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공백] 시와반시 게재_아래로부터의 시 읽기_임솔아 편
희음
/ 2017-11-10
/ 조회 2,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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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부터의 시 읽기
- 임솔아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시도 넘치고 시평도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시와 시평은 시인과 평론가로 대표되는, 소위 전문가 그룹에 의해 쓰여져 왔고, 지면과 매체 또한 그 전문가의 작업 위주로만 자신들의 페이지를 메워 왔다. 시를 짓는 일은 차치하고라도, 시의 향유는 어느 특정 집단의 것이 아니어야만 하는데, 왜 우리는 특정 집단으로부터의 ‘읽어주기’만을 기다리게 되도록 길들여졌을까. 왜 그들의 ‘읽어주기’가 지표인 것처럼 느끼도록 떠밀려 왔던 것일까.
해당 기획인 <아래로부터의 시 읽기>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꾸려지게 되었다. 시를 좋아하고, 시를 올바로 향유하려고 하고, 시로부터 사유를, 사유로부터 실천과 변혁과 해방을 꿈꾸는 문학대중이 뭉쳤다. 그리하여 시대의 틈새를 벌리려 하는 새 시인의 언어를 더듬고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리듬과 사유에 우리들의 숨을 부드럽게 보태며 따라가 보기로 했다.
또 우리는 우리의 읽기를 기록하고 정리하고 선보이는 일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문학 향유 운동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단지 별것 아닌 해프닝으로만 끝나고 만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의미 있는 실패를 무릅쓸 것이며 가장 즐겁게 실패하는 방법을 고민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문학의 향유에 대해 품었던 그 최초의 질문만큼은 언제까지나 놓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
7월 4일 화요일 오후 두 시, 우리는 서울의 해방촌에 위치한 연구공동체 공간 <우리실험자들>에 모여 앉았다. 임솔아의 첫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각자 전체적으로 훑은 뒤, 그 중 임솔아의 시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되는 시 다섯 편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지면 사정상 그 중 더욱 완성도 높았던 세 편의 시에 대한 논의만을 싣기로 한다.
이를 기록하는 데 있어 기본적으로는 대화의 형식을 취하되, 그 각각의 화자에 대한 명기(본명, 가명, 혹은 A,B 등의 기호)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런 방식은 우선, 시간적으로 분절되었거나 흩어져 있던 각 화자마다의 해석을 한 단락 안에 요령 있게 엮음으로써 전달력을 높이기 위하려는 의도에 의해, 다음으로는,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보다 이런 우리의 ‘함께 읽기’가 우리의 사유를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멀리 나아가게 했는지를 보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에 의해 선택된 것이었음을 밝혀 둔다.
※※※
모래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
스팸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
난간 아래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떨어지라고 응원해 주었다.
내가 키우는 담쟁이에 몇 개의 잎이 있는지
처음으로 세어보았다. 담쟁이를 따라 숫자가 뒤엉켰고 나는
속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술래는 숨은 아이를 궁금해하고
숨은 아이는 술래를 궁금해했지. 나는
궁금함을 앓고 있다.
깁스에 적어주는 낙서들처럼
아픔은 문장에게 인기가 좋았다.
오늘은 세상에 없는 국가의 국기를 그렸다.
그걸 나만 그릴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서
벌거벗은 돼지 인형에게 양말을 벗어 신겼다.
돼지에 비해 나는 두 발이 부족했다.
빌딩 꼭대기에서 깜빡거리는 빨간 점을
마주 보면 눈을 깜빡이게 된다.
깜빡이고 있다는 걸 잊는 방법을 잊어버려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것일까.
▶ 이 시에서는 숫자에 대한 이야기가 거듭됩니다. 수두룩한 스팸 메일, 담쟁이에 달린 몇 개의 잎들, 돼지의 발과 나의 발에 대한 개수 비교, 수북하게 쌓인 모래에 비유되는 나. 그 숫자들을 세면서 시적 화자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확인하고 싶어 하는 그 무언가란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닐까요. 메일도 분명 나를 수취인으로 해서 보내진 것이고, 담쟁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키우는 것이며, 돼지 인형에게 내가 신고 있던 양말을 신겨 주는 행위란 곧 나를 벗어서 돼지 인형에게 입히는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라는 언급에선 직접적으로 ‘나’를 지시하고 있기까지 하고요.
▶ 만일 그렇다면, 그런 행위를 반복한다고 해서 애초의 목표를 이루게 되는 것 같진 않아요. 자꾸 미끄러지고, 더 멀어지는 것만 같은, 더 깊은 소외가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마지막에 내뱉게 되는 문장이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것일까.’라는 점에서 말예요. 우리가 버릇처럼, 일상처럼 타인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되풀이하는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그저 말일 뿐이었던 거죠. 무수한 혼자의 순간들을 흘러오고 있을 뿐이었던 거죠.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안간힘 써 보지만 그 많은 스팸 메일 중 ‘나’들에게 제대로 말 걸고 있는 상대편이란 건 없을 거예요. 스팸 메일을 보낸 쪽은 누군가라기보다는 일종의 시스템일 테니까. 그리고 이 시 안의 나 자신, 즉 시적 화자조차도 나의 분신들이 모래산의 전혀 특별할 것 없는 모래 한 알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 이 시의 종합적인 전개 양상을 보면 긍정에서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극단적으로 첫 연의 ‘수두룩했다’라는 말과 마지막 연의 ‘무수했다’라는 말의 비교를 통해서도 그 점을 알 수 있죠. 수두룩하다는 건 어찌 됐건 무엇의 수나 양이 많다는 걸 의미해요. 그런데 무수하다는 건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단어 자체를 뜯어 봤을 때, 수의 ‘없음(無)’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거든요. 세는 행위의 무의미함을 뜻하게 되는 거죠. 그것이 ‘나’이든, 혹은 나를 향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타자이든, 처음에는 많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없어져 버리거나 무한제로의 상황에 이르게 되는 걸 볼 수 있어요. 시의 중간쯤에 ‘돼지에 비해 나는 두 발이 부족’하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그건 나의 결핍을 인식하는 대목같이 보여요. 그 부분이 아마도, 마지막 연에서 무한제로로 표상되는 어떤 절대적 결핍에 대한 인식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 전체적 흐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제 경우에는 이 시를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나아감이라고 보고 있어요. 시의 초반에는 주어진 것에 대해 수를 세는 행위가 이어져요. 이를 테면 나에게 ‘보내진’ 스팸 메일, 매달려 ‘있는’ 물방울, 원래 ‘키우고 있던’ 담쟁이의 잎에 대해 그것들의 개수를 궁금해 하거나, 그것들에게 나를 투사하는 데 그치고 있죠. 반면 마지막 연에서는 내가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고 하거든요. 모래산이란 게 애초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그런 모래산을 쌓고 만들었다는 점에서, 화자가 그 개수들을 생산하는 존재로 이행했다고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돼요. 수동의 화자가 능동의 행위자로 변태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죠.
▶ 그런데 시가 하나의 정돈된 흐름, 순차적으로 계단을 밟아 나가는 방식으로 정리되지 않게끔 방해하는 대목들도 꽤 있어 보여요. 예를 들어 ‘떨어지라고 응원해 주었다’는 대목. 앞에서 말했듯, 이 시는 자기 자신, 즉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이 커다란 하나의 줄기가 되고 있어요. 타인을 통해 내가 호명되고, 또 그 호명을 통해 나의 다양한 정체성이 형성되며,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이 세계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음을, 그리하여 내가 ‘혼자가 아닌’ 존재임을 확인하려는 노력이기도 하겠고요. 그런 안간힘, 혹은 바람이 실패의 과정을 차례로 거듭하면서, 이 시의 마지막에 가서야 완전히 흐트러지고 깨져 버리는 것이 시의 전체적 흐름이라는 데 동의해요. 그런데 이미 두 번째 연의 ‘떨어지라고 응원해 주었다’는 구문이 그 순차적 흐름을 조금은 흔들고 있는 듯 보이거든요. 물방울들이 떨어지도록, 그 안간힘이 실패로 돌아가도록 바라는 것은, 화자가 하나의 관계에 대한 회의적인 자각을 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요. 타자에게서 이름이 불리고,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나의 외로움이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고 있다는 뜻으로 보이니까 말이에요.
▶ 이야기를 듣고 보니 ‘깁스에 적어주는 낙서들처럼/아픔은 문장에게 인기가 좋았다’는 연 또한 의미 없는 관계에 대한 자각으로 읽혀요. 하나의 방 안에 아픈 친구, 혹은 환자를 위로하고 다독이는 장면 대신, 문장이 깁스에게 끌리는 장면이 들어와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아픔’ 앞에 숱한 위로들이 바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사실은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깁스가 장난스러운 낙서들이나 문장들을 불러들인 결과일 뿐인 거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듯하거든요.
▶ 시적 화자는 어쩌면 깁스 위에 새겨진 글자들까지도 세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시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행위가 ‘세는’ 행위인데, 끝에서 두 번째 연에 가면 그 행위는 ‘깜빡이는’ 행위로 변주되기도 해요. 시적 화자에게 있어 세는 행위란 자기 고독, 자기 소외, 자기 상실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안간힘으로 상정되었던 듯해요. ‘빌딩 꼭대기에서 깜빡거리는 빨간 점을/마주 보면 눈을 깜빡이게 된다’는 두 행을 참조했을 때, 수를 세거나 깜빡이는 행위를 거듭하다 보면 자기 상실이라는 현실을 망각하게 됨으로써, 잠시간의 안식이라도 얻게 되리라는 믿음이 시적 화자에게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런데 화자는 ‘깜빡이고 있다는 걸 잊는 방법을 잊어버’렸다고 말해요. 깜빡이고 있다는 걸 잊어버려야만 무아지경에 들어갈 수 있고, 또 혼자가 아니라는 헛된 믿음 속에 잠시나마 발을 담글 수도 있을 텐데, 화자는 그렇지 못해요. 잊어버리는 방법을 잊어버렸으니까, 잊는 걸 못한다는 뜻이죠. 대신 고독 자체, 자신이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존재가 되는 거죠. 깜빡이고 있고 세고 있다는 자각을 잠시라도 멈출 수 없는 존재가 되죠. 자기 고독, 자기 소외, 자기 상실로부터 빠져나가려는 자신의 안간힘을 스스로 다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된다고나 할까요. 결국 화자는 ‘혼자’인 자신의 분신만을 무수히 쌓아 놓게 돼요. 모든 절망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완전한 ‘혼자’의 몸으로 말이죠.
※※※
모형
기린이 보고 싶어서
기린을 보러 간다.
기린은 보지 못하고
기린을 만든다.
기린을 지구 옆에 둔다. 지구 옆에
얼굴이 백팔십도 돌아간 채 웃고 있는
영웅이 있다.
지구가 보고 싶어서
지구를 돌린다.
바다가 이렇게나 더 많은데
해구가 아니고 지구가 되다니.
기린에 기린이 없어서
지구에 지구가 없어서
사람에 사람이 없어서
좋다.
보려던 것을 못 보면 가짜를 만들게 된다.
나는 사람 같은 모형이 된다.
이 세계도 어느 세계의 모형에 불과하다.
보고 싶은 세계를 보지 못해
이 세계를 만들던 손들이 지금
이 세계를 부수고 있다.
세계가 세계로부터 헛걸음을 한다.
나는 나를 모형들과 함께 세워둔다.
▶ 시를 읽으면서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 개념이 생각났어요. 이 세계,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것 위에 내려앉은 이 세계는 더 이상 실재도 아니고, 무언가에 대한 모방도 아닌, 모방 그 자체라는 이야기인데요, 이것은 모방의 대상이 되는 원본, 예컨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가 사라져 버린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 모방이 실재를 뛰어넘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해요. 초과실재가 실재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이죠. 모든 게 가짜라는 말이고요.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은폐기술들만이 판을 치는 세계. 시에서도 이 세계는 하나의 모형에 불과하다고 하잖아요. ‘이 세계도 어느 세계의 모형에 불과하다’고. 모형들의 세계가 바로 시뮬라크르의 세계와 부합해요. 여기서는 여전히 이 세계의 원본이 되는 세계를 상정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채 막연히 상상하고만 있으며, ‘세계가 세계로부터 헛걸음을 한다’는 언급에 의하면 그 원본조차도 완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 그렇다면 시인은 왜 이런 시를 썼을까요? 이 세계가 모두 가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질문을 한 번 바꿔 볼까요. 시인은 어떤 계기로 이 시를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마지막 연의 마지막 행을 보면 ‘나는 나를 모형들과 함께 세워둔다’는 말이 있어요. 나라는 모형을 나와 닮은 다른 모형들과 함께 세워둔다는 말은, 이 세계도, 나의 옆 사람도 나도 모두 모형이라는 깨달음에서 나온 말일 텐데요. 내가, 이 세계가, 세계 안의 인간들이 모두 모형이고 가짜라는 사실을 시적 화자가 알아차리게 된 것은, 바로 나의 옆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사람에 사람이 없어서’라는 독백에서 시적 화자의 고독감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사람에 사람이 없고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는 느낌, 대화 속에서 대화는 없고 말들끼리만 서로 엉킨다는 느낌에서 시적 화자는 뼈아프게 모든 것들이 가짜라는 말을 중얼거리게 되고 만 것이 아닐까요. 사람에 사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에게도 그것을 진짜인 것으로 만들어 주는 상징적 뼈대나 영혼 같은 게 깃들어 있지 않다는 식으로 생각을 확장하게 되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시를 시작하게 한 힘은 고독과 공허감에서 비롯된 절망, 혹은 자포자기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이 시의 정서를 대표하기도 할 테고요.
▶ 그런데 이 시의 문체를 보세요. 덤덤하고 가벼워요. 어린아이의 말투처럼 단문 형태로만 이어지지요. 그 점을 볼 때 이 시의 시적 화자가 절망적이어만 하거나 슬퍼하기만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오히려 화자는 자기 생존법에 주목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사람에 사람이 없을 때 나라는 사람은 어떤 포즈로 이 세계 앞에 서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대한 생산적인 해답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요. 진짜임을 확인할 수도 없고 진짜라는 것을 확인해 봤자 그리 달라질 것도 없는 이 세계에 대한 자각 뒤에는 무엇이 뒤따라야 할까 하는 고민이 있었을 테고, 화자는 그런 현실을 뛰어 넘고자 하는 나름의 방법론으로써 명랑성 혹은 단조로움의 화법을 취하게 된 것 같기도 하고요.
▶ 그렇다면 ‘이 세계를 만들던 손들이 지금/이 세계를 부수고 있다’든지 ‘나는 나를 모형들과 함께 세워’두는 행위는 어떤 뉘앙스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명랑성과 단조로움의 포즈가 이 세계에 대한 화자 나름의 대항 방법론이라면, 부서지고 있는 세계 안쪽에, 나아가 그 세계의 일부로서 그 부서짐의 질서 속에 자신을 편입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그게 너무 슬프게 느껴져요. 신이 이 가짜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다시 이 세계가 부서지도록 하고 있어요. 그 손길 앞에서 나라는 모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나를 내 옆 사람과 함께 부서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밖에는 없는 거죠. 덤덤함의 정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체념 혹은 절망의 어조가 더 깊게 느껴져요. 물론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묵시론적 구원의 주문처럼 그것을 읽어 낸다면, 부서져 가는 세계에서 모형 옆에 나라는 모형을 세워두는 것은 ‘세속적인 것의 질서를 따라가는 것’인 동시에 이 세계의 종말 이후에 도래할 다른 세계를 기다리는 행위로도 볼 수 있겠지만요. 벤야민이 말하는 절망을 희망하는 행위, 절망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행위 같은 것으로도요. 그러나 이 시 안의 법칙만을 따른다면 도래할 ‘다른 세계’ 또한 여전히 어느 세계의 모형에 불과한 상태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
동물원
검은 눈동자 주변을 검은 하루살이들이 배회했다. 눈동자에
빠져 죽은 하루살이를 손끝으로 꺼냈다.
무더운 나라의 동물원에도
북극곰이 있었다.
녹아내리는 얼음덩어리 위에
널브러져
북극도 북극곰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북극곰도
거기가 북극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입을 벌린 채
매일 아침 나는 순환선에 앉아 있었다.
비가 내렸고
돌돌 접은 우산의 꼭지에는 빗방울이 모였다.
내 몸을 타고 내려온 것도
발밑에 웅덩이로 고였다.
한 방울
한 방울
한 방울
호수가 남아 있었다. 북극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웅덩이를 순환선에 두고 내렸다.
▶ 여러 가지 지점에서 이 시에 대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는데, 그 첫 번째는 마지막 연, 마지막 행에 대해서랍니다. ‘웅덩이를 순환선에 두고 내렸다’고 말할 수 있는 그 패기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순환선, 혹은 지하철 열차 칸에 실수로 많은 걸 두고 내리죠. 그것들은 대체로 분실물들이 돼 버려요. 그리고 어디까지나 그것은 건망증이나 부주의함에 의한 것이에요. 그런데 여기의 화자는 그것을 일부러 두고 내리는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시 안에서 두고 내리는 그것은 흔히 우리가 거기에 두고 내리곤 하는 소지품이나 사물들이 아닌, 하나의 웅덩이예요. 그것은 누군가(하루살이)에게는 빠져 죽을 수 있는 못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그 누구를 살아가도록 해 주는 호수(북극곰)이기도 해요. 그 무언가를 두고 내리는 것으로써 화자는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거예요. 시인의 이런 상상력, 그런 저돌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요. 이 시에서 또 하나 놀라운 지점은 하루살이와 북극곰과 나를, 검은 눈동자와 북극의 호수와 웅덩이를 나란한 하나로 엮어내고 설득해 내는 기술이에요.
▶ 일단은 시의 시작부터가 특이해요. 뜬금없게도 내 눈동자 속에 하루살이가 빠져 죽죠. 나는 하루살이의 시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건져내고요. 너무 생뚱맞은 상황이 아닌가요. 북극에 있어야 할 북극곰은 북극이 아닌 무더운 나라의 동물원에 와서 녹아내리는 얼음덩어리 위에 널브러져 있어요. 흔하게는, 다양한 동물들이 있어야 하는 동물원에는 으레 추운 나라의 동물도, 더운 나라의 동물도 모여 있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죠. 그래야만 그것은 동물원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니까요. 하지만 이 시의 시적 화자는 그것을 생뚱맞음의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여기에 있어야 할 네가 아닌데, 왜 너는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거나 혹은 죽어가고 있니,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죠. 질문은 머지않아 ‘나’에게로 돌아와요. 나는 왜 매일 이곳, 순환선에 몸을 맡기고 앉아 있지, 하고 말예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되는 등굣길이거나 출근길이 화자에게 어느 순간 낯설게 느껴지게 된 거예요. 하나의 생뚱맞음이 되어 버린 거예요. 눈동자에 빠져 죽은 하루살이, 무더운 나라의 북극곰, 순환선에 앉아 있는 나, 이 모두가 어리둥절한 장소에 무기력하게 놓여 있는 그 맥락을, 시인은 절묘한 기술로 이어붙이고 있어요.
▶ 맞아요, 그게 임솔아 시인만의 독특하고도 탁월한 기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마지막 연을 보면, 시적 화자는 하루살이나 북극곰과는 다르게, 그저 무기력하게 머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장소로의 탈주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방금 전에도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웅덩이를 순환선에 두고 내’린다는 건, 자신이 살고 있거나 빠져 죽을 수도 있는 그 호수로부터 멀어진다는 의미이니까요. 순환선에 그것을 버려두고 혼자 빠져나오는 거죠. 그 행위는, 아무래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나의 영토로부터 벗어나는 들뢰즈 식 탈주의 몸짓임에 분명한 듯 보이거든요.
▶ 한 편의 시 안에서 그 마지막 몸짓이 탈주로 끝난다고 해서, 그게 이 시의 마지막 말일 것 같지는 않아요. 화자는 ‘매일 아침 순환선에 앉아 있’다고 고백하고 있거든요. 오늘 탈주한다고 해도 내일이면 다시금 순환선 열차의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게 되지 않을까요. ‘순환선’이라는 단어 속에 이미 그런 내일의 그림이 들어 있는 듯하기도 해요. 그것은 한 사람의 명(命)이 달린 절대적 일상에 다름 아닐 테니까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시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탈주 행위의 완성을 도모하는 시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아요.
▶ 순환선뿐만 아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모두가 환, 즉 동그라미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요. 나의 검은 눈동자, 호수, 웅덩이, 동물원 모두 말이죠. 직선을 그리며 바깥으로 뛰쳐나간다고 믿을 수는 있겠지만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그 누군가는 여전히 하나의 큰 원을 그리며 세계를 돌고 있을 뿐일지 모르죠. 그리고 시인이 참 영리하다고 느껴지는 대목이, 내 눈동자에 하루살이가 빠져죽었다는 것, 내 몸을 타고 내려온 물 또한 발밑의 웅덩이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언급이에요. 나라는 존재가 단순히 어떤 외부적인 힘에 의해 세계의 원환에 갇히게 된 것이 아니라, 나조차도 그 원환의 건설에 동참하고 일조하고 있다는 인식을 시인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원환이 있고 그 다음에 내가 갇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환의 순환구조를 강화하기도 하고 새로이 만들기도 한다는, 그리하여 내가 나를 갇히게 하기도 한다는 인식, 나와 원환, 둘 중 어떤 것이 먼저인지 모를 만큼 세계와 나는 이질적인 것이 아니고 별개의 리듬 또한 갖고 있지 않다는 인식이 시의 바탕에 깔려 있는 듯 보여요. 세계를 타자화하면서 막무가내로 밀쳐 내는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시는 다른 시에 비해 특히 성숙하게 느껴지네요.
※※※
임솔아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선 그가 그만의 분명한 스타일을 갖추고 있는 시인이라는 데 동의했다. <동물원> 같은 시편에서는 그 점이 더욱 도드라졌다. 문체와 전개방식의 독특함이 가장 세련되게 구현되어 있는 시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 스타일 상의 독특함을 시집 전반에 스미게 하고 50편 가량의 시편들을 일관성의 구도 아래로 묶이도록 하는 것이 한 시인의 생명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때, 임솔아의 가까운 미래는 비교적 환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이질적인 사물들을 한데 모으고 그것을 절묘하게 겹쳐 보이게 하는 기술이 시인의 특장점이라고도 우리는 결론지은 바 있다. 하나와 다른 하나를 겹쳐 보이게 하는 것, 그것을 보다 큰 프레임에 대입한다면 문학의 본령에 다름 아닌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 안의 이야기와 우리들의 삶을 겹쳐 보이게 하고, 작품 안의 목소리와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출몰하는 메시지를 접합되어 보이게 함으로써 우리는 삶의 진의에 더욱 근접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임솔아 시의 내용형식에 있어서의 주된 맥락은 껍데기로만 남은 세계에 대한 자각과 그 껍데기 위에 얹힌 고독하게 떠도는 자, 그러나 그 떠돎을 멈출 수도 없는 자로서의 ‘나’에 대한 인식이 그 뼈대를 형성하는 듯 보였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한 개인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골몰에서 비롯된 듯도 했고, 기존의 가족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새로운 가족에는 편입되지 못한, 현 시대의 부유하는 청년의 모습이 투영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임솔아는 그 특유의 목소리와 새로운 방법론으로 사물들을 엮고 세계를 은유해 내는 동시에, 시대와 세대의 보편적 목소리까지도 대변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우리는 읽어 냈다. 그런 시인의 앞으로의 걸음을 우리는 더욱 유심히 지켜보고 또 응원하려고 한다.
(정리: 문희정)
참여 멤버 소개
김하진(요고마고)
몸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사람.
근래에 주목할 만한 나의 드라마는, 생살을 물어뜯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는 것이다.
임신영(토라진)
여러 고전들을 탐방하는 ‘고전여행자’이다. 최근에는 연구공동체 <우리실험자들>에서 ‘생동성 실험군’의 참여자로 활동하고 있다. 상식과 질서의 테두리를 부수는 작은 이야기(소설)들에 눈과 귀를 열고 손과 발로 담아내려 노력 중이다.
최원
대륙철학, 정치철학, 맑스주의, 정신분석학 등을 연구하는 철학자이지만 18세기 이전의 철학자들이 대부분 그랬듯 별다른 소속 없이 이리저리 떠돈다. 『라캉 또는 알튀세르』를 썼지만 만족스럽지 못해, 청년 시절 가졌던 시에 대한 열정을 <우리실험자들>의 시 읽기 세미나에서 되살리려고 무리하고 있는 철학자.
문희정(희음)
순간과 하루와 한 생의 지형도를 그릴 때 시 쓰기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실은 변두리를 따라 배회하는 걸 더 즐겨 한다. 요즈음은 시와 소설과 에세이와 그 밖의 모든 글쓰기, 혹은 기록들, 그 경계의 철망의 구멍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는 일에 특히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