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피고는 왜 아름다운가 : 2017 그랜드오픈 에세이
삼월
/ 2017-12-10
/ 조회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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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왜 아름다운가 : 카프카와 소수성
카프카세미나 삼월
1. 카프카와 법
카프카 소설에서 법은 중요한 모티프이다. 장편들, 그 중에서도 《소송》이라는 작품에서는 더욱 그렇다. 《소송》에서 주인공 카가 만나는 모든 인물들은 법과 연관되어 있다. 소송 때문에 알게 된 변호사나 법원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직장에 찾아오는 거래처의 손님이나 화가, 어린 소녀들까지 모두 법과 관계가 있다. 더구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까지도 카가 소송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렇게 묻다 보면 애초에 소설의 처음 부분 카가 체포당하는 장면에서부터, 카프카가 묘사하고 있는 법이 우리가 알고 있는 법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송》의 주인공 카는 서른 살의 생일에 자기 방에서 체포된다. 카의 아침식사를 훔쳐 먹은 두 명의 남자가 카에게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이상하게도 카는 구금되지 않는다. 며칠 후 법원에서 카의 직장으로 전화가 걸려와 출두날짜와 장소를 알려준다. 날짜는 일요일이고, 장소는 교외의 허름한 건물이다. 시간이나 방 번호는 카가 유추해서 알아내야 한다. 직장동료들도 카의 체포 사실을 알고 있으며, 심지어 몇 명은 감시인 역할을 맡고 있다. 출두장소인 건물에 도착해 심리실을 찾는 카의 행동은 더욱 놀랍다. 카는 ‘죄가 법원을 끌어당긴다’고 했던 감시인의 말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이 우연히 택한 층계에 심리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눈치를 채야 한다. 카프카가 말하는 법은 법전 안에 담긴 형식으로서의 법이 아니다. 법은 어떤 과정처럼 끊임없이 흐르고 있고, 카가 가는 곳 어디든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체포된 것이다. 카의 아침식사를 훔쳐 먹은 감시인들에 대한 법원 태형리의 매질이 카의 직장 창고에서 일어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 법이 적용되는 범위도 너무 넓고 불분명한 탓에 도대체 무슨 죄를 처벌하려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법원은 끝내 카의 죄목을 알려주지 않는다.
카의 소송을 맡은 변호사는 소송에 실제로 도움이 되고 있지 않다. 변호란 법률상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묵인될 뿐이라는 이상한 말도 늘어놓는다. 변호가 원칙상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소송에 관해서는 변호사가 필요하다면서, 변호사는 이 소송이 ‘외과의사가 말하는 깨끗한 상처’가 되도록 도울 수 있다고 다짐한다. 이 깨끗한 상처를 인위적인 상처인 수술자국으로 본다면, 소송과 처벌은 인간의 삶 전체에 작용하는 외과적 수술과 같은 것이다. 이는 외부에서 강제하는 교정과도 같다. 카는 이에 저항하고 반감을 품으며, 자신이 정말 죄(혹은 병)가 있는가 하고 묻는다.
카프카가 만나는 이들 중 변호사, 제조업자, 화가. 세 인물은 그 물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연극 속 인물처럼 입체감이 없는 이들은 단지 법의 목소리, 혹은 이에 저항하는 카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들은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죄가 있는가. 각자의 직업과는 관계없이 이 물음을 던지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그 물음은 어쩌면 모두 카 자신의 물음이기도 하다. 법의 목소리와 이에 저항하는 목소리 모두 카 자신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카는 죄와 비극의 숙명성에 저항하면서도, 그 죄와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화가는 카에게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노라고 말한다. 무죄판결, 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형식적이고 제한적인 무죄판결을 받거나, 판결 자체를 계속해서 지연시키는 방법뿐이다. 언제든 다시 체포될 수 있고, 평생 동안 불쾌한 심리와 심문에 시달려야 한다. 모든 건물의 다락방에는 법률사무소가 있고, 카를 쳐다보는 지저분한 어린애들까지도 법원에 소속되어 있다. 모두가 감시자이고, 모든 곳에서 법을 다룬다. 법은 늘 우리 머리 위에 있고, 하찮은 시선들에도 법의 감시가 섞여있다. 위엄 대신 초라하고 터무니없는 형상으로. 그 법은 노인들의 지겨운 잔소리, 혹은 어린애들의 어설픈 공격을 닮아있다. 그 법이 당장 우리를 죽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거기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도 없다.
푸코는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에서 우리가 권력을 성찰하는 몇 가지 형태 중 하나가 법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각자 표상 속에서 권력을 성찰하고 있는데, 이항대립과 강요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권력을 법으로 보는 시각이다. 여기서는 법에 의해 합법과 비합법이 나뉘고, 우리의 삶은 허용과 금지 아래 놓이게 되며, 권력은 공표와 동시에 작동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권력은 말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권력의 말은 곧 법이고 규범이다. 권력이 입법자의 역할을 한다면, 다른 편에는 저항 혹은 복종을 할 수 있는 주체가 있다.
이런 표상의 모델에 따르다 보면, 법은 단지 자기 권력에 복종하는 자들에게 허용되는 것만을 지시할 뿐인 무능한 권력이 된다. 카프카가 보여주는 법의 모델은 권력에 대한 이런 표상을 닮아있다. 관습과 규범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그 표상은 법의 이름을 한 권력의 표상이다. 이 표상에서 권력은 끈질긴 동시에 허술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권력을 이렇게 인식하는 메커니즘은 저항의 행위를 돋보이게 만든다. 사소한 법규를 위반하면서 쾌감을 느낀다거나, 교정당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권력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게 한다. 《소송》의 주인공 카 역시 그렇게 믿고 행동한다. 자신이 믿는 권력에 의해 비합법으로 인정받은 카는 금지된 일을 하는 형태로 저항하려 한다.
2. 카프카와 소수성
숙부에게 소개받은 변호사를 만나러 갔을 때, 카는 변호사의 간병인 레니를 처음 만난다. 카는 어떤 곳에서건 여성들의 관심과 애정을 원하는데, 이곳에서도 레니가 자신에게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을 품고 있다고 여긴다. 레니는 카의 애인 엘자를 질투하며 묻는다. “그 여자에게 육체적인 결함은 없나요?” “전 육체적으로 자그마한 결함이 있거든요. 보세요.” 레니가 자랑스레 보여주는 것은 손가락 두 개의 피부가 물갈퀴처럼 닿아있는 오른손이다. 레니의 자부심에 대해 카는 예쁘다는 칭찬과 함께 손에 키스하는 것으로 답한다. 숙부는 두 사람의 밀회를 비난하며, 레니가 변호사의 애인이라고 밝힌다. 정작 레니의 애인이라고 지목된 변호사는 레니가 많은 사람들에게 치근거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레니의 별난 점은 피고인을 대부분 아름답게 본다는 데 있습니다. … 올바른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피고인을 정작 아름답게 보게 될 때가 많을 겁니다. … 소송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피고인을 한 사람씩 가려낼 수 있지요. … 피고인들은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려낼 수 있는 겁니다. … (그러나 그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죄나 벌 자체가 아니다.) … 그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그들에게 제기된 소송 절차 때문일 수 있습니다.”
카는 변호사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으며, 레니가 아름답게 보고 보살피는 피고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 와중에도 카는 레니가 다른 방문인 앞에서 자신에게 거침없이 애정표현을 한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다. 처음 카가 체포될 당시 감시인 프란츠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 사람은 법을 모른다고 하면서 동시에 죄가 없다고 주장하잖아.” 카는 처음에 자신의 결백과 법에 대한 지식이 없음을 동시에 주장했고, 이 때문에 웃음거리가 된다. 법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결백의 여부를 알 수 있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권력에 대해 알고 있어야, 자신이 권력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진실들은 카가 처음에 무죄를 항변했던 입장과 많이 다르다. 카는 법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갈수록 카는 두려움 속에서도 법, 혹은 권력에 저항한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낀다. 법의 허술함을 비웃으며 예심판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감시인들이 보고 있을 때 일부러 타야 할 차를 타지 않는다. 자신의 소송을 돕겠다고 하는 모든 이들을 무시하며, 직장상사나 동료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일에 골몰한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병들어 누운 채로 가끔 카를 만나는 늙은 변호사는 카의 삶이 소송 중에 있음을 알려주는 존재이다. 반면에 카는 소송보다는 간병인 레니와의 밀회에 더 집중한다. 카는 권력에 저항하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으며, 레니와 같은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매력 있게 여기는지도 알고 있다. 권력에 저항한다는 이미지는 사람을 강하고 돋보이게 해 준다. 자신이 저항하고 있는 권력이 허술하며, 그 때문에 자신의 저항에 무력하다는 사실을 강조할 때는 더 그렇다. 금지된 일을 하는 자, 법을 위반하는 자, 카는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이런 이름들을 획득하려 한다.
레니가 자신의 신체에서 결함이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장애, 혹은 소수성으로 인식한다. 변호사와 카가 피고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위반과 저항의 이미지를 닮아있다. 그 이미지는 레니가 말하는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레니는 분명히 자신의 결함이 아름답다고 느끼며, 거기에 자부심을 가진다. 피고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레니의 판단도 변호사나 카의 판단과는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레니는 우리가 장애, 혹은 소수성이라 인식하는 것을 자신의 매력으로 삼는다. 레니가 보는 피고의 아름다움 역시 단지 저항의 이미지가 아니라 장애, 혹은 소수성으로 보아야 한다.
카프카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애인과 여성과 비천한 신분을 가진 자들을 혹독하게 대한다. 카프카의 욕망은 누구보다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싶어 하며, 세계 안의 사물과 타인들을 마음대로 다루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싶어 하며, 남성에게는 존경받고, 여성들에게는 사랑받길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 아름답지도 않으며, 원하는 만큼 사랑받지도 못한 카프카는 스스로가 척도 밖으로 밀려난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분명 소수자이다. 들뢰즈가 지적했듯, 독일어로 소설을 쓰는 체코의 유대인 카프카는 명백하게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들뢰즈는 그 점이 카프카로 하여금 진정으로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소수적 문학을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그러나 카프카는 때로 그 감각을 숨기려 하고, 혐오한다. 소수자는 소수성에 대한 혐오를 통해 소수성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이는 명백하게 자기혐오이다. 소수자가 자기혐오에 빠질 때, 소수성은 공격성으로 나타난다. 그러지 않으려면 레니의 경우처럼 자신의 소수성을 매력이나 특이성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소수성, 그리고 다른 감각은 분명히 우리 삶에 있어 혁명과 같은 무엇을 가능하게 할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레니가 우리에게 이미 알려주지 않았던가. 피고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신의 소수성을 자각한 사람이기에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