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2017 오픈세미나 에세이
강길모
/ 2017-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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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흔적의 시간론: 선형적 시간론의 해체에서 기원 자체의 분열까지
강길모
데리다는 그의 저작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후설의 시간론을 비판한다. 의식의 현전에 초점을 둔 후설의 시간론은 여전히 형이상학의 잘못된 전통 안에 얶매여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데리다가 비판하는 후설의 시간론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모든 인식의 출발점을 순수 의식에 귀속시켜, 의식의 현전으로서 비로소 시간이 가능해지는 형태의 시간론이다. 후설은 무한히 미래를 향해 지속되는 현전을 가정해야만 하는 자신의 시간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론 속에 순수 현전 이외의 요소들을 추가한다. 사라져가는 지각인 파지와, 현전 자체가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현전장 개념을 추가함으로서 후설은 점으로부터 직선운동을 수행하는 방식의 시간론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후설의 시간론은 결국 의식이라는 하나의 점, 시간 전체를 구성하는 단일한 기원이 가능하다는 형이상학에 사로잡혀 있다는 한계 속에 갇혀있다. 데리다의 후설의 시간론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목소리와 현상>에서 주로 제시되지만, <그라마톨로지>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특히, 자신이 비판한 후설의 시간론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응답, 고유한 생각은 <그라마톨로지>에서 보다 명확하게 나타난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서 본격적으로 원종합과 흔적 개념, 목소리가 아닌 쓰기의 고유한 역량에 바탕을 둔 개념을 도입한다. 시간적인 연속성, 의식의 연속성에 존재적 바탕을 둔, 그래서 단일 기원적인 목소리와는 달리, 쓰기는 쓰여지는 순간 이미 여러 서로 다른 기원의 요소들을 이어붙이는 이접의 운동인 원종합을 달성한다. 그리고 이 원종합은 무언가가 이미 원종합 이전에 있었다는 흔적, 시간적인 연속성의 관점에선 지극히 모순적인 흔적을 통해서만 짐작되고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흔적은 시간적으로 모순적이기에, 그리고 사건적으로 사후적이기에 실체를 갖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기원이 되고 종합을 이루는 역설, 이것이 쓰기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이러한 데리다의 생각들은 우리에게 시간과 직접적으로 관련맺고 있는 기원 개념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시하게 된다. 다시 강조하자면, 기원은 결코 실체가 아닌 추적을 통해 발견될뿐인 흔적들의 이름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흔적 개념을 통해 우회적인 방식으로 선적이고 연속적이며 뻗어나가는 단일한 시간, 종래의 시간(특히 후설)과 전혀 다른 방식의 시간론을 그려내고 있다. 흔적의 도입에 의해 시간은 선적이지 않게 된다. 다양한 흔적-기원-사건이 연속적인 시간에 개입해 들어올때마다, 연속적인 시간의 선후관계는 엉키고 변형되며 그로 인해 근본적으로 시간 자체가 단일한 방향성을 상실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새로 출현한 것은 원래부터 있었어야 하는 것이 되어버리며 이전의 사건들의 시간적 인과성을 손상시킨다.
이제 추가로 해명되어야 하는 것은, 대체 어떤 권리에 의해 이러한 시간론이 가능하게 되는지, 그리고 이 시간론의 구체적 형태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것이다. 우선, 데리다에게서 기원은 출현하는 순간 이미 구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질문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 구성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둘째, 이러한 기원의 출현은 철학적 우발성의 개념과 대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데리다가 기원의 구성에 대해 서술하는 방식은 대단히 기묘하며 명료하지 않아서 때로는 과감하거나 무리한 해석이 요구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독자를 미로로 몰아넣는다. 미리 말하자면, 나에게는 널리 알려진 데리다의 해체론보다 더 체계적인 어떤 결과물이 주어졌는데, 지나치게 과감한 해석이 아닌가 스스로를 의심 중이기는 하다. 어쩌면 데리다의 의도나 목표와는 어긋났을지도 모르는 , 그러나 나로서는 해체보다 오히려 더 주목하게 되는 ‘철학’적 요소가 깃든 해석이다.
<그라마톨로지>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루소에 대한 해석이 이러한 연상이 가능하게 되는 기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언어의 기원은 시작부터 이미 분열되어 있고, 이 분열에 의해 복잡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분열된 기원 각각은 흔적으로서만 나타나는 원종합이라는 기묘한 시간 영역과 만나고 있다. 기원 이전의 기원으로서의 원종합이 가정되어야 하지만, 이는 현재가 출현하기 전까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 출현의 특징은 출현하는 순간 이미 있었던 것이 되어야 하지만, 출현 이전까지 출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역설을 갖는다.
특히 이 지점에서 데리다의 시간개념은 묘하게 기묘하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데리다의 관점에서 볼 경우 출현하는 순간 출현은 가정된 기원에 의해 개념적으로 연역에 가까운 ‘파생적인 형태’로 이미 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사건의 도입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출현은 원종합의 흔적, 분열된 기원의 총체적인 계보/권력/욕망이 이미 전개된 형태를 현실 속에 도입시켜 버린다. 이때 기원의 전개는 결코 일회적이거나 우연적이지 않으며 반복적이고 필연적이다. 여기에서 데리다는 분명히 가정된 기원이 가지고 있는 개념적 가능성이 모두 전개되는 것이 항상 필연적이라는 다소 관념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그라마톨로지> 안에서는 그러하다. 과연 이러한 태도가 ‘사건’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될 수 있는지는 심각한 논쟁거리이다. 그러나 어쨌든 데리다가 주목하고 싶어하는 점은 이러한 잠재력의 도입 자체가 쓰기의 시간성, 흔적의 시간론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러한 도입에 의해 선형적 시간성이 더 이상 인정될 수 없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종합의 도입에 의해 데리다의 시간론은 끊임없이 시간 속에 다른 세계들이 통합되고 분열되는 양상을 띈다. 심지어 역으로 세계는 다층적이고 분열적인 시간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볼 여지까지 충분하다. 여기에서 더 나아갈 경우, 데리다에게 시간과 세계 개념의 상호구성성은 데리다 자신의 ‘그라마톨로지’라는 큰 이론 안에서 인정되고 있으며, 흔적의 형이상학에 가까운 형태를 띄고 있다는 과감한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데리다의 이후 저작들에서 공간과 흔적의 문제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해체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라마톨로지의 성취에서 남겨진 것은 해체이며, 그라마톨로지 자체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리가 데리다에게서 어떠한 일관적인 체계 구성성을 찾아낼 수 있는지의 여부가 논란이 심각한 문제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미 초기의 데리다에게서 일관적인 방식으로 해체의 강력한 우선성을 발견한다면(데리다가 이런 종류의 일관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저자라면), 나의 에세이는 데리다에 대한 오독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라마톨리지>라는 저작, 데리다가 쓰기의 역량에 집중하고, 해체보다 이접과 원종합을 강조한 이 저작 안에서 이러한 해석은 루소가 가지는 모순적인 언어의 기원들에 대한 생각들을 섬세하게 전개하고 분석하는 데리다의 태도와 어느정도 부합하는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그라마톨로지>에서의 데리다는 해체뿐만 아니라 쓰기 자체의 역량에도 크나큰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에게 시간의 흐름은 쓰기의 순간으로부터 전개되는 응축된 사건에서만 흘러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단일하고 완전한 의미 체계를 보장하는 선형적 시간 흐름은 인정되지 않는다. 아마 <그라마톨로지>를 쓰던 시기의 데리다는, 인간 삶의 분열적이고 다층적인 의미의 가능성,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의 무수한 가능성을 이러한 시간론 위에서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이러한 기대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우리의 시간과 의미에 대해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해석을 67년의 데리다에게 적용하는 일 자체가 우리 자신이 흔적의 시간론을 따르고 있음을 의미 할 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