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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세이
모로 / 2018-05-28 / 조회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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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미나 에세이 

                                                                                      2018년 5월 마지막 주

                             작성자 : (모로 가는) 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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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시의 패터슨 씨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기예

 

 


그의 말! 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랑하노라.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지니고 있는 자를.” (1부 ‘머리말’ 中)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1부 ‘머리말’ 中)
“춤 한 번 추지 않은 날은 아예 잃어버린 날로 치자! 그리고 큰 웃음 하나 함께하지 않는 진리는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자!” (3부 ‘낡은 서판들과 새로운 서판들에 대하여’ 中)

발화욕이 왕성한 차라투스트라는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주옥같은 명언들을 쏟아냈다. 그래서 책을 덮는 순간, 정작 차라투스트라가 뭐라고 말했다는 건지…. 그 많은 말 중 골자를 꼽자면 다음 말이 아닐까 싶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1부 ‘베푸는 덕에 대하여’ 中)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1부 ‘머리말’ 中)’라고 호기롭게 선언한 차라투스트라는 우리로부터 성공했을까. 그의 말에 따르면 중력의 정령이 어깨를 짓누르고, 원천적으로 영원회귀가 허무로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위대한 건강’의 소유자 차라투스트라는 ‘힘의 의지’를 곧추세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를 다그친다.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3부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中)

그러나 영원회귀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용기, 정직, 자긍심, 망각, 긍정성, 창조성 등 다양한 기예가 요구되니. 잠깐 기예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자. ‘예술로 승화될 정도로 갈고닦은 기술이나 재주’를 뜻한다고 한다. 짐작컨대 분명 보통 내공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일 듯싶다. 문제는 이러한 기예들을 익힌다 해도 실존적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점. 막연함이 여전해 주변에서 위버멘쉬의 롤모델을 찾아보기로 했다. 
불현듯 지난해 12월에 상영했던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 씨가 떠올랐다. 그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자유롭고 삶의 풍요로운 의미를 누릴 줄 아는 자다. 그래서 그의 삶은 고요하지만 사랑으로 충만하다. 간혹 너무 지루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 호르몬은 격정적인 ‘엔돌핀’이 아니라 평온한 ‘세로토닌’이라고 응수하련다. 패터슨 씨는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길을 열어가기에 위버멘쉬 레벨 테스트가 있다면 분명 상위 랭킹에 오를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애정 하는 동물, 자긍심 높은 ‘독수리’가 바로 이러한 인물이 아닐까. 그래서 그의 기예들은 무엇이며, 어떻게 자신의 삶에서 기예들을 채택하고 있는지 관찰해보기로 했다.
물론 패터슨 씨의 사례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각자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창조하지 않으면 지난 6개월간의 세미나는 ‘알록달록 점박이’에 얼룩 하나를 더하는 격일뿐이다. 그러니 패터슨 씨로부터 그저 이제 막 자기 자신을 체험하기 위해 길 떠난 초보 ‘나그네’에게 도움이 될 몇 가지 팁만 얻고자 한다.

패터슨 씨가 삶의 예술가가 되는 법
먼저 패터슨 씨를 소개하겠다. 그는 미국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 시에 산다. 자신이 사는 도시와 이름이 같다. 그렇게 패터슨이라는 이름은 그가 모르는 이들의 입에서 무수히 오르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가볍다. 패터슨 시에서 23번 버스를 운행하는 그는 평일이면 어김없이 6시 반쯤 일어나 혼자 시리얼을 먹고 출근한다. 버스를 몰기 전, 회사까지 걸어가는 동안 떠올렸던 시상을 습작노트에 정리한다. 하지만 세속적 넋두리를 쏟아놓는 동료 도니에 의해 번번이 방해받는다. 점심시간에는 회사 근처 폭포 앞 벤치에서 아내 로라가 싸준 예술적인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다듬는다. 귀가 후에는 오늘은 어떤 즐거운 일을 벌였는지 자랑하는 사랑스러운 로라의 폭풍 수다를 들어주다가 저녁을 먹은 뒤 개 마빈을 데리고 동네 산책에 나선다. 산책의 마지막 코스는 바에 들려 맥주 한 잔을 걸치는 것. 그곳에서 동네 주민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이 그의 마지막 일과다.
그럼 본격적으로 그의 일주일을 관찰하며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그가 일상의 수레바퀴를 제 힘으로 돌아가게 하는 기예들은 무엇인지 꼽아보겠다.

⚀ 기예 1. 우연성에서 길어 올린 ‘아하!’
“아주 적은 것으로도 충분하다, 행복해지는 데는. (…) 더없이 적은 것, 더없이 조용한 것, 더없이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숨결 하나, 휙 하는 소리, 한순간. 적은 것이 최상의 행복의 본성을 만들어낸다.” (4부 ‘정오에’ 중)
 
얼핏 보기에 그의 삶은 매우 단조롭다. 게다가 영화는 어느 주의 월요일부터 그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이르는 만 7일을 순차적으로 나열해 그야말로 끊임없이 영원회귀하는 반복되는 일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매일 정해진 코스를 운행하는 버스 기사라는 점, 출퇴근길과 저녁 산책길의 동선이 같다는 점도 그 누구보다 중력장에 착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난쟁이’가 아닐까 미심쩍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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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영원회귀는 능동적이며 차이를 생성하는 영원회귀다. 먼저 8회나 반복되는 그의 기상 장면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 있는데, 현대인의 아침을 깨워주는 요란한 알람소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신의 신체를 억지로 깨우기 위해 알람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루의 시작부터 수동적일뿐 아니라 ‘신체성’에 위배된다. 자신의 신체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삶은 이미 자율적인 생명성을 상실한 것이다. 하지만 패터슨 씨는 자신의 생체리듬 - 부부는 이를 ‘침묵의 마법 시계’라 부름 - 에 따라 자연스럽게 신체가 깨어났을 때 눈을 뜬다. 그래서 그의 기상 시간은 6시 10분에서 30분 사이로 매일 다르다.    

현대인들을 허무주의로 함몰시키는 주범은 매일 반복되는 의미 없는 노동이다. 하지만 패터슨 씨에게 버스 운행은 새로운 우연을 맞이하는 기회다. 무심한 표정이지만 실은 아이들의 할로윈 분장 계획, 어느 무정부주의자에 대한 남녀 대학생의 대화, 두 남성의 시답잖은 연애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시상을 떠올리기도 한다. 일이 놀이가 되고 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할 것 없는 그의 노동, 버스 운행을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자를 위한 신의 탁자(3부 ‘해돋이에 앞서’ 中)’의 경지로 둔갑시킨다. 하루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내야 하는 현대인들이 꼭 고양해야 할 기예가 아닐 수 없다.

산책길에 마주친 시시껄렁한 힙합퍼들, 일상의 예술가인 세탁소의 래퍼와 꼬마 시인 그리고 패터슨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바 주인, 실연남 에버릿과 대화를 나눌 때도 그는 주로 경청하는 쪽이다. 이들과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어린아이 같아서 순진무구한 우연(3부 ‘감람산’에서 中)’들이다. 이들을 포착하기에 그는 반복적인 일상에 변주를 생성할 줄 안다. 

 

⚁ 기예 2. 신체성에 기반한 창조성

“창조. 그것은 고뇌로부터의 위대한 구제이며 삶을 가볍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는 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뇌가 있어야 하며 많은 변신이 있어야 한다.” (2부 ‘행복이 넘치는 섬들에서’ 中)

 

우연을 필연으로 끌어올리는 기예를 바탕으로 패터슨 씨는 예술가가 된다. 즉, 그는 늘 시를 짓는데 - 시를 쓰는 버스 기사라니, 상상하지 못한 조합이다 - 버스 운행이나 산책 등 일상 속에서 수집한 이야기들이 그를 통해 시가 된다.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이라는 도시를 걸으며 사람을 연구하는 일을 시골에서 식물을 채집하는 일에 비유한 바 있다. 즉, 그가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의 글의 소재가 됐다. 패터슨 씨 또한 그러하다. 

한편, 그의 시는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일상적 소재들을 정직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가 ‘포도주에 불순물’을 섞어 ‘하나같이 피상적이요 얕은 바다들이니(2부 ‘시인들에 대하여’ 中)’라고 비난했던 시인들과는 뭔가 좀 다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요즘 우리가 좋아하는 제품은/ 오하이오 블루 팁/ 진하고 옅은 청색과 흰색 로고가/ 확성기 모양으로 쓰여 있어/ 더 크게 외치는 것 같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이 있어요./ 차분하고도 격렬하게/ 오롯이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사랑하는 여인의 담배에/ 불을 붙일지도 몰라요/ 난생처음이자 앞으로도/ 다시없을 불꽃을.”

 

이 시는 월요일 아침 식탁 위에서 홀연 존재감을 드러낸 성냥갑 - 패터슨 씨의 ‘성냥갑’은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에 견줄 만한 듯 - 에서 탄생했다. 그의 시는 철저하게 오늘, 대지, 그리고 삶에 발을 딛고 있으며, 그에 대한 ‘긍정’을 담고 있다. 게다가 시를 짓는 작업은 사물들의 가치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비틀거나 새롭게 규정하는 작업이기에 더욱 의미 있다. 즉, ‘자신의 덕’을 생성하는 작업이다.

그의 부인 로라는 그보다 한술 더 뜬 생활밀착형 예술가라 할 만하다. 항상 흥이 넘치는 그녀는 커튼, 쿠션, 시트, 옷, 기타, 쿠키 등 보이는 모든 것 - 심지어 도시락 속 귤껍질에도 - 에 그림을 그리고 재봉틀을 돌리며 컨트리 가수를 꿈꾼다. 게다가 종종 신 메뉴와 창의적인 요리(양배추 파이)를 내밀어 패터슨 씨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녀의 모든 페인팅은 흑과 백를 모티브로 한다는 점에서 그녀가 분명한 ‘취향’의 소유자임을 드러낸다. 일상 속에서 예술적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는 그녀는 진정 패터슨 씨의 좋은 ‘’이다. 

니체는 예술을 인간을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진정제이자 자극제로 보았는데, 이러한 창조활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생성을 촉구하기에 위버멘쉬에게 꼭 필요한 기예다. 커트 보니것도 그의 에세이 《나라 없는 사람》에서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패터슨 씨의 시는 대부분 걷기와 더불어 발현된다는 점이다. 홀로 걷는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모든 존재가 말이 되기를 원하는 고독(3부 ‘귀향’ 中)’을 체험하는 좋은 방법이다. 또한 걷는다는 행위가 ‘경청하고 탐색하는 자기’를 활성화시킴은 일찍이 루소, 헤겔, 키르케고르, 홉스 같은 다수의 철학자들이 산책을 예찬했던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레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에 가장 가까운 것이 보행이며, 보행은 몸과 마음과 세상이 한편이 된 상태’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걷기와 함께 창조되는 시는 신체활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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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예 3. ‘그냥 지나가기’ 신공

 “연민의 정이라는 것을 경계하라. 그곳으로부터 무거운 구름이 몰려오니!”  (2부 ‘연민의 정이 깊은 자들에 대하여’ 中)

 

앞서 언급했듯이 버스를 모는 패터슨 씨는 매우 무심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아내와 대화를 할 때도, 맥주를 마실 때도, 심지어 버스가 고장 나고 바에서 자살소동이 벌어졌을 때도 으레 그 덤덤한 표정을 고수하며 침착성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감각이 무디어서가 아니다.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자 특유의 굳건함과 담대함이라 할 수 있다. 항상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동료 도니, 이별 통고를 받고도 집착을 버리지 못해 질척대는 에버렛, 아내의 비상금을 훔쳐 체스경기에 나갔다가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바 주인 등 울상을 짓고 있는 주변인물들 - 이른바 ‘왜소한 자들’ - 과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아침마다 반복되는 도니의 넋두리를 들어주는 듯하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그의 기예는 신공에 가깝다. 마치 ‘무자비하게 제 갈 길을 가는 태양’처럼 보이는 패터슨 씨는 함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연히 건강성을 잃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패터슨 씨가 냉혈한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따뜻한 심성을 지녔다고 보아도 좋다. 공장가에서 홀로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소녀의 말동무를 자청하기도 하고, 총으로 자살 위협을 하는 에버렛을 단숨에 제압한 것도 패터슨 씨다. 가끔은 부랑자에게 적선하기도 하지만 조건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많은 부분을 할애해 정직하지 못한 연민과 선처를 경계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분명히 ‘치유가 가능하지 않은 환자를 위해 의사가 되고자 해서는 안 될 것이다(3부 ‘낡은 서판들과 새로운 서판들에 대하여’ 中)’라고 가르쳤다. 연민과 선처를 베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섣부른 연민과 선처의 마음을 걷어차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분명 패터슨 씨는 이를 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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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대들이 일찍이 어느 한순간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 일이 있다면, ‘너, 내 마음에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 (…)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고,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실로 묶여 있고 사랑으로 이어져 있는,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 된다.”   (4부 ‘몽중보행자의 노래’ 中)

 

늘 평화로울 것만 같은 패터슨 씨의 일상에 대형사고가 발생한다. 바로 반려견 마빈이 습작노트를 잘게 분쇄해버린 것. 그동안 정성껏 써 내린 시들이 하루아침에 부서지고 말았다. 일순 망연자실해지지만 그는 분노하지도, ‘원한의 감정’을 품지도 않는다. “괜찮아, 그냥 낱말일 뿐이야. 물 위에 쓴”이라며 그 상황을 위로하는 패터슨 씨. 하지만 웬만한 일에 동요하지 않는 패터슨 씨도 이번만은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는지 그만의 ‘케렌시아(안식처)’, 폭포 앞을 찾는다. 그리고 우연히 그곳에서 만난 한 일본인 시인에게 새로운 노트를 받고 다시 시를 짓기 시작한다. 그렇다. ‘어린아이’처럼 ‘망각’하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자신을 극복한 순간이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영화 ‘패터슨’ 中)

 

마지막으로 패터슨 씨에게 배우고 싶은 기예로 망각을 추가한다. 망각은 위대한 건강을 쟁취한 자만이 행사할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의 기예다. 패터슨 씨의 위대한 건강은 그의 일주일을 살펴본 바, 우연을 긍정하며 반복되는 일상을 주사위 놀이로 즐기는 ‘어린아이 정신’과 신체성에 근거한 창조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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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이르니, 각각의 기예들이 작동하는 원리가 궁금해졌다. 기예들은 마치 서로 긍정적 영향을 미치며 위대한 건강이라는 하나의 기예(중심 축)로 결집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위대한 건강은 새로운 시작의 원동력이 된다. 우연성을 즐기는 긍정성과 신체성은 안 쓰는 근육을 일부러 단련시켜 육체의 건강을 증진하는 피트니스처럼 창조성을 추동하는 일종의 자기(큰 이성)의 근력이 아닐까. 이러한 근력이 굳세 지면 굳세 질수록 삶의 창조성이 활성화된다. 이렇게 활력이 충만한 삶의 창조성은 위대한 건강을 선사하며, 위대한 건강은 다시 긍정성과 신체성 그리고 창조성을 고양시키는 선순환을 일으키는 동시에, 원한이 없는 망각에서 비롯된 새로운 시작(자기극복)을 고무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원한이 없는 망각이란 도대체 얼마나 자신을 단련시켜야 가능할까. 아마 위대한 건강을 한껏 쟁취한 자만이 떨칠 수 있는 위버멘쉬 고수의 경지일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단단하기 마련이다” (3부 ‘낡은 서판들과 새로운 서판들에 대하여’ 中)
 
니체를 읽기 전,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사람은 시인도, 화가도, 음악가도 아닌, 세상에 없던 라이프스타일을 기획하고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제 니체를 읽고 보니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빚는 삶의 예술가가 다름 아닌 위버멘쉬였다. 일상을 시로 만드는 패터슨 씨처럼 나날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나도 부지런히 나만의 위대한 건강법을 개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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