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2017 오픈세미나 에세이
올리비아
/ 2017-12-11
/ 조회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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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2017 오픈세미나 에세이 올리비아
제목 :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전에 생각해 봐야 할 것들
생각이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구. 같이 살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대화하고 토론하며 의견을 조율하려고 노력한다. 그 중에서도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기 힘든 이슈 중 하나가 페미니즘일 것이다. 왜 사람들은 페미니즘이란 단어만으로도 대화 시작 전부터 흥분을 하는 것일까?
요즘 인문학 모임이 많아 토론할 기회가 종종 있는데, 주제가 페미니즘일 때는 시작도 하기 전에 모두들 흥분해서 화를 내고 다른 이슈로 넘어가기 바빴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큰 이유를 생각해보니 사람들은 페미니즘 토론에서 자신에 대한 비난과 비하를 느끼는 것 같다. 어떤 여성관련 데이터나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하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은 무장을 하고 있다. 비난 받지 않기 위해 티끌만한 예외적인 내용을 가져와 상대방의 의견을 누르거나, 상대의 언행일치가 안되는 부분을 찾아내서 공격하기 바쁘다. 토론 할때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이런 일은 많이 벌어진다.
"너 페미니스트라며? 그럼 무거운 짐도 남자랑 똑같이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
"이쁘다고 칭찬하는데 왜 그래? 너 너무 예민한 거 아냐?" "너는 왜이리 남자답지 못하니?”
등등 여자 남자 모두에게서 많은 말을 듣는다. 나는 이 모든 말들에서 답답함을 느꼈지만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왜 난 답답함을 느끼고, 왜 그런지 설명조차 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어릴 적부터 두 가지 분리되어 교육을 받는다. 성별에 따라 좋아하는 색도 달라져져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길을 나의 길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서로의 다른 길을 경험해 볼 기회가 없고 타성의 경험이 무엇인지 그것이 나의 경험과 다르다는 것 조차 이해 할 수단이 없다. 이런 분리된 교육은 자연스럽게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다른 것 이라고 믿게 만든다. 성의 역할은 인간 경험을 분리시킨다. 여자라는 이유로 또는 남자라는 이유로 내 미래의 길은 이미 보편 통념에 의해 세팅되어 진다. 예를 들어 여자는 출산을 위해 몸을 만들어야 하고, 적정한 나이에 결혼해야 한다. 인생설계 전체가 출산에 맞춰져 있고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여성에게 그 의무가 내려진다. 그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방향인지, 남들도 그렇게 하니 나도 그래야 한다는 것인지 조차 분간하기 힘들다. 물론 남자들도 할말이 많을 것이다. 남자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수많은 규칙들은 정말 숨막히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성 역할의 구조를 계속 지켜나가고 있는 것일까? 부권제 사회 아래에서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은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 다른 성을 열등하다고 전제되어야 반대의 성이 높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 “계집애 같다”라는 비하 하는 말은 있어도 “사내애 같아”라는 비하의 말은 없다. 여성의 열등성을 전제하는 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깔려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떤 대기업을 다니는 남자가 있다. 그는 프로젝트에 팀원 중 여자가 껴 있다는 것에 몹시도 불편하다. 여자들은 일에 열의가 없고 힘든 일은 피해 가려고만 한다. 화장을 안 한 오늘 그녀는 또 생리를 시작했나 보다. 저렇게 티를 내고 다니니 그녀에게 일을 지시하기가 불편해진다.
이미 여성과 남성의 성향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여성을 비하하는 나쁜 사람이라고 욕만 할 수 있을까? 저 여자는 내가 약자니깐 편의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 이라고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태어나면서부터 성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타성을 이해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분리된 교육은 다른 성의 절반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성 역할을 만들어 내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
우리는 이미 짜여진 구조 안에서 태어났다. 사회화 과정을 거쳐 그 사회를 체득했고, 지금에 있다. 나의 생각이 정말 나의 생각인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인지 스스로 알 수도 없다. 사회화 과정에서 습득된 생각들은 내 안에서 기준을 만들어내고 그 기준은 쉽게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내면화의 무서운 점은 주입된 기준이 절대적이라고 믿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규칙을 지키며 그 규칙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옳고 그름, 너와 나를 가르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게 만든다. 단순히 비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배제 될 수도 있고,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규칙을 잘 지키기 위해 역할에 몰입하게 된다. 규칙의 대한 의문은 그 자체가 반사회적이라고 하여 비난 받게 된다.
이러한 사회화 과정은 가족에서부터 시작된다. 가족은 정치적이거나 그 밖의 권위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통제와 그 사회에 순응하게 만들기 위해 성원들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후 학교, 또는 그 외의 단체들과 사회활동에서 내면화로 단단해 진다. 그리하여 한 시대의 보편통념은 종교처럼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기준과 근거의 정당성을 찾아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는 공부 하는 내내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근거가 빈약하고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젠더의 기준은 보편통념이 되었다. 보편통념들은 한 시대나 한 지역을 꽤 뚫는 것 이여서 겉으론 누구에게나 맞는 옷처럼 보이지만 막상 입어보면 그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 옷이다. 사람들은 통념이 본인의 생각인냥 지지 하지만’ 모두들 생각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은 벗어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2005년에 히트 쳤던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혼기를 놓친 여성이 방황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김삼순 캐릭터의 나이는 30살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코웃음을 칠 일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감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보편통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이다. 이것을 절대적으로 믿기보다는 큰 구조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구조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큰 구조를 보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이면 이후 갈 길은 더 멀다. 구조 안에서 사회화된 각자의 말과 행동의 결과만을 놓고 서로 비난하는 일에 매몰된다면 우리는 그 구조 자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서로를 불편해 하며 적대시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각자의 잘못된 점은 덮어두고 사변적인 토론만 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사회화 과정으로 인한 주입된, 한가지의 관점으로 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눈과 감각을 갖게 노력해 보자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인 남성, 여성의 차별점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인류가 인위적으로 규정한 남성성, 여성성의 이분법적인 젠더 구조에서 오는 규제적 억압과 폭력성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구조를 보아야 하는데, 이는 모든(N) 성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비난을 하거나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같이 구조를 보는 것은 조율의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