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2017 그랜드오픈 에세이 : “흰 바람벽”에서 불어오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 +1
우주
/ 2017-12-11
/ 조회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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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세미나] “흰 바람벽”에서 불어오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
-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와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 가로질러 읽기
- 우주
파울 클레[Paul Klee],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1920년.
발터 벤야민이 1940년에 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문제적’인 글이다. 그레텔 아도르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출판할 의도가 없었기에 ‘벤야민식’의 표현이 자유롭게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식’이란 무슨 뜻인가. 미카엘 뢰비의 말을 빌리자면, “수수께끼 같고 암시적이며 알쏭달쏭한 텍스트”이자 “이미지, 알레고리, 계시로 뒤덮여 있고 기이한 역설”과 “번뜩이는 직관들이 가로지”름을 의미한다. 이 글이 출판된다면 “광적인 오해들이 엄청나게 생겨날 것”이라던 벤야민의 우려는 출판과 함께 실현됐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쉽사리 해독의 길을 찾기 어렵다.
이에 조금 다른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비슷한 시기 즉 1941년에 쓰여진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경유하여 벤야민의 사유를 읽어내려고 한다. “비감각적 유사성”은 전체주의라는 시대의 문제의식을 타고 당대의 한국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천체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늘”을 보는 이들에게 보인다. “별들의 성좌”에서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국적이 아니라 시대를 사유할 줄 아는 예민함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프랑시쓰 쨈 」과 도연명과 「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문장』 3권 4호, 1941년 4월.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에는 한 남자가 있다. “좁다란 방”에 사는 가난한 자이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외로운 생각” 속을 헤매다가 “흰 바람벽”에 이미지를 그려낸다. 이미지는 과거로부터 오지만 글자로 현현하는 음성은 “오늘 저녁”에 들린다. 글자들은 그를 “위로”하는 동시에 “울력”하며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게 한다.
이제 백석의 시어들을 구체적으로 벤야민의 사유에 대입해보자.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가난한 늙은 어머니”의 고생이 스쳐가고 ‘나’를 떠난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그의 지아비”와 “어린것”과 함께 저녁을 먹는 이미지가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은밀한 지침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선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복은 오직 우리가 숨 쉬었던 공기, 우리가 말 걸 수도 있었을 사람들, 우리 품에 안길 수도 있었을 여인들과 관련”이 있기에 “불현듯 등장할 뿐”인 “역사의 진짜 얼굴”을 보기 위해서 “과거를 붙잡”아야 한다. ‘나(시적화자)’는 마음속에 있던 “야만의 기록”을 회억함으로써 과거와 공명한다.
그러자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이 달라진다. 이미지 대신 “글자들이 지나간다.” 글자는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 대신 “오늘 저녁”의 “내”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써 ‘나’는 “경과하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문턱에 멈춰서 붙박인 현재”를 인식한다. “사유에는 생각들의 운동만이 아니라 생각들의 정지도 포함된다.” 정지된 현재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시간으로 충만한 시간이다.” 지금시간의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차는 경험을 하게 된다. “투박하고 물질적인 사물들을 위한” 세상에 살면서, “때글은 다 낡은 무명셔츠”를 입고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마시고 싶다고 생각”만 하는 ‘나’에게 외로움, 쓸쓸함, 슬픔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높음과 사랑처럼 “세련되고 정신적인 것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느닷없이 주어지는 과거의 이미지” 즉 “어떤 위험의 순간에 번득이는 어떤 기억을 제 것으로 삼”을 줄 아는 것에서 온다. 늙은 어머니의 “시퍼러둥둥”한 추위에 교감하고 지나간 애인의 삶을 따뜻하게 그려내는 ‘나’에게서 “과거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일으키는 재능”을 볼 수 있다.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글자가 이렇게 바뀐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렇다. ‘나’의 가난, 외로움, 쓸쓸함, 슬픔의 본질은 하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의 증표였다. 증표는 위로를 넘어 초생달, 바구지꽃, 짝새, 당나귀, 프랑시스 잠, 도연명, 라이넬 마리아 릴케의 울력을 담보한다.
마침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맺은 “암묵적 합의” 혹은 “은밀한 약속”이 밝혀진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백석의 “희미한 십오촉 전등”은 벤야민의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된다. “우리에게는 앞서 간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주어져 있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요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이런 요구에 응답하려면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 같은 “자연을 착취하기는커녕 자연의 태내에 잠들어 있는 잠재적 산물들을 출산시킬 수 있는 노동”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전체주의를 살던 벤야민과 백석의 칠십여 년 전의 목소리가 현재에도 유효한가? 그렇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예외상태’가 상례임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진보의 이름으로” “낙원”을 약속하지만 빈자들의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이 보일 뿐이다. 억압받는 자들은 “노예처럼 종속된 이들”이 되어 사유조차 착취당한다. 그들은 “무명의 노역”으로 자본에 봉사하면서도 “승리자들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바라보는 자는 “왜소하고 흉측해졌으며 더 이상 그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꼽추 난쟁이”가 되었고 “자동기계”는 이미 폐기되었다. 폐기된 자동기계만 가진 꼽추 난쟁이는 “적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아직은 절망하지 말자. “억압된 선조의 이미지에서” “증오”와 “희생정신”을 “회억”할 수 있다면 “곁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과제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함께 희미한 메시아적 힘으로 주어져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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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님의 댓글
우주
이미지 넣은 파일로 교체했습니다. ^^
파일에 주석이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