데만 쓰일 뿐이다. 무언가에 혼을 빼앗긴 듯 살아온 결혼생활 속 아내는 루쉰에게 봉건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돌보고 계몽해야 하지만 쉽사리 변하지 않는 답답한 존재로. 쉬광핑을 만나 루쉰은 젊은 여성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용감하며, 자신을 압도하고 뒤흔들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1926년의 루쉰은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사건의 여파로 여전히 괴로웠다. 당시 악연을 맺은 이들과 집요하게 싸우고 있는 와중에, 인연을 맺었던 학생회 임원들이 3·18 사건으로 죽어 비통해하기도 했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 때였으나, 루쉰은 몇 차례나 자신의 삶을 ‘꽃이 없는 장미’에 빗댄 글을 쓴다. 쓰고 나서 이런 글을 쓸 때가 아니라고 반성하기도 한다. 이제 루쉰은 명백하게 노인들의 훈계를 거부하고, 젊은 여인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한다. 루쉰은 공리와 도덕을 거부하고, 기꺼이 추문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쉬광핑과 함께 살기 시작하자 동생마저도 루쉰이 축첩을 했다고 비난했다. 공정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에 대항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삶이 바뀌니 싸움의 상대도 조금씩 달라졌다. 공정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얼마나 잔인하며, 세상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지가 보였다.
베이징여자사범대학 학생들의 죽음 앞에서 루쉰은 ‘시신의 무게’를 느꼈다. 붓의 무력함 역시. 구습을 비판하는 자가 자신 역시 구습에 얽매어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나는 그대로 얽매어 있을 테니 너희는 벗어나라’는 태도를 가지는 것도 문제다. 조강지처를 버렸다고 비난받던 루쉰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이 아직도 ‘마누라와 자식’에 묶여있다고 조롱했다. 마누라와 자식의 의사는 전혀 묻지도 않고, 마누라와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핑계로 그들의 부정부패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자들의 훈계와 비겁한 자들의 소문에 맞서, 죽음의 공허함을 이겨내고 새롭게 싸워야 했다. 붓으로 쓰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실전에 돌입할 때였다.
《화개집》 안에 실린 글 <스승>에서 루쉰은 젊은이에게 스승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의 길을 가는 자는 스승 노릇이나 하고 있지 않다. 이를 깨달은 젊은이들이 ‘믿을 건 자기밖에 없어!’라고 말할 때, 루쉰은 그 말을 다시 고쳐준다. ‘자신도 반드시 믿을 게 못 된다’ 극적인 상황에 놓여있던 적이 없었다면, 스스로를 지나치게 믿으면 안 된다. 자신이 그다지 믿을 만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믿음직하다. 여기서 루쉰은 자신이 젊은이들의 스승이 아니며, 우리 모두에게는 스승이 필요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스승을 찾을 필요도 누군가의 스승이 되려 할 필요도 없고, 자신만을 믿어서도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 된다. 서로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벗’이라 부르며. 젊은이에게 스승이 필요하지 않다는 루쉰의 말 뒤에 생략된 문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문장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내가 당신의 벗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