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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거북이 / 2018-05-30 / 조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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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죽음 이후 구원의 문제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중심으로



빠른거북이


신은 죽었다. 가난, 멸시, 외로움에 시달린 우리에게 더 이상 기댈 천국은 없다. 용서도, 천벌도, 기도 응답도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묻는다. 그럼 어디서 구원을 얻어야 하느냐고, 어디서 위안을 얻느냐고.

 



Ⅰ. 신의 죽음과 살해


신의 죽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자신의 숲속에 파묻혀 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아직 듣지 못했나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16p)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자는 차라투스트라다. 니체(1844~1900)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두에서 신의 죽음을 선포하며 시작하고 있다. 이전에도 신의 존재를 부정한 철학자는 있었다.
포이어바흐(1804~1872)는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1850년 발표)에서 ‘종교는 인간이 갖고 있거나 두려워하는 해악에서 벗어나고 인간이 원하고 그의 환상이 상상하는 행복을 얻으려는 인간의 노력과 관계되는 일이다. 그것은 이른바 행복욕과 관계되는 일이다.’라고 썼다. 한 마디로 인간의 상상력이 신을 불러들였다는 의미다.
이보다 훨씬 이전에 스피노자(1632-167)는 <에티카>에서 신에 대한 긴 증명과정을 통해 신은 유일신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신을 부정하지 않고 있지만, 기독교의 유일신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자연이 신이라고 증명함으로써) 세계 인식의 변화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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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에티카>(1677년) 표지(이미지)


니체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신의 죽음과 인간에 의한 살해('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살해자 중에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니체, 즐거운학문 중) 까지 말한다. 존재 부정과 살해는 다른 의미다. 존재 부정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죽음이나 살해는 한때 존재했으나 없어진 것이다.
19세기 과학기술의 발달 덕분에 신의 섭리로 여겨졌던 많은 일들을 인간이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신을 상상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 포이어바흐 같은 철학자를 통해서 사람들은 감히 신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제 한때 정신을 지배했던 신의 영향력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다. 스스로 만든 유일신을 스스로 죽인다.


당시 상황

19세기 초까지 유럽인들에게 신은 인간의 한계 밖에 있던 절대자, 유일자였다. 그러나 19세기 중후반 과학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니체가 열다섯 살인 1859년 진화론이 출간되었고 패러데이(1791~1867)와 맥스웰(1831~1879) 덕분에 전자기학이 크게 발전했다. 니체는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 그의 글 곳곳에서 과학 영향을 읽을 수 있다. 한편 니체의 시대는 마르크스(1818 ~ 1883)가 활동하던 시기와 겹치기도 한다. 이제 니체가 보기에 인간은 기존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인정했던 ‘멈춰서 기도하는 인간’에서 벗어나 기존의 자신을 넘어서는 위버멘쉬처럼 ‘자꾸만 넘어서는 인간’으로 변화했다

 



Ⅱ. 빅뱅과 신들의 세계

 
우주의 기원, 빅뱅
천문학에서 불과 20년 전까지는 빅뱅(대폭발)을 우주 기원 정설로 믿지 않았다. 그러다 1992년 코비 위성을 통해 빅뱅 때 우주배경복사가 관측되어 빅뱅우주론이 정설이 되었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우주는 마치 점처럼 작았다가 고온·고밀도에 의해 138억 년 전 대폭발로 팽창되었다. (참고 렉처사이언스 KAOS, 기원 중 1강 우주의 기원, 우종학 교수(서울대 물리천문학부),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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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모형(이미지)
제일 왼쪽에서 팽창이 일어나고 38만 년 동안 어둠에 휩싸여 있다가
빛이 쏟아지며 확장한다 제일 우측을 보면 알 수 없는 암흑에너지로 인해 우주는 지금도 가속팽창하고 있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가진 우리가 우주 대폭발로 일시에 퍼져 다른 시공간에 위치한 것이다. 예를 들면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던 갓난아기가 갑자기 대폭발로 1초도 안 된 시간 만에 아기1은 용산구 이태원동에 날아가 있고, 아기2는 한국과 13시간 시차가 있는 뉴욕 센트럴파크에 날아가고 있고, 아기3은 저 멀리 태양을 향해 아직도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뿌리가 같았지만 이 중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서 철이 되고 누군가는 산소가 되고 누군가는 탄소가 된다. 그러나 이들은 원래 하나였다.


우리는 138억 년 전 태어났다
우리는 모두 138억 년 전에 빅뱅으로 태어났다. 우리가 죽어서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그게 무엇이든. 니체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돌로 태어날 수도 있고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바퀴벌레 나무 먼지로 태어날 수도 있다. 우리 는 수억 년 전 삼엽충이었을 수도 공룡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 중에 일부는 현재 바퀴벌레다. 그게 뭐 어떤가. 우리는 그저 전 우주의 일부로 순환한다. 우리가 죽어 우리가 태어나는 삶을 영원히 반복(영원회귀)하는 것이다. 우리는 138억 년 중 찰나를 반복하며 산다. 이 삶은 또 돌아온다.


우연의 연속
그러므로 우리를 만든 것은 우리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우연히 지구에 정착한 우리 속에서 우연이 연속으로 일어나 생명이 탄생했고 진화를 거듭하여 어떤 것은 인간이, 어떤 것은 코끼리가 되었다. 아직 어떤 지구형 행성에서도 생명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우연의 우연의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를 한때 인간은 기적이라고 믿고 신의 섭리라고 믿었다. 기적은 맞을 수 있으나 우리가 어쩌다 보니 만든 기적이다.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서 왔으며 기적조차 우리가 만든 것이다.


그대가 그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 올더스 헉슬리 같은 학자가 범신론을 주장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는 수많은 고대 종교 경전을 분석한 <영원의 철학>으로 종교계에 의미 있는(문학 못지 않은) 족적을 남긴다. 그는 이 책에서 결국 범아일여(그대가 그것이다 tatvam asi) 사상을 말한다. 범아일여(梵我一如)는 한 마디로 개별 자아와 우주가 동일함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영과 보편적인 근본 영spirit이 동일함을 지각하지 않고서는 자유를 성취할 수 없다. - 샹카라 (영원의철학, 올더스 헉슬리, 김영사, 2014)

 

우리가 신이라니.
누군가는 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다 왜 다시 신을 꺼내는 것인지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 여기서 신은 유일신과는 완전히 다른 신이다. 유일신은 우리와 다른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신이 되면 나와 신은 동일한 존재다. 내가 신이고 당신도 신이고 우리가 신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우주 공동체이고, 우주라는 신의 몸을 이루는 일부다.

  

신을 모든 곳에서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 곳에서도 신을 보지 못한다. (모든 것의 역사, 켄 윌버)

 

 

Ⅲ. 우리를 구원하는 우리


신이 천벌을 내리는 이유
우리가 신이라도 하더라도, 신의 죽음 이후 구원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신의 시체 위에서 신의 흔적을 찾아헤맨다. 실직한 교황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구원 혹은 의존할 대상을 찾는다. 이 때문에 과거 종교와 신이 탄생했다. 종교에서 구원은 대체로 천국, 극락 같은 평안하고 영원한 삶에 대한 보장을 의미한다. 특히 신분제도가 있던 과거에 궁핍하게 살아온 노예나 천민들에게 다른 세상(천국)의 존재는 이 지상의 불행한 삶을 구원해주는 역할을 했다.
현대라고 다를 것은 없다. 외롭고 힘든 이 삶에 다른 세상의 안락한 삶은 구원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은 굉장히 취약하다.


아버지는 내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고, 나는 하룻밤 새 무신론자가 되었다. 나에게 신은 악질이거나 죽었거나, 또는 두 가지 모두라는 사실이 금방 명백해졌다.


수많은 지식인들의 무신 간증서라고 볼 수 있는 <무신예찬>이란 책에서 영국 맨체스터 대학 법률대학원의 생명윤리학 교수인 존 해리스는 위와 같이 말한다.
구원을 주리라는 신, 선한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해리스 사례처럼 감당하기 힘든 갑작스런 사고에 하룻밤에 무너진다. 인간은 믿음 혹은 신념으로 산다. 그 믿음이 사라진다면 동시에 삶의 의미도 없어질 위험이 있다. 내 아버지가 혹은 내 배우자가 하룻밤에 죽는다면 다음 세상의 구원도 의미가 없어지므로, 믿음을 잃게 되고 삶의 의미마저 잃게 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신임을 자각한다면 더 이상 신이 선인지 악인지, 왜 신이 내게 이런 천벌을 내리는지, 신이 왜 이 엉망인 세상을 그대로 두는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신의 벌이니 시험이니 하는 상상력에서 해방될 수 있고, 우리 기억에 없는 죄(원죄)까지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결과이므로,
우리들은 숫자가 너무 많아서 선과 악으로 구별할 수 없다. 가치관은 상대적이니까. 따라서 전쟁이 사라지지 않고, 나쁜 악당이 꼭 벌을 받는 것이 아닌 카오스적인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이 수많은 신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점차 물질만능주의가 되어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신들이 모두 돈을 좋아하니까. 우리 탓이다.


 

 

구원 없는 구원

다시 구원은 무엇인가.
 살다 보면 삶의 곳곳에 후회와 아픔이 스며들기 마련이겠지만 이 삶이 어차피 한 번이므로 이 삶을 긍정하는 것, 비로소 내 삶을 구원하는 일이다.
또 다른 삶의 가능성(구원)을 없앨 때 이 삶이 구원된다. 다른 삶이 없으므로 과거 내 인생의 슬픔도 “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고 말하며 스스로 구제하게 된다.
영원회귀를 한다면서 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까. 우리는 우주라는 한 몸이고, 반복해서 영원히 태어날 운명이지만 다음 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자아라는 연속성이 이 몸에선 유지되지만 다음 삶에선 없다. 이 찰나 같은 삶이 한 번이요, 영원이 된다. 그래서 니체는 지난날을 긍정하는 것에서 구원(구제)가 온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의지와 용기가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살다 보면 삶의 곳곳에 후회와 아픔이 스며들기 마련이겠지만 이 삶이 어차피 한 번이므로 이 삶을 긍정하는 것, 비로소 내 삶을 구원하는 일이다. ​ 

 

 


지난날을 구제하고 일체의 “그랬었다”를 “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전환하는 것, 내게는 비로소 그것이 구제다! (차라, 236쪽)


함께 구원하기

아직도 구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내 안의 의존성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내 안의 신과 우주를 이루는 우리들 신을 믿으면 된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 믿음이다. 유일신을 믿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신앙이다. 믿음이 너희를 구원케 하리라!
니체의 철학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개인적인 변화에 치중했다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위버멘쉬(지난날 자신을 초월하는 사람)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자기자신의 위버멘쉬에 도달하기 위한 철학이다. 깨달음을 스스로 해야하는 것은 맞지만, 나만이 아닌 나도, 너도, 우리도 함께 위버멘쉬에 도달하면 행복이 배가 되지 않을까. 이를 위해 때론 고독에서 벗어나 서로의 손을 잡아야 한다.
내 몸의 일부가 심연에서 헤어나오지 못 할 때 손을 내미는 일은 연민이라고 질타 받아야 할 일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이타주의적인 행위도, 선한 행위도 아니다. 내 몸의 일부를 응원하는 행위일 뿐이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니까 너무 오래 아프지 말라고 약을 사다주는 일이다. 
우리는 최근 촛불집회, 미투운동을 통해 함께 손을 잡아왔다. 작은 불씨를 놓치지 않고 불씨를 이어 받아서 큰 불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불씨가 세상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아왔다. 구원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신이 준 언어라는 방언도 했고,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신의 음성까지 들었다. 당연히 유일신의 존재를 믿었다. 그러나 몇 년 후 고민 끝에 유일신을 버리게 되었다.
잠시 방황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행히 내가 나간 모임에서 스피노자를 알고 내 직장에서 빅뱅우주론을 알면서 나름의 신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면서 방황이 길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믿던 신의 모습이 완전히 변했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삶을 아프게 해왔고 실망시켜왔지만 결국 나(우리)는 나를 변화시키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믿는다. 우리 작은 신들은 작아서 보잘 것 없지만 작아서 함께 하는 순간 강력하다.
우리는 촛불로 만든 불덩어리 주변에서 춤을 춘다. 신이 잔인하게 살해된 자리에서 신의 시체를 둘러싸고 원형으로 둘러싸서 춤을 춘다. 우리가 벌이는 이 축제를 통해 우리는 살아있는 신들을 만난다. 구원은 나에게 있다, 내 손을 잡은 너에게 있다.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우리에게 있다. 우주는 오늘도 가속팽창하고 있다. 거대한 우주의 일부인 우리는 그만큼 더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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