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에세이]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공동체: 공동체 허물기에 대하여
삼월
/ 2018-12-15
/ 조회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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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학의 타자가 말할 수 있는가
버틀러는 스스로가 ‘철학자’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철학’이 무엇인가, 혹은 무엇을 철학이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의 답을 먼저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도 단순하지 않다. ‘누가’ 철학을 정의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답 역시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버틀러가 스스로가 철학자인지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대체로 이 마지막 질문에 있을 것이다. 버틀러의 논문을 철학으로 ‘인정’해 줄지 말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미국철학협회’처럼 합당한 대가를 지불받고 운영되는 조직 말이다.
버틀러가 말하기 어려워하는 주된 부분은 자신의 논문이 현재 제도권 철학의 지배적인 통찰 기준에 들어맞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글의 철학적 중요성과는 별개이다. 버틀러는 제도권 철학과 별개로 ‘철학의 행위’를 하고 있는 이들을 ‘일반인 철학자들’이라고 부른다. 버틀러 책의 독자들과 나름의 철학적 실천을 하는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럼에도 버틀러는 사회에서 ‘철학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자신과 같은 연구를 한다면 무엇을 떠올릴지를 궁금해 한다. 버틀러가 보기에 제도권 내에서 ‘철학’이라는 학문적 실천은 철학을 언어도단이라 할 수준까지 이중화했다. 철학은 자신의 바깥에서 자신을 발견했고, ‘대타자’ 안에서 자신을 상실했다.
결국 버틀러는 자신의 글에 대해, ‘철학에 관한 것이지만 철학적인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일부러 철학제도와 거리를 두고 철학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그 시작이라는 것이 보잘것없고 골치 아픈 것이었음을 밝힌다. 버틀러는 비제도적인 방식으로 철학공부를 시작했으며, 철학과 비철학의 구분에 의문을 품는다. 무언가가 철학으로 인정되고 말고의 문제가 대체 어떤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지 회의한다. 제도권 철학은 철학 외부의 작업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인색하지만, 역설적으로 철학은 문학적 해석과 현대의 문화연구에서 활력을 얻어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버틀러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명확해지고, 자신의 경계를 허물면서 타자에 대한 인정이 가능해진다고 한 것은 철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철학은 다른 학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정의하며, 경계를 허물면서 다른 학문들과 관계를 맺는다. 경계의 존재는 바로 확산의 조건이기도 하다. 철학은 자신에게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면서 확산된다. 인정을 향한 욕망은 대타자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려 하지만, 자신이 상실되었음을 알게 할 뿐이다. 상실된 자신은 이미 외부로 나왔고, 자신은 타자성(대타자)에 의해 충당된다. 타자성에 대한 통찰은 자아로의 복귀가 불가능함을 알게 하고, 마찬가지로 철학도 이 지점에서 자신이 ‘철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버틀러는 어린 시절 부모의 서재 혹은 지하실에서 이루어졌던 비제도적 철학과의 만남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철학적인 직업에 익숙했던 적이 없으면서도 버틀러는, 철학 텍스트를 읽고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삶의 문제에 중요한 지침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현실에서 철학이 삶과 분리되어 철학적 개념화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픔과 상실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철학을 실존적이고 정치적인 딜레마와 연결시키려는 신념을 잃지 않고 있다.
버틀러가 페미니즘 이론가로 명성을 얻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제도권 철학으로 진입하게 되자, ‘철학자로 인정’받는 문제가 외부에서 다시 불거졌다. 일부 정치이론가들이 버틀러의 강의가 철학 강의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버틀러는 철학이 무엇이며, 무엇이 철학에 속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무엇이 철학에 속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단지 철학 텍스트의 수사성에 대한 문제임도 깨달았다. 이 수사성을 통해 철학이 정치학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방식도 알게 되었다.
버틀러는 페미니즘 철학자들이 제도권의 철학에서 배제되는 현상을 직시한다. 과거의 자신처럼 ‘철학 바깥의 철학’이라는 유령과 같은 상황에 놓인 그 철학자들의 상황을 파악하려 한다. 이를 통해 도드라지는 것은 이들이 마주한 억압적 상황이 아니라, 이들이 이루어낸 학문적 성과들이다. 이들은 학제를 가로질러 대화에 참여하는 철학자들로서, 문학과 과학, 여성학 연구를 통해 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이 이렇게 교류하고 있을 때, 철학은 더 외롭고 국지적·방어적으로 고립되어갔다. 버틀러가 여기서 발견한 통찰은,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철학논의가 철학 제도 바깥에서 연구해왔던 학자들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철학은 순수성을 상실하면서, 인문학 전반에 걸쳐 생명력을 얻었다.
우리가 인정을 갈망하면서 외부에서 자신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철학도 인문학 속에서 자신을 반향하면서 철학 개념 자체를 스스로에게 낯설게 만든다. 인정에 대한 갈망이 타자성에 대한 통렬한 자각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철학도 스스로에게 낯선 것이 되어 인문학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제도권 철학의 배제 행위가 오히려 인문학 전체에 지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타자는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한다. ‘타자’이기에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우리 삶과 철학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2. 공동체의 시작과 허물기
버틀러가 말하는 공동체는 확고한 주체가 아니라 상실된 자아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어떤 충만하고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분열되지도 않고 상실되지도 않을 주체여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애초부터 분열되었고 타자가 자신인 줄 알고 있었기에 상실이 예정되었던 존재이므로 허물어짐이라는 방식을 통해 공동체를 만들고 연대할 수 있다.
버틀러에게 인정을 향한 욕망은 생존 자체를 위한 욕망과 같다. 사라지지 않는 인정에 대한 욕망은 외부에서 자신을 확인하려 한다. 우리는 누구도 자족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없기에. 그러나 인정을 향한 욕망마저 자기 자신의 욕망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대타자의 욕망으로 서로에게 인정을 요구한다. 우리 중 누구도 상대방이 원하는 만큼의 인정을 줄 수 없다. 또 모든 욕망과 능력을 파악할 수 있는 온전한 자기 자신을 가질 수도 없다.
정신분석은 자꾸만 우리에게 온전한 자아가 있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자아의 분열, 자아의 상실을 강조하면서 자아가 온전히 존재했던 어떤 지점을 상상하게 한다. 애초에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분열되었으며, 어떻게 상실되었는가. 나는 내 자아의 원형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인정을 향한 갈망 끝에 우리가 다다르는 곳은 자아의 복원이 아니라, 자아의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다. 이 상실은 심연 속에서 우리에게 공포와 허무를 맛보게 한다. 공포와 허무 속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고개를 들어 양옆을 한 번 돌아보자. 자아의 상실이라는 심연에 다다른, 자신과 닮은 또 다른 존재가 보이지 않는가.
연대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바로 여기서 시작되지 않겠는가. 이 창백하고 허무한 얼굴, 자아의 분열과 상실을 멍한 표정으로 곱씹고 있는 이 얼굴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확인한다. 우리 모두는 타자와 구분되는 동시에 타자에 구속되어 있으며, 타자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존재들이다.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할 자격과 능력을 갖춘 이들이 있다면 바로 이 타자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다. 타자에 대한 인정은 우리가 타자를 규정할 아무런 자격도, 능력도 가지지 않았음을 알게 될 때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자아는 타자보다 먼저 있지 않다. 우리 모두를 낳고 기른 것은 타자였다. 자아가 타자를 향해 경계를 허물어뜨리며 확산되고 생존하는 것처럼, 공동체 역시 경계를 허물어뜨리며 확산되어야 한다. 공동체는 균질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이 비균질성과 비고정성이 공동체를 유지하게 하는 힘이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그 ‘우리’는 얼마나 문제적 표현인가. ‘우리’가 안정과 확실성을 추구하며 만들어내는 보편의 규범이 언제나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동체의 규범이 폭력적이라고 말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다.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규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 실제로 규정을 계속해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우리가 규범을 실천할 때, 규범이 우리를 억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변형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도 중요하다. 결국 우리는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모든 불확실성, 미지의 가능성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규정도, 규범도 미래의 불확실성을 완전히 소거할 수 없다. 언제든 알 수 없는 미래가 우리로 하여금 방향을 잃게 할 것이다. 그래도 너무 많이 두려워하지는 말자. 이 모든 불확실성이 우리의 생존을 향하고 있음을 믿고,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