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세미나 > 세미나에세이
  • 세미나에세이
  • 세미나에세이 게시판입니다. 좋은 공부는 에세이를 남깁니다.
세미나에세이

[코뮨] 노동과 잉여에 대한 원시의 감각, 자본의 감각
오라클 / 2017-12-10 / 조회 1,437 

본문

1. 원시의 감각과 자본의 감각 :: 문제는 감각이다!

 

a8a6751532912ae00283d7ebc9bc8367_1512954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Potlatch) 축제. 그들은 증여와 선물로 사회를 운영하였다.  

 

칼 폴리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되는 많은 것들이, 자본주의 이전의 여러 사회에서는 결코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원시사회에서 물건의 소유나 잉여에 대한 욕망은 ‘자연적’이지 않았다는 것, 노동의 대가는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않다는 것, 결국 노동하게 만드는 것은 순수한 노동의 기쁨이나 사회적 인정 같은 비경제적 동기라는 것이다. 원시사회의 경제학은 증여와 선물로 정의되는데, 오스트레일리아의 트로브리안드 제도에서 행해지는 쿨라(kula)교역이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Potlatch)축제 같은 것을 보면 그렇다. 

 

반면 19세기 시장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이익’이라는 동기에 근거하여 시장경제를 확립하려고 했다. 즉 사람들이 시장의 장사치처럼 행동하는 것이 ‘자연적’이며, 만약 사람들을 그저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시장이 ‘자생적’으로 생겨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사회가 도덕 차원에서 바람직한가와는 무관하게, 최소한 실현가능성은 인류라는 종의 영구불변한 본성에 기반한 것이므로 확고한 것이라고 보았다. 시장 자유주의자들은 경제적 인간이 자연적인 일반법칙이라는 전제에 입각해, 시장을 떠받치는 원리들을 인류문명의 전 역사에 투사해 놓았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존재를 원시사회에 투사하여, 호모 이코노미쿠스로서의 원시인 - ‘개인주의적 야만인’이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19C 시장 자유주의자들의 해석은, 이제 21C 자본의 발전에 비례하여 그들의 예측대로 ‘확고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소유와 축적을 욕망한다는 것, 대가 없는 노동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경제적 이익이 행위의 기본동기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움으로 감각되고 있다. 무엇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는가? 문제는 감각이다!

 

2. 쿨라와 포틀래치 :: 증여하는 사회, 선물하는 관계 

 

포틀래치는 치누크 인디언의 말로 ‘식사를 제공하다, 소비하다’를 뜻하는 ‘선물과 낭비의 게임’이다. 결혼식ㆍ성인식ㆍ제사 같은 축제 때 초대된 사람들을 실컷 먹이고 선물을 제공하는 것이다. 초대된 사람들은 초대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들이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아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게임에서 진 것이 된다. 또한 포틀래치는 대대적인 물자의 파괴를 수반하는데,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동판을 파괴하고 고래기름을 태워버리거나 수천장의 담요를 바다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런 것쯤은 얼마든지 내버려도 괜찮다!”는 물건에 대한 담대함을 과시한다. 결국 다른 누구도 보다 많은 물건을 선물하고 많은 물자를 파괴한 사람이 최고의 명예와 권위를 얻어 추장이 된다. 이렇게 경제적 재산의 소모를 통해서만 정치적 권위를 얻게 함으로써,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위가 겹쳐지는 권력화를 막으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쿨라는 ‘원’이라는 뜻을 가진 특이한 형태의 선물 풍습이다. 선물은 증여자와 답례자 사이에서 주고받는 것과 달리, 선물을 받은 사람은 원래 선물을 준 사람이 아니라 제3의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 A가 B에게 선물을 하면, B는 A가 아니라 C에게 답례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부족들은 2개의 정해진 물건을 선물하는데, ‘음왈리’라는 팔찌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리고 ‘술라바’라는 목걸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린다. 이때 음왈리와 술라바를 너무 오래 간직해도 안되며, 그것을 넘겨주는 데 인색해서도 안된다. 이것이 반복된다면 한 번의 선물은 대대적인 선물의 연쇄를 만들어내고 일생을 걸쳐 끊임없이 순환한다.

 

쿨라와 포틀래치 같은 원시사회의 증여는 재화의 교환ㆍ분배와 잉여재화의 소모라는 이중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증여는 시장과 화폐가 없는 사회에서 재화를 교환하고 분배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여기서 재화는 물건 뿐 아니라 사람(결혼, 수양)까지 포함된다. 한편 증여는 잉여재화를 소모하고 소비하여 필요 이상의 재화가 축적되지 않도록 저지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축적이 착취나 계급의 발생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축적을 저지하는 방식으로 티벳사회는 영여를 사원에 기부하고, 이슬람사회는 전쟁으로 잉여를 소모하였다!

 

원시사회의 증여는 ‘자발적 의무’라는 정의에서 이중적 성격이 잘 드러난다. 증여는 자발성에 기초하지만 도덕적 의무와 강제가 수반된다는 것이다. 증여는 주기, 받기, 답례라는 3중의 의무를 뜻하는 것으로 단순한 물건의 교환이 아니라 명예와 관련된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명예, 지위, 체면, 위신) 위해 증여를 하고, 증여를 하지 않으면 명예, 체면, 위신,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증여는 무사무욕이 아니라는 점에서 분명한 동기가 존재한다. 증여는 추장과 가신, 가신과 추종자 사이의 위계서열을 확립한다. 준다는 것은 자신이 보다 우월하다는 것, 더 위대하고 높은 주인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받는다는 것은 주는 사람의 위상을 인정하는 것이며, 답례하지 않거나 더 많이 답례하지 않으면 종속되거나 낮은 지위로 떨어진다. 그러나 증여의 이러한 동기는 ‘상인이나 은행가, 자본가의 냉정한 동기’와 다르며, 이들 문명도 이익을 추구하지만 현대사회와는 방식이 다르다. 재산은 타인에게 지출하고 충복을 얻기 위해 모으며, 교환은 향연을 베풂으로써 이루어지며, 증여는 처음 증여자나 교환자를 압도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받는 것보다 더 성대한 것으로 되돌려주는 ‘답례는 증여의 핵심’이다. 답례는 ‘재화의 거대한 교환ㆍ분배의 써클’이라는 증여의 선순환을 강제하는 고리이다. 누군가 받고 돌려주지 않는 순간 이 순환은 파괴될 것이며, 받고 더 적게 돌려주는 관계 속에서 선순환을 기대할 수 없다. 증여의 선순환을 강제하는 답례의 강제는 바로 ‘물건의 힘’에서 나오는데, 즉 교환되는 물건 속에 선물이 순환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효력이 있다. 교환되는 물건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주고받는 자의 영혼이 포함되어 있어, 물건과 더불어 자신의 일부인 영혼의 교환이 일어난다. 따라서 물건의 교환을 통해 ‘존경’을 주고받고, 물건의 영혼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구속’받는 자가 된다.  

 

3. 자본주의적 욕망은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않다 

 

이처럼 원시사회에서 준다는 것은 내가 더 우월하다는 것, 더 위대하고 더 높은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그것을 받는다는 것은 주는 사람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시사회는 선물에 의해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였는데, 얼마나 많은 선물을 하는가에 따라 존경이나 비난을 받게 된다. 그래서 원시사회는 선물하려고 경쟁하는 사회고, 선물하는 것이 의무인 사회였다. 원시사회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재물의 양으로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지만, 자본주의는 자신이 모은 재산의 양으로 사회적 지위를 과시한다. 물건을 타인에게 주는 것으로 보는가 혹은 내가 소유하는 것으로 보는가, 물건에 대한 감각의 차이이다. 물건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게 아니다. 

 

무엇보다 원시사회는 먹고사는 데 필요한 이상의 식량이나 재물을 축적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들은 축적하지 않으려고, 필요한 것 이상이 생기면 어떻게든 써버리고 일부러 파괴하기도 했다. 필요 이상으로 축적하려고 하면 자연의 생명력이 고갈되고, 공동체 내부에 불평등이 생길 것으로 예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시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하지 못했던 사회라기보다는, 차라리 물질적 풍요를 원하지 않았던 사회라고 해야 한다. 그들은 삶의 토대인 자연을 쓸 데 없이 갉아먹는 ‘자연을 해치는 풍요’와 공동체 내부를 해체하는 ‘불평등한 풍요’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시사회는 축적을 비난하고 낭비를 존경하는 사회였다. 축적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않다. 

 

따라서 원시사회의 부족들은 먹고사는 데 필요한 이상은 생산하지 않고, 필요한 것만 얻으면 더 이상 일하려고 하지 않았다. 원시사회의 부족들은 할 일 없이 빈둥대다가 배고프면 그때서야 비로소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호주 안헴지역의 원주민은 하루 4~5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은 하루나 이틀 일하고, 다음 하루나 이틀은 쉬었다. 아메리카 아마존에 사는 야노마미족은 일주일에 2~3일 정도만 일했다.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돌도끼보다 10배나 많이 생산할 수 있는 쇠도끼를 주지만, 인디언은 쇠도끼를 사용해서 10배를 생산하는 대신 노동시간을 10분의 1로 줄여서 같은 양을 생산했다. 보로로족은 인디언 보호국 관리가 총을 주고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지만, 총은 장식용으로 집에다 걸어두고 이전에 사용하던 도구를 계속 사용했다. 잉여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않다.

 

한편 원시사회의 원주민들에게는 노동과 지불을 연관시키는 관념을 발견할 수 없다. 노동을 임대한다든가 판매한다든가 하는 일은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노동은 보상을 필요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의무로서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지어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에게도 일을 해주고 지불을 받는 일이 없었는데, 낯선 사람에게는 인격적 차원에서의 의무와 유대가 없었으므로 명예와 사회적 인정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떠돌이 음유시인들은 대가를 받았고 그 결과로 경멸당했다.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않다.


반면 노동의 동기는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경쟁, 노동의 즐거움, 사회적 인정 같은 비경제적인 것들이었다. [경쟁] 원시부족들은 그 사회의 행동유형을 누가 더 훌륭하게 재생산하는가를 놓고 싸움을 벌인다. 얌 지지대로 쓸 커다란 막대들을 밭으로 운반할 때에나 수확한 얌을 운반할 적에 남자들은 속도와 운반의 완벽성, 들어올릴 수 있는 무게를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인다. [노동의 기쁨] 마로이족에게는 노동 그 자체가 목적이다. 밭을 단정하고 깨끗하게 잡것들을 싹 치우고, 곱고 튼튼한 담장을 세우며, 각별하게 크고 튼튼한 얌 지지대를 조달하는 등 다양한 미학적 목적을 위하여 많은 시간과 노동이 투여된다. 이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작물의 성장에 필요한 것이지만, 원주민들이 순수하게 필요한 한도를 훨씬 넘어설 만큼 정성을 바친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사회적 승인] 밭을 얼마나 완벽하게 가꾸는가가 어떤 사람의 사회적 가치를 재는 일반적 지표이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은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만큼의 근면성을 가지고 있다. 안다만제도의 주민들은 나태를 반사회적 행위로 간주한다. 경제적 이익이라는 동기는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않다. 

 

4. 증여하는 사회, 축적하는 사회 :: 결국은 배치이다!

 

a8a6751532912ae00283d7ebc9bc8367_1512954a8a6751532912ae00283d7ebc9bc8367_1512954 

 

 

어째서 더 발전한 자본주의에서 더 많이 노동을 할까? 원시사회에서는 하루 4~5시간 정도 자본주의의 절반만 일하고도 먹고살았다. 원시사회와 비교할 수 없는 생산력를 보유한 자본주의는 하루 8시간 이상 일하고 16시간 노동으로 인한 과로사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원시사회의 욕망은 먹고사는 것이 1차적이라면, 우리사회의 욕망은 그것을 넘어 무한히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도 생계를 위한 노동시간은 8시간보다 훨씬 짧을 것이다. 원시인은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현대인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적 욕망에 대한 다른 감각이다. 

 

어째서 인디언은 더많이 생산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보다 많이 생산해서 무얼 하지? 쓸 만큼만 생산하면 되지, 쓰지도 않은 물건을 만들 필요가 없고, 더구나 필요없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일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원시사회는 먹고사는 것 이상을 생산할 필요가 없는 사회였다. 많이 가지는 것을 비난하고 선물하는 것을 존경하는 사회, 저장을 비난하고 낭비를 존경하는 사회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은 불필요하거나 나쁜 것이 된다. 반면 자본주의에서 먹고사는데 필요한 것 이상을 생산하는 것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의 잉여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자본은 과잉생산된 물건들을 소비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광고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물건들을 주기적으로 처분하고 있는 것이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생산이 1차적인가, 그것을 넘어서는 잉여의 생산이 1차적인가, 생산에 대한 감각의 차이를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굶는 것은 사회가 가난해서 그런 걸까? 원시사회는 특별히 부자도 특별히 가난한 사람도 없었고, 아무도 굶어죽을 걱정이 없었다. 원시사회도 가뭄이나 홍수가 생기면 공동체 전체가 함께 굶주렸지만 개인이 굶는 일은 없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현대사회는 전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다. 현대 사회는 세계 인구의 2배가 먹을 정도의 식량을 생산하지만,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5초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죽어가고 있다. 무엇을 풍요로 볼 것인가, 무엇을 가난으로 볼 것인가, 물질적 풍요에 대한 감각이 달라져야 한다! 

 

원시사회의 경제학은 우리가 자연적이거나 인간본성으로 간주하는 전제들 중에 실증적인 것은 거의 없다고 증언한다. 우리는 물건에 대한 소유와 축적에 대한 욕망, 잉여와 노동의 대가가 자연스러움으로 감각되는 배치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의 바탕에는 경제적 동기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결국은 배치이다. 인간은 인간이다. 특정한 배치 속에서만 경제적이 된다!

 

선물과 증여가 사회운영의 원리가 되는 ‘증여하는 사회’와 소유와 축적이 운영원리인 ‘자본주의 사회’는 다른 동기에서 출발한다. 증여하는 사회는 증여의 동기가 ‘타인을 위한 것’인데 반해, 자본주의 사회는 축적의 동기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동기는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증여하는 사회는 타인을 위한 동기가 공동체를 거쳐 다시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는데 선순환’인데 반해,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을 위한 동기가 관계를 파괴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손실로 돌아오는 악순환’이라는데 있다. 타인을 위한 동기에서 출발했으나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오고, 자신을 위한 동기에서 출발했으나 자신에게 손실로 돌아오는 역설, 이것이 배치가 만들어내는 역설이 아닐까?

 

이처럼 잉여와 노동에 대한 감각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최근에 자본주의와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이러한 감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 내부에 다른 감각을 생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증여와 선물의 감각을 구성할 것인가, 잉여와 노동에 대한 다른 감각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신체에 익숙한 자본의 감각과 대결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낯선 공동체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다. 결국 그런 감각을 생산하는 배치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코뮨의 감각을 생산하는 아름다운 배치를 위하여-.

 

 

참고자료 ..........................

『자본』, 칼 맑스 |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 『증여론』, 마르셀 모스

댓글목록

세미나에세이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