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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푸코] 나는 청년으로 불리기를 거부한다
소리 / 2017-12-11 / 조회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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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우리실험자들 오픈세미나 에세이 원고> -소리

제목 : 나는 청년으로 불리기를 거부한다

 

여성의 쾌락은 어떤 것인가? 나는 이것이 궁금했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말해지는 여성성에 대한 것들의 대부분은 쾌락에 관한 부분들이다. 여성이 서술되는 순간은 ‘쾌락’과 연결된 곳이다. 그렇다면 다양하게 떠돌고 있는 여성에 대한 쾌락 담론을 살펴보면 여성을 알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여성을 알기 위해, 나를 알기 위해 쾌락에 대해 공부했다. 세상의 말이 가장 많이 떠도는 곳, 쾌락. 그래서 프로이트를 공부했고, 라깡의 책을 뒤적여봤으며, 다양한 소설을 읽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여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거기에는 세상이 말하는 여성이, 즉 남성이 말하는 여성만이, 그들이 말하는 여성의 쾌락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푸코를 읽으며 깨닫게 되었다. 지식의 방대한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지식이 누구의 지식인지, 누가 말하고 있는지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나는 남성들의 머릿속의 여성이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차고 넘치게 있어서 내가 어릴 적부터 체득하고 자라온, 기정사실화된 ‘진실’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진실’ 속에서 있었다.

이제 나는 질문한다. 누구의 진실인가? 누구를 위한 진실인가? 누가 말하고 있는가? 이제 나는 나의 진실에 대해서, 여성의 진실을 말하고 듣고자 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그 진실에 속할 수 없었고, 진실을 말 할 수 없었으며, 가려진 진실을 체득하고 배워야만 했던 내가 이제 나의 진실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나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 헬조선의 나이의 계층에서 밑바닥 언저리에 있는 20대. 헬조선에 떠도는 청년담론에서 나는 내가 “청년”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노오력을 하라는 기성세대의 부당한 요구와 수저론의 봉합담론이 말하는 그 청년 말이다. 소란스러운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삼포세대, N포 세대에 대한 나의 세대에 대한 진단이 떠돌았다. 나는 그 N포 세대의 청년이 나 인줄로만 알았다. 그동안 보수적인 한국사회는 나의 목소리에, 나의 힘듦에 관심을 기울이고 얘기를 들어주는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제대로 된 해결책을 탐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수저계급론이네, 헬조선이네 하는 말들로 미봉하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절망이 가 닿아서 누군가는 고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나는 “청년”이 아니었다. 그들이 말하는 담론 한 가운데에 나는 없었다. 삼포 세대를 넘어 N포세대. N포 세대는 내가 포함되어 있는 나의 세대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N포 세대의 핵심은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등등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의 욕망이 없었다. 나는 그것들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쉬운 것도 없었다. 그것들은 내가 힘든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제대로 된 단어가 아니었다. 심지어 나를 포함한 나의 또래의 포기와도 다른 것들이었다. 그랬다. 나는 청년이 아니다. 나는 사회가 보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 사회가 관심을 주지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존재다. 나는 젊은 여성인 것이다. 나의 세대의 젊은 여성들에게 ‘포기’는 없었다. 자발적 ‘거부’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삼포 세대, N포세대, 수저계급론 등등. 결국 그 진단은 예비 아버지로서의 젊은 남성의 목소리만 포착했을 뿐이다. 따라서 그 포기에 연애, 결혼, 출산 등의 것들이 포함된 것이다. 가부장의 모델이 무너지고, 여아 감별 낙태로 인해 여성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남성들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원래 남성들에게 생득적으로 주어진 것. 남성 모두에게 주어질 것이라 기대된 것. 그것은 남성의 성욕을 풀어줄, 결혼하여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을 대신 할, 아이를 낳고 키워줄 “여성”이다. 알파 메일 외의 나머지 남자들이 알파가 될 수 있는 최후의 보루 같은 장소, 그 장소가 가정이다. 사회가 제시하는 완벽한 남성성과 한정된 재화를 모두 가진 완벽한 알파메일(Alpha Male)은 소수다. 그곳에는 남성보다 사회로부터 낮은 지위를 부여받은 여성이, 소위 남성의 ‘기’를 살려주기 때문이다. 이 가정이라는 장소에서만큼은 남성도 알파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남성성의 최후의 보루는 “가정”이다. 남성이 마지막으로 쥘 수 있는 최후의 식민지는 여성이다.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여성은 가정이며, 인간이기 전에 식민지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현재의 헬조선의 상황에서는 그 최후의 보루의 “가정/여성”을 가지기 어려워졌다. 어려워진 이유도 한국형 가부장제 사회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한데, 80~90년대의 여아 감별 살해를 통한 결혼 가능한 여성인구의 절대적 숫자 감소 때문이다. 이제 생득적으로, 날 때부터 남성들에게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게 될 여성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과 좌절, 그리고 절망이 N포세대의 민낯이다.

N포 세대에 대한 걱정과 이에 대한 봉합서사를 말하는 기성세대는 아버지들의 가치와 질서를 전수해 계승해야 할 예비 아버지인 청년남성들의 남성성과 부계계승을 걱정하는 것일 뿐다. 실제로 청년(靑年)의 사전적 뜻은 첫 째로 “신체적ㆍ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이고 두 번째 뜻은 “성년 남자”라는 뜻이다. 관용적으로 청년 안에 여성과 남성을 아우르는 듯이 쓰지만, 그 사전적인 뜻으로나 맥락적인 뜻으로나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이들이 말하는 청년에는 젊은 여성은 들어가지 않는다. 현재의 청년 담론에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그들의 욕망을 듣지 않는다. 비혼선언, 비연애선언, 출산파업 등, 젊은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 나아가 연애까지도 원하지 않는 현상이 가시적으로 꾸준히 계속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저 젊은 여자들의 치기, 반항, 방황정도로 치부된다. 몇 년 동안 가시적으로 임신중절 수술에 대한 시위와 청원 그리고 서명운동을 계속하면서 젊은 여성들의 관심사가 임신중절임을 표현해 왔지만, 이 주제는 현재의 청년담론에서 말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저임금과 임금차별, 취업에서의 불이익이 매우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어제 오늘 일이 아닌 것이지만 이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다.

현재의 청년담론에서 말하는 것은 ‘젊은 남성들’의 취업·실업 문제이며, ‘젊은 남성들’의 연애·결혼 문제이며, ‘젊은 남성들’의 고통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배제된 존재라고 하는 20대 30대의 청년들이라고 세상은 주목한다. 그러나 여성은 배제되다 못해 지워진 존재들이다. 그들의 실업문제는 다뤄지지 않는다. 그들의 몸에 대한 결정권과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등은 청년 일반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여성의 고통은 인간의 고통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여성이란 그룹의 고통일 뿐이다. 청년남성이 한국 사회의 취약계급이라면, 청년여성은 계급에도 포착되지 않는 불가촉천민, 투명인간이다.

 

넘쳐나는 청년을 위한 담론과 진단 그리고 해결책들은 여성은 배제했기 때문에, 청년여성들은 이에 대한 정보도 그냥 들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더 물어야 한다. 이게 나/여성을 위한 것인가? 나/여성의 욕망인가? 누구를 위한 지식이고, 누구를 위한 진단인가? 누구를 위한 위로이며, 누구를 위한 좋음인가? 그리고 누구의 고통이며, 누가 말하는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권력적인 구조에 대한 포착을 한 것이 푸코였다.

 

푸코는 에피스테메에 대해서 말한다. 이 사회는 각 분야별로 특정한 담론에 의해 구성된다. 이를 구성하는 담론은 선택과 배제를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이 사이에는 권력이 작용하게 된다. 필연적으로 선택과 배제된 자들 간의 투쟁과 대립이 일어난다. 이러한 특징의 담론과 담론생성이 특정한 규칙에 의해 각 시대별로 구성하게 되는 지배적인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가 있는데, 이를 에피스테메라고 한다.

 

‘젊은 여성’으로서의 여성들은 배제된 자로서 담론의 한 구석에서 투쟁해야만 한다. 이 사회의 구석구석을 체계화 한 모든 남성적 질서로부터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제대로 인식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모든 구조는 남성의, 남성을 위한, 남성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이지만 여성들은 여성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다시 물어봐야 한다. 이것이 누구의 진실인지, 누구를 위한 지식이며, 누구를 위한 행동들인지 말이다. 요구를 해도 다시 한 번 해야 한다. 함께 독립운동을 해도 여성을 위한 투표권 운동을 또 해야 하며, 함께 노동운동을 해도 여성을 위한 또 다른 노동운동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사회가 말하는 청년들의 힘듦에 대해, 젊은 청년이자 여성들은 다시 묻고, 다시 요구해야 한다. 다른 힘듦이 여기에 있다고, 나의 진실은 주류의 담론이 포착한 그 진실과도 다르다고 말이다. 푸코의 계보학적 작업이 보여주듯이 모든 담론의 이면에는 배제된 자들이, 거센 반동의 세력이 언제나 권력투쟁을 벌인다. 자신의 진실을 온 몸으로 말하는 권력의지를 가진 여성들이 말이다.

 

묻고 싶다. 여성들이 청년들인가? 여성청년들이 청년들인가? 나는 온몸으로 청년으로 불리기를 거부한다. ‘청년’에는 담론에 선택 받는 소수들이 들어가 있는 편파적인 현실을 대변하는 단어일 뿐이다. 나를 청년으로 부를 수 있으려면, 청년의 고민에 여성 청년들의 것 또한 넣어야 한다. 나의 존재가 ‘여성’이라는 또 다른 카테고리로만 묶이지 않아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권력투쟁에 있어 청년이라는 단어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여성청년은 청년이었던 적이 없다. 청년은 늘 남성청년만을 대표했을 뿐이다. 나는 청년이지만, 지금의 담론에서 호명하는 ‘청년’으로 불리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끊임없는 대립과 반목, 투쟁을 통해 그 청년이라는 단어를 되찾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함부로 ‘청년’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으면 안된다. 나의 고민과 욕망과 절망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현 담론에 주먹구구식으로 우겨넣는 그 기만적인 행동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청년에, 사람에 여성이 있었는지를,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자신도 청년이고 사람이라고 말하고 투쟁하는지를 말이다. 나는 청년으로 불리기를 거부하지만, 청년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권력투쟁을 벌일 것이다. 그 속에 그토록 알고 싶었던 여성이, 내가 있을 것이다. 온 몸으로 말하는 나의 진실 한 가운데서 말이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그럴 것이다. 푸코의 계보학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권력투쟁 속에서 새로운 담론을 만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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