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ND OPEN] 2017 우리실험자들 오픈세미나_후기 +3
오라클
/ 2017-12-19
/ 조회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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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 OPEN] 2017 우리실험자들 오픈세미나
일시 : 2017-1216(토) pm2:00 ~ 6:00 / 참여 : 우리실험자들 모든 세미나
2017 우리실험자들의 [Grand Open] 세미나가 따뜻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올해 첫회로 진행된 그랜드오픈 세미나는 우리실험실의 모든 세미나에서 참여했는데,
에세이의 문제의식이나 내용에서 한해의 결실을 수확하는 듯 풍성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세미나에서는 어떻게 공부하고 있나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지요.
2018년에는 더 많은 회원들이 더 아름다운 에세이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라클 (코뮨세미나) :: 노동과 잉여에 관한 자본의 감각, 원시의 감각
| 선물과 증여가 사회운영의 원리가 되는 ‘증여하는 사회’와 소유와 축적이 운영원리인 ‘자본주의 사회’는 다른 동기에서 출발한다. 증여하는 사회는 증여의 동기가 ‘타인을 위한 것’인데 반해, 자본주의 사회는 축적의 동기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동기는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증여하는 사회는 타인을 위한 동기가 공동체를 거쳐 다시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는데 선순환’인데 반해,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을 위한 동기가 관계를 파괴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손실로 돌아오는 악순환’이라는데 있다. 타인을 위한 동기에서 출발했으나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오고, 자신을 위한 동기에서 출발했으나 자신에게 손실로 돌아오는 역설, 이것이 배치가 만들어내는 역설이 아닐까? |
요고마고 (코뮨세미나) :: 인어공주를 위하여 - 자본의 식민정책과 원시신체의 해체
시장경제체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문화적 진공 상태란 세균이나 바이러스보다 치명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동기 부여가 되지 않더라도 “경제적인 필요와 욕구만 생겨난다면 그것으로 문화적 공백도 저절로 메워지고 아무리 끔찍한 상태에서도 삶을 살아갈 만한 것을 만들어줄 것”만 같다. 사실 행동의 동기 부여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를 고민할 만큼 우리의 삶은 여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돌아보게 된 것은 인류학자들이 보고한 부족민들의 ‘문화적 진공 상태’에 대한 관찰기록 때문이었다. 그 기록은 문화적 공백이 경제적 필요와 욕구 따위로 전혀 채워질 수 없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원주민 부족들과 그중 도시로 이주한 이들은 문화적 진공 상태에서 그들 대대로 내려오는 모든 미덕을 상실한 채, 게으름뱅이 ․ 도둑 ․ 창녀들이 되었다. 이들은 예전의 그들 문화에는 전혀 없던 존재들이었다. |
소리 (페미니즘세미나) :: 나는 청년으로 불리기를 거부한다
나는 청년이지만, 지금의 담론에서 호명하는 ‘청년’으로 불리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끊임없는 대립과 반목, 투쟁을 통해 그 청년이라는 단어를 되찾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함부로 ‘청년’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으면 안된다. 나의 고민과 욕망과 절망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현 담론에 주먹구구식으로 우겨넣는 그 기만적인 행동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청년에, 사람에 여성이 있었는지를,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자신도 청년이고 사람이라고 말하고 투쟁하는지를 말이다. 나는 청년으로 불리기를 거부하지만, 청년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권력투쟁을 벌일 것이다. 그 속에 그토록 알고 싶었던 여성이, 내가 있을 것이다. 온 몸으로 말하는 나의 진실 한 가운데서 말이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그럴 것이다. 푸코의 계보학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권력투쟁 속에서 새로운 담론을 만들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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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페미니즘세미나) ::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전에 생각해봐야 할 것들
보편통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이다. 그 중 성별에 따른 통념들은 성에 분리된 경험을 하게 만들고 성에 역할을 부여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사회화된 각자의 말과 행동의 결과만을 놓고 서로 비난하는 일에 매몰된다면, 우리는 그 구조 자체를 보지 못할 것이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인 남성, 여성의 차별점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인위적으로 규정한 남성성, 여성성의 이분법적인 젠더 구조에서 오는 규제적 억압과 폭력성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구조를 보아야 하는데, 이는 모든(N) 성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비난을 하거나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같이 구조를 보는 것은 조율의 시작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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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진 (카프카세미나) :: Letter to KAFKA - 카프카 문학을 통과하는 전락과 관망의 줄타기
| 당신의 작품 세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세계의 부조리와 부정성 속에서 드러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섣불리 신을 불러오거나 삶을 긍정함으로써 굳건하게 살아나가는 힘을 애써 끌어오지도 않습니다. 당신은 다만 자신과 세계를 들여다볼 뿐이죠. 어떻게 하면 더 자세히 들여다 볼 것인가? 그것이 당신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에 대해 스스로 궁금해 하지 않았죠. 당신에게 주어진 과제는 문제를 쥐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 그것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위치의 좌표를 정확하게 알고 내면의 정체성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하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당신은 세계의 인식을 이렇듯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데서 시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탐구는 인간 보편의 문제로 나아갑니다. 발가벗은 당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
삼월 (카프카세미나) :: 피고는 왜 아름가운가 - 카프카와 소수성
| 그는 분명 소수자이다. 들뢰즈가 지적했듯, 독일어로 소설을 쓰는 체코의 유대인 카프카는 명백하게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들뢰즈는 그 점이 카프카로 하여금 진정으로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소수적 문학을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그러나 카프카는 때로 그 감각을 숨기려 하고, 혐오한다. 소수자는 소수성에 대한 혐오를 통해 소수성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이는 명백하게 자기혐오이다. 소수자가 자기혐오에 빠질 때, 소수성은 공격성으로 나타난다. 그러지 않으려면 레니의 경우처럼 자신의 소수성을 매력이나 특이성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소수성, 그리고 다른 감각은 분명히 우리 삶에 있어 혁명과 같은 무엇을 가능하게 할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레니가 우리에게 이미 알려주지 않았던가. 피고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신의 소수성을 자각한 사람이기에 그렇다고. |
나무 (들뢰즈세미나) :: 플라톤주의 전복이란? _시뮬라크르를 중심으로
| 세계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인 “오로지 차이들만이 서로 유사하다”는 시뮬라크르들의 세계를 정의하며, 세계를 그 자체가 허상인 것으로 제기하는 것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유사성 더 나아가 동일성을 일종의 생산물처럼, 즉 바탕을 이루는 같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 생산물처럼 인도하도록 제시합니다. 여기에서의 차이는 상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질적인 차이로써 본성상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는 수평적인 관계망을, 즉 차이들의 동등성을 바탕으로 한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평등한 세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단 하나의 존재가 아우성을 이룬다”는 존재의 일의성一義性(univocite)의 세계인 것이지요. 이러한 존재의 일의성의 세계는 또한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
기픈옹달 (동양고전세미나) :: 방황彷徨과 소요逍遙
나는 장자가 이야기한 방황과 소요를 똑똑히 알아채려면 루쉰이 말한 저 그림자의 발걸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생각한다. 그저 낭만적이기만 한 어슬렁거리는 산책자의 발걸음은 결코 아니다. 그 뒤꿈치에는 주저함보다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다. 서두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느긋하지도 않다. 거기에는 굴원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잠깐 언급한 예수의 질문에 묻어 있는 것처럼 단독자의 형상이 담겨 있다. 물론 이 표현은 매우 조심스러운데, 왜냐하면 저 발걸음을 내딛는 존재는, 루쉰에게도 장자에게도 개별적 존재로 떨어져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곳이야 말로 세계를 가감없이 만나는 새로운 지평의 지점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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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벤야민세미나) :: 흰 바람벽에서 불어오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
벤야민(독일)이 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문제적인 글이다. 이 글은 수수께끼 같고 암시적이고도 알쏭달쏭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백석(한국)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경유하여 읽어보고자 한다. 이 시도를 통해 전체주의라는 시대의 문제의식을 사유한 두 명의 작가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미래를 상정하며 현재를 산다고 생각했지만 이 두 명의 작가들은 그렇게 사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를 회억하는 것에서 현재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과정은 가난한 한 사람의 역사(백석) 속에도 있지만 역사 속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역사(벤야민) 속에도 있다.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할 때 과거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되어 우리의 지금(=지금시간)을 살아가게 할 것이다. 지금 즉 지금시간은 과거 속에 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동력이 된다. 그 동력에 힘입어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 속의 매초"에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부기 B의 말미)을 열어놓을 수 있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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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푸코세미나) :: 현대예술과 견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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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철학은 인간을 이성의 영역 안에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기 위해 동물성을 숨기며, 얼마나 스스로를 축소시켜왔는가를 문제 삼는다. 광기와 동물성 역시 인간의 진실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동물은 혼자서 새끼를 낳기 때문에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김도희 작가의 말은 동물과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 살아온 이들에게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충격과 더불어 과연 인간이 동물보다 나은 윤리적 존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축소시켜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진실과 권력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스스로가 가진 힘을 확대하면서, 악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추구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묻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기와 타자를 통치할 수 있는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
아라차 (푸코세미나) :: 이토록 끈질긴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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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라는 표상과 ‘주체’라는 허상이 참으로 끈질기다. 신앙처럼 자리잡아 내면의 저항으로 작용해 푸코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방해한다. 푸코는 “권력은 권력을 갖고 있고 배타적으로 쥐고 있는 사람들과 갖고 있지 못하고 권력을 참아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눠지는 어떤 게 아니다. 권력이란 유통하는 어떤 것, 아니 오히려 연쇄 속에서만 기능하는 어떤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체’ 또한 “어떤 형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글쓰기, 독서의 기술, 자기실천이나 사유와 표상의 점검기술, 자기 인식의 기술 등과 같은 다수의 기술들에 의해 고안되고 구축된다”고 전제한다. ‘권력’과 ‘주체’라는 표상은 우리를 단지 지도 위에만 머물게 한다. ‘권력’을 비난하면서도 ‘권력’의 따뜻한 보호를 꿈꾸고, 거울 앞에 놓인 ‘주체’를 혐오하거나 사랑하면서 말이다. 이 반복을 깨부시는 것이 푸코를 공부하는 자들의 첫 번째 에토스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댓글목록
우주님의 댓글
우주
오픈 에세이 후기 감사히 읽었습니다.
실험실 생활에 '오픈 세미나 및 송년회 후기'를 올렸습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2017 그랜드 오픈 만세!
이런 멋진 거 만든 오라클 만세!
내년에도 그랜드 오픈은 만세! (를 예상하며)
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오라클님! 이렇게 정리까지 다시 하시고 정말 고생많으셨네요.
세미나 기획해주셔서 감사하고,
덕분에 공부한 거 정리하고 새롭게 문제의식도 갖게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세미나 만세! 오라클 만만세!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