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세이
모로
/ 2018-05-28
/ 조회 2,116
첨부파일
- 니체 세미나 에세이.hwp 다운 23
관련링크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미나 에세이
2018년 5월 마지막 주
작성자 : (모로 가는) 모로
하지만 그의 영원회귀는 능동적이며 차이를 생성하는 영원회귀다. 먼저 8회나 반복되는 그의 기상 장면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 있는데, 현대인의 아침을 깨워주는 요란한 알람소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신의 신체를 억지로 깨우기 위해 알람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루의 시작부터 수동적일뿐 아니라 ‘신체성’에 위배된다. 자신의 신체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삶은 이미 자율적인 생명성을 상실한 것이다. 하지만 패터슨 씨는 자신의 생체리듬 - 부부는 이를 ‘침묵의 마법 시계’라 부름 - 에 따라 자연스럽게 신체가 깨어났을 때 눈을 뜬다. 그래서 그의 기상 시간은 6시 10분에서 30분 사이로 매일 다르다.
현대인들을 허무주의로 함몰시키는 주범은 매일 반복되는 의미 없는 노동이다. 하지만 패터슨 씨에게 버스 운행은 새로운 우연을 맞이하는 기회다. 무심한 표정이지만 실은 아이들의 할로윈 분장 계획, 어느 무정부주의자에 대한 남녀 대학생의 대화, 두 남성의 시답잖은 연애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시상을 떠올리기도 한다. 일이 놀이가 되고 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할 것 없는 그의 노동, 버스 운행을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자를 위한 신의 탁자(3부 ‘해돋이에 앞서’ 中)’의 경지로 둔갑시킨다. 하루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내야 하는 현대인들이 꼭 고양해야 할 기예가 아닐 수 없다.
산책길에 마주친 시시껄렁한 힙합퍼들, 일상의 예술가인 세탁소의 래퍼와 꼬마 시인 그리고 패터슨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바 주인, 실연남 에버릿과 대화를 나눌 때도 그는 주로 경청하는 쪽이다. 이들과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어린아이 같아서 순진무구한 우연(3부 ‘감람산’에서 中)’들이다. 이들을 포착하기에 그는 반복적인 일상에 변주를 생성할 줄 안다.
⚁ 기예 2. 신체성에 기반한 창조성
“창조. 그것은 고뇌로부터의 위대한 구제이며 삶을 가볍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는 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뇌가 있어야 하며 많은 변신이 있어야 한다.” (2부 ‘행복이 넘치는 섬들에서’ 中)
우연을 필연으로 끌어올리는 기예를 바탕으로 패터슨 씨는 예술가가 된다. 즉, 그는 늘 시를 짓는데 - 시를 쓰는 버스 기사라니, 상상하지 못한 조합이다 - 버스 운행이나 산책 등 일상 속에서 수집한 이야기들이 그를 통해 시가 된다.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이라는 도시를 걸으며 사람을 연구하는 일을 시골에서 식물을 채집하는 일에 비유한 바 있다. 즉, 그가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의 글의 소재가 됐다. 패터슨 씨 또한 그러하다.
한편, 그의 시는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일상적 소재들을 정직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가 ‘포도주에 불순물’을 섞어 ‘하나같이 피상적이요 얕은 바다들이니(2부 ‘시인들에 대하여’ 中)’라고 비난했던 시인들과는 뭔가 좀 다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요즘 우리가 좋아하는 제품은/ 오하이오 블루 팁/ 진하고 옅은 청색과 흰색 로고가/ 확성기 모양으로 쓰여 있어/ 더 크게 외치는 것 같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이 있어요./ 차분하고도 격렬하게/ 오롯이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사랑하는 여인의 담배에/ 불을 붙일지도 몰라요/ 난생처음이자 앞으로도/ 다시없을 불꽃을.”
이 시는 월요일 아침 식탁 위에서 홀연 존재감을 드러낸 성냥갑 - 패터슨 씨의 ‘성냥갑’은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에 견줄 만한 듯 - 에서 탄생했다. 그의 시는 철저하게 오늘, 대지, 그리고 삶에 발을 딛고 있으며, 그에 대한 ‘긍정’을 담고 있다. 게다가 시를 짓는 작업은 사물들의 가치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비틀거나 새롭게 규정하는 작업이기에 더욱 의미 있다. 즉, ‘자신의 덕’을 생성하는 작업이다.
그의 부인 로라는 그보다 한술 더 뜬 생활밀착형 예술가라 할 만하다. 항상 흥이 넘치는 그녀는 커튼, 쿠션, 시트, 옷, 기타, 쿠키 등 보이는 모든 것 - 심지어 도시락 속 귤껍질에도 - 에 그림을 그리고 재봉틀을 돌리며 컨트리 가수를 꿈꾼다. 게다가 종종 신 메뉴와 창의적인 요리(양배추 파이)를 내밀어 패터슨 씨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녀의 모든 페인팅은 흑과 백를 모티브로 한다는 점에서 그녀가 분명한 ‘취향’의 소유자임을 드러낸다. 일상 속에서 예술적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는 그녀는 진정 패터슨 씨의 좋은 ‘벗’이다.
니체는 예술을 인간을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진정제이자 자극제로 보았는데, 이러한 창조활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생성을 촉구하기에 위버멘쉬에게 꼭 필요한 기예다. 커트 보니것도 그의 에세이 《나라 없는 사람》에서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패터슨 씨의 시는 대부분 걷기와 더불어 발현된다는 점이다. 홀로 걷는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모든 존재가 말이 되기를 원하는 고독(3부 ‘귀향’ 中)’을 체험하는 좋은 방법이다. 또한 걷는다는 행위가 ‘경청하고 탐색하는 자기’를 활성화시킴은 일찍이 루소, 헤겔, 키르케고르, 홉스 같은 다수의 철학자들이 산책을 예찬했던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레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에 가장 가까운 것이 보행이며, 보행은 몸과 마음과 세상이 한편이 된 상태’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걷기와 함께 창조되는 시는 신체활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 기예 3. ‘그냥 지나가기’ 신공
“연민의 정이라는 것을 경계하라. 그곳으로부터 무거운 구름이 몰려오니!” (2부 ‘연민의 정이 깊은 자들에 대하여’ 中)
앞서 언급했듯이 버스를 모는 패터슨 씨는 매우 무심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아내와 대화를 할 때도, 맥주를 마실 때도, 심지어 버스가 고장 나고 바에서 자살소동이 벌어졌을 때도 으레 그 덤덤한 표정을 고수하며 침착성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감각이 무디어서가 아니다.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자 특유의 굳건함과 담대함이라 할 수 있다. 항상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동료 도니, 이별 통고를 받고도 집착을 버리지 못해 질척대는 에버렛, 아내의 비상금을 훔쳐 체스경기에 나갔다가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바 주인 등 울상을 짓고 있는 주변인물들 - 이른바 ‘왜소한 자들’ - 과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아침마다 반복되는 도니의 넋두리를 들어주는 듯하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그의 기예는 신공에 가깝다. 마치 ‘무자비하게 제 갈 길을 가는 태양’처럼 보이는 패터슨 씨는 함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연히 건강성을 잃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패터슨 씨가 냉혈한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따뜻한 심성을 지녔다고 보아도 좋다. 공장가에서 홀로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소녀의 말동무를 자청하기도 하고, 총으로 자살 위협을 하는 에버렛을 단숨에 제압한 것도 패터슨 씨다. 가끔은 부랑자에게 적선하기도 하지만 조건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많은 부분을 할애해 정직하지 못한 연민과 선처를 경계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분명히 ‘치유가 가능하지 않은 환자를 위해 의사가 되고자 해서는 안 될 것이다(3부 ‘낡은 서판들과 새로운 서판들에 대하여’ 中)’라고 가르쳤다. 연민과 선처를 베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섣부른 연민과 선처의 마음을 걷어차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분명 패터슨 씨는 이를 알고 있는 것 같다.
망각,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대들이 일찍이 어느 한순간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 일이 있다면, ‘너, 내 마음에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 (…)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고,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실로 묶여 있고 사랑으로 이어져 있는,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 된다.” (4부 ‘몽중보행자의 노래’ 中)
늘 평화로울 것만 같은 패터슨 씨의 일상에 대형사고가 발생한다. 바로 반려견 마빈이 습작노트를 잘게 분쇄해버린 것. 그동안 정성껏 써 내린 시들이 하루아침에 부서지고 말았다. 일순 망연자실해지지만 그는 분노하지도, ‘원한의 감정’을 품지도 않는다. “괜찮아, 그냥 낱말일 뿐이야. 물 위에 쓴”이라며 그 상황을 위로하는 패터슨 씨. 하지만 웬만한 일에 동요하지 않는 패터슨 씨도 이번만은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는지 그만의 ‘케렌시아(안식처)’, 폭포 앞을 찾는다. 그리고 우연히 그곳에서 만난 한 일본인 시인에게 새로운 노트를 받고 다시 시를 짓기 시작한다. 그렇다. ‘어린아이’처럼 ‘망각’하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자신을 극복한 순간이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영화 ‘패터슨’ 中)
마지막으로 패터슨 씨에게 배우고 싶은 기예로 망각을 추가한다. 망각은 위대한 건강을 쟁취한 자만이 행사할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의 기예다. 패터슨 씨의 위대한 건강은 그의 일주일을 살펴본 바, 우연을 긍정하며 반복되는 일상을 주사위 놀이로 즐기는 ‘어린아이 정신’과 신체성에 근거한 창조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