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2017 오픈세미나 에세이 +1
토라진
/ 2017-12-11
/ 조회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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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 to KAFKA
(카프카 문학을 통과하는 전락과 관망의 줄타기)
카프카에게.
카프카 또는 K. 글쎄, 당신을 무엇으로 불러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그럼 당신에게 어떤 인사부터 해야 할까요? 그곳에서 안녕하신지, 형식적인 인사말부터 건네야 할까요? 뭐 그런 말들은 당신에게 필요 없을 것도 같네요. 개인의 안녕과 세계의 평화 같은 것에 당신은 관심이 없을 테니까요. ‘어차피 이 세상은 비극이야, 이번 생은 망했어.’ 라고 읊조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나는 당신의 소설을 읽으며 계속 들었거든요. 그런데도 당신은 밤새 글을 쓰고 낮에는 일을 하며 한시도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원하는 세속적인 삶의 성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아버지가 싫어하는 문학에 대한 열정 또한 외면하지 않았죠.
이런 당신을 사람들은 여러 방식으로 평가하며 칭송하기도 폄하하기도 하죠. 하지만 내가 생각하며 느꼈던 당신은 그런 평가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해요. 다만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견뎌냈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당신이 한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부끄러움과 비겁함, 그리고 세속과 경계 너머의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당신이 사명이었던 것 아닌가요? 당신에게 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이런 당신의 사명이 신에게는 불경한 일이 될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세계의 한계와 비극을 들킨 것도 모자라 이런 한심한 인간임을 자처하는 당신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서두부터 너무 당신에 대해 성급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 같네요. 당신을 만나게 되면 해야 되겠다고 했던 말들이 너무 많았나 봅니다. 미안해요. 그럼 이제부터는 당신의 작품을 읽으며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당신께 차분히 이야기해 볼게요. 이건 나의 개인적인 감상이니까 맘에 안 든다고 노여워하지 마시고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카프카, 또는 당신 소설의 인물들은 이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던 것일까요? 우선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요?
NO 1) 낯선 세계 안의 경계인
당신 작품의 대부분은 한 인물이 어떤 장소에 느닷없이 던져지면서 시작됩니다. <변신>에서의 그레고르도, <성>이나 <소송>에서의 K도 마찬가지죠. 이번에 읽은 <브레스치아의 비행기>에서도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도착했다.’
도착해서 ‘우리’가 발을 딛고 나아가는 곳에서, 그리고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세계가 비로소 펼쳐지죠. 그것은 이전에 구축된 익숙한 세계가 아니라 낯설고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래서 소설 속 인물들은 마치 탐험가가 된 듯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관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찰은 높은 곳에 아래를 관망하는 것으로 종종 드러납니다.
높은 곳에서 세계를 응시하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응시가 희망과 불안, 그리고 기쁨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입니다. 땅도 아니며, 하늘도 아닌, 그 경계로 상징되는 ‘높은 곳’에서 인간은 어쩌면 이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이야기들을 통해 어쩌면 반신(半申)적인, 인간도 신도 동물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경계인의 운명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와 세계와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당신에게 이런 경계에 선 경험과 감각은 어쩌면 평생 떨쳐버릴 수 없는 달콤한 고통이었으며 자기 성찰을 위한 고배(苦杯)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O 2) 가까워서 너무 먼, 닿을 수 없는 불가해한 세계와의 불협
당신의 작품 세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세계의 부조리와 부정성 속에서 드러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섣불리 신을 불러오거나 삶을 긍정함으로써 굳건하게 살아나가는 힘을 애써 끌어오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세계를 들여다볼 뿐이죠. 어떻게 하면 더 자세히 들여다 볼 것인가? 그것이 당신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에 대해 스스로도 궁금해 하지 않았죠. 당신에게 주어진 과제는 문제를 쥐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 그것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멀리 달아나 버린다는 것을 당신은 알게 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알 수 없다는, <젊은 오스발트의 이야기>속 인물의 한탄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고백이자 세계의 불가해성에 대한 통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성 안에서 글을 쓰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었나요?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은 다만 이런 실패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인간과 변함없이 냉정한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의 미세한 변화와 흐름들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글을 쓰고 작품 안에서 그런 인물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은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시문학의 승리’라는 말로 작품 안에 슬쩍 자신의 진심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시문학의 승리는 앞서 행해졌던 무수한 현실의 실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힘든 싸움의 분투를 굳이 ‘승리’라고 하고 싶었던, 그 소심함이 어쩌면 당신이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힘이 아니었을까요?
이처럼 당신은 자기 스스로를 양식으로 삼아 글을 쓰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외로움과 처절한 싸움의 상흔들이 때로는 자부심으로 때로는 울분으로 드러나곤 하는 것을 보면 어쩐지 당신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신의 일기나 미출간 단편들은 거칠지만 날것의 인간 카프카를 보는 것 같아 더욱 당신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당신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와 당신이 번갈아 쓴 기행문 형식의 [막스 브로트와 프란츠 카프카의 『리하르트와 자무엘』의 제1장]을 보면 당신과 함께 실재로 기차 여행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이거나 또는 당신이 아닌, 또는 둘 모두의 카프카, 당신과 함께 말입니다.
NO 3) 분열된 자아 또는 타자화된 ‘나’
위의 작품에서 보면 두 인물 리하르트와 자무엘은 한 사람 안에 두 가지의 상반된 특성이 혼재되어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위아래가 뒤집혀 놓인 똑같은 인형과 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결국 이것은 당신 안에 있는 두 가지 속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실제로 당신은 죽을 때까지 직장에서의 일과 글을 쓰는 일,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으며 두 가지 다른 정서를 가진 자신의 분열적인 자아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작품에 녹아냈으니까요.
또한 여기에서 나는 이러한 분열적인 자아가 함께 여행을 가는 방식에 주목했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상대의 밑바닥 심성과 기질을 적나라하게 알게 되면서 그 사람과 멀어지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리하르트와 자무엘은 서로에 대해 환멸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환멸을 앞에서의 자아의 분열과 연결시켜보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리하르트와 자무엘은 ‘리하르트 아닌 자무엘’ 또는 ‘리하르트 같은 자무엘’ 로서 자신을 객관화하고 타자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의 좌표를 정확하게 알고 내면의 정체성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하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당신은 세계의 인식을 이렇듯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데서 시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탐구는 인간 보편의 문제로 나아갑니다. 발가벗은 당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의 모습에 세계는 이미 들어있음을 당신은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런 응큼한 양반 같으니라고......
NO 4) 미세 감각을 통해 다다른 환상의 세계
이번에는 당신의 작품 속에 드러난 표현 방식과 감각에 대해 말해볼까요? 당신은 풍경이나 장소의 묘사에 집중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외부를 인식하는 감각에 대한 묘사에는 탁월했습니다. 특히 시선이 집중되는 방식, 소리가 들리는 형태, 피부로 느껴지는 감촉 등에 대해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큰 소음>이라는 작품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사실 습작처럼 보이는 작품입니다. 그저 들려오는 소음에 대한 묘사가 이어질 뿐 어떤 사건이 전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그 감각은 독특하고 특별하며 적확합니다. 이러한 감각의 훈련은 환상적인 상상력과 통합되면서 당신의 독특한 문학 세계가 형성하게 된 것 아닐까요? 이런 작품 중 하나가 <양동이를 탄 사나이>입니다.
<양동이를 탄 사나이>에서 나는 양동이를 타고 석탄을 구하기 위해 날아갑니다. 그러나 석탄을 얻지 못하고 석탄가게 부인이 휘두른 앞치마에 사라져버리죠. 석탄 가게 주인과 그의 부인, 나 사이에서 말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각자의 심리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불분명한 상태가 됩니다. 양동이를 타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절실함을 이해하는 것은 이상한 일임을 너무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당신에게 있어서 환상은 현실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환상을 통해 현실을 인식하게 하는 당신의 전략은 미세한 감각의 탐험을 통해 실현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자신의 이런 특별함으로 어떻게 현실을 살아갈 수 있었나요? 물론 그 특별함 때문에 당신은 늘 외로웠을 것이고, 또한 스스로를 그런 특별함 속에 가두기를 기꺼워했을 테지요. 당신의 애인들을 애달프게 하고, 결혼과 약혼을 미루는 일을 반복했던 일도 그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렇듯 사건을 유예하는 방식을 통해 당신이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NO 5) 유예된 시간 속, 사건의 흐름에 대한 응시
[시골의 결혼 준비]는 사실 당신의 일기 같았습니다. 애인인 펠리체와의 약혼과 결혼을 여러 번 번복하고 미뤄왔던 당신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죠. 약혼녀가 있는 시골에 가서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입장인데도, 주인공은 어떤 이유에서건 그곳에 가 닿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지연되면 사건은 진공 상태 속에 들어가게 되고, 중력의 힘에 이끌리고 있는 ‘나’는 그 세계와 단절되게 됩니다. 끊임없이 단절되는 이곳에서 ‘나’는 안전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 안전은 늘 불안과 부끄러움을 동반합니다. 이런 불안과 부끄러움을 감수하면서도 주인공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당신이 약혼을 미루었던 것은 고정화되어 버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두려워한 때문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버지로서 살아가야 하는 규정된 삶에 대한 두려움 말이죠. 아마도 당신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수많은 시선과 규정들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찾아 헤매기 위해 시간을 벌고 싶었던 것이겠죠.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짓이든 했을 테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할 수 있다면 해야 하기 때문이다.’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당신은 자유인이었습니다. 처절하리만치 자신에게 엄격하고 솔직한 당신은 아마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신 작품이 특별하고 가치 있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 아닐까요?
내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내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좀 더 솔직해질 수 있도록 용기를 준 당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동안 당신의 작품을 읽고 때로는 답답한 심정을, 때로는 부끄러운 마음을 당신과 공감했던 시간들이 내게 어떤 삶의 의미를 던져줄지 기대가 됩니다. 당신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물론 힘들고 지루할 때도 있었지만 말이죠. 당신의 이름을 들으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니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아마 당신은 내게 그런 존재인 듯합니다. 규정되지 않는, 늘 흔들리고 누군가를 흔들어대는 사람. 카프카,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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