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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2017 오픈세미나 에세이
개구리 / 2017-12-10 / 조회 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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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 그 자체, 존재

                                          

들뢰즈 차이와 반복1/ 개구리

  

  "번개는 검은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오려고 하지만, 결국 그 하늘을 같이 끌고 가야만 한다."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번개의 이미지, 들뢰즈가 말하려는 차이가 이런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번개는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와 번개이고자 하나, 하늘과 떨어져서는 번개일 수 없다. 벗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싸움, 바탕과 표면이 합쳐지는 이미지를 잔혹성, 또는 괴물이라 했다. 마치 SF 영화에서 매끈한 동판에서 눈·코·입 없는 마스크의 악당이 쑥 올라올 때 느껴지는 강력하고 기괴한 느낌이다. 무엇인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기존 판을 바꾸지 않고는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기존 판을 완전히 벗어 날 수는 없다. 자신을 근거 짓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해내려는 상태, 이런 유동적인 상태를 차이라고 말한다.

 

차이에는 죄가 있다면 그것은 바탕을 올라오도록 만들고 형상을 와해시킨다는 죄밖에 없다. 아르토의 생각을 떠올려보라. 잔혹성, 그것은 단지 본래적 규정일 뿐이다. 그것은 규정되는 것이 미규정자와 본질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이 정확한 지점을 가리킨다. (88쪽)

 

  “차이를 만든다.”라는 표현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차이를 규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과 떨어질 수 없는 바탕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본래적 규정, 괴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바탕으로부터 존재자들이 출현하는 과정이 본래적 차이이다. 이미 주어진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저 근저에 있는 바탕과 거기서 떨어져 나오려는 존재, 괴롭고 낯설지만 이런 존재론적 차이를 만든 것을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묻는다.  

 

  우리가 일반적 생각하는 개념적 차이는 ‘차이 그 자체’가 아니고 차이를 ‘매개’할 뿐이라고 말한다. 완벽한 분류로 세계를 그렸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와 개념적 차이를 조근 조근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종(種)적 차이, 유(類)적 차이를 말한다. 종차(種差)는 동일성을 기반으로 성립되는 유적 개념 안에서 합치될 때 성립된다. 네 개의 발이 있고 발굽이 있는 것은 말이라는 동일한 유적 차이 안에서 흰말과 검은말이라는 종적 차이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흰말이라도 옆집의 흰말은 밭에서 일하는 말일 수도 있고 우리 집 흰말은 경주마일 수도 있다. 달리기라는 능력에서 보면 우리 집 흰말은 오히려 사냥개와 비슷하다. 이렇게 종적 차이로는 자신들에 의해 달라지는 즉 본성이 바뀌는 차이를 말할 수 없다. 차이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규정되지 않은 개념의 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뀐 것뿐이라고 들뢰즈가 꼬집어 말한다.  

 

  동일성에 근거한 유에 대한 종의 관계를 보면 분류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차원이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존재의 다의성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의 유안에서 성립하는 종들의 일의성 배후에는 상이한 유들 안에서 성립하는 존재의 다의성이 자리한다.”(99쪽) 생물학의 분류를 보면 종속과목강문계라는 순서를 따라 종으로 갈수록 서로 세세한 유사성이 인지되어야 같은 종에 속한다. 그리고 분류레벨이 ‘문(門)’이라는 높은 유로 되는 과정은 유비판단에 의한 추상적 선택을 하게 된다. 동일한 것을 상정하고 상반성과 대립으로 차이를 인식하는 반성적 개념의 차이일 뿐이다. 개념적 차이는 스스로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동일성, 판단의 유비, 술어들의 대립, 지각된 것의 유사성이라는 것들로 ‘매개’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동일성, 유비, 대립, 유사성이라는 재현의 4개의 기둥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개념일 뿐이지, 어떤 존재의 본질이 되지 못한다. 개념적 차이는 존재를 표준/정상/비정상 등으로 범주화 시켜서 일반성, 동일성의 기준 아래 줄을 세울 뿐이다.  

 

  들뢰즈는 일의적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존재의 개념은 유가 종에 대해 그런 것처럼 집합적이지 않고, 다만 분배적이고 위계 설정적이라고 말한다. 존재라는 개념 자체 안에는 내용을 갖지 않고 단지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항들에 비례하는 내용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 항들이 존재에 대해 서로 동등한 관계를 가질 필요는 없다. 이 존재의 개념은 분배적으로만 공통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과 위계적 순서에서만 일차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몫과 공간을 할당하는 비례적 분배와 정해진 기준에 멀고 가까움의 판단에 따라 존재자들을 바라보는 비율적 위계는 존재를 유비적으로 할당할 뿐이다. 들뢰즈는 존재를 유목적 분배와 왕관을 쓴 무정부적 위계로 바라본다. 존재를 이루는 사물들이 배당되지 않은 모든 범위에 걸쳐 자신을 펼쳐 나가는 것이 유목적 분배이다. 여기에서는 자기에게 정해진 몫이란 것은 없다. 장벽과 울타리를 뛰어넘으며 소유지를 어지럽히듯 도약과 혼란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크든 작든, 열등하든 우열하든 그 어떤 것도 존재에 더나 덜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한계를 다해 역량을 펼쳐내는 것을 무정부적 위계로 본다. “그러므로 존재의 일의성은 또한 존재의 동등성을, 평등을 의미한다. 일의적 존재는 유목적 분배이자 왕관을 쓴 무정부 상태이다.”(106쪽) 

 

  “존재는 일의적(一義的, univocity)이다.”라는 둔스 스코투스의 존재론을 유일한 존재론적 명제로 인정한다. 존재는 여러 모습(양태)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은 존재론적 구별이 아니라 형상적, 질적, 기호학적 구별일 뿐이다. 하나의 별을 보고 새벽별 또는 저녁별이라 부를 수 있다. 한 존재에 대한 여러 지칭일 뿐이다.

 

존재는 모든 양상들에 대해 ‘동등’하다. 그러나 그 양상들 자체는 서로 동등하지 않다. 존재는 모든 양상들에 대해 단 하나의 의미에서 언명된다. 그러나 그 양상들 자체는 서로로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일의적 존재의 본질은 개체화하는 차이들에 관계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차이들은 서로 같은 본질을 지니지 않으며, 또한 존재의 본질을 변하게 만들지도 않는다.(중략) 하지만 존재를 언명하는 각각의 것들은 차이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즉 존재는 차이 자체를 통해 언명된다. (102쪽)
  
  여기서 일의성이 단지 한 존재가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지만 본질을 같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이 모든 양상들에 대해서 하나의 의미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양상들은 서로 같은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존재는 이 모든 양상들에 대해 ‘동등’하다.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양상들에게 의미의 동등성을 인정하고 이것을 개체화하는 차이로 보는 것이다. 흰색이 상이한 강도들에서 다른 색조(의미)를 보여주면서도 본질적으로 흰색이라는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다. 흰색이라는 존재를 유지하는 데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흰색이라는 존재가 여러 양상, 강도들과 관계하며 차이를 만들어가는 것, 그 것이 존재 자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차이가 존재를 현현하게 한다는 것이다. 존재는 차이를 통해 언명된다는 의미에서 차이 자체이다. 그런 일의적 존재 안에서, 그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의 개체성이 다의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존재의 일의성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해 사유되었고, 스피노자에 의해서는 긍정되었고 니체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말한다.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를 중립적이고 중성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과 독특한 것이 교차하는 이편에서 식별해 냈다. 추상적인 개념 안에서 존재를 중성화시켰기 때문에 일의적 존재를 단지 사유하기만 했을 뿐이다. 스피노자는 일의적 존재를 중립적이거나 무차별한 것으로 사유하는 대신 순수한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실체와 양태들이 똑같은 본질을 갖지 않음에도 속성들은 실체와 양태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공통적이다. 신의 양태인 인간은 신의 속성, 즉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속성을, 동일하게 표현할 수 있다. “실체가 모든 속성들에 의해 동등하게 지칭되기 때문이며, 실체가 모든 양태들에 의해 동등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112쪽) 일의적 존재는 중립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역량의 정도에 따라 표현성을 띨 뿐이다.  

 

  이제 니체는 영원회귀를 통해 일의성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이룬다. 동일성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고 차이라는 생성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이차적인 것이다. 차이가 존재를 계속 꿈틀꿈틀 바꾸어나가는 것이지 동일성 속에서 차이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 동일성이다. 이런 차이에 의한 동일성이 반복으로 규정된다. 차이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같음을 사유하지만, 이 사유는 정해진 기준에 준하는 이론적 재현이 아니다. 이 차이나는 반복은 “자신의 한계 안에서 자신의 역량의 끝까지 나아가는 가운데 스스로 변형하고 서로의 안으로 이행하는 극단적 형상들만이 되돌아오는” 선별작업이다. 자신을 스스로 변형할 수 있는 고귀한 에너지, 휘브리스(hybris)이다. 역량의 관점에서 사물과 존재자들을 바라보는 위계를 이야기한다. 이 위계는 동일자를 차이나는 것에 종속시키면서 처음 시작되고, 이로써 차이의 확실한 선별을 보장한다. 영원회귀의 바퀴는 차이에서 출발하여 반복을 산출하는 동시에 반복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선별한다. 들뢰즈는 존재가 차이로 언명된다 했고, 이제 회귀가 존재라고 한다. 단, 오직 생성의 존재일 뿐이라고. 언제나 돌아오는 존재는 이전과는 같은 것일 수 없다. 이것이 차이나는 반복이며 생성이며 존재의 일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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