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2017 오픈세미나 에세이
개구리
/ 2017-12-10
/ 조회 1,178
첨부파일
- 오픈세미나_들뢰즈_차이그자체_개구리.hwp 다운 14
관련링크
본문
차이 그 자체, 존재
들뢰즈 『차이와 반복』 1장/ 개구리
차이에는 죄가 있다면 그것은 바탕을 올라오도록 만들고 형상을 와해시킨다는 죄밖에 없다. 아르토의 생각을 떠올려보라. 잔혹성, 그것은 단지 본래적 규정일 뿐이다. 그것은 규정되는 것이 미규정자와 본질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이 정확한 지점을 가리킨다. (88쪽)
“차이를 만든다.”라는 표현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차이를 규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과 떨어질 수 없는 바탕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본래적 규정, 괴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바탕으로부터 존재자들이 출현하는 과정이 본래적 차이이다. 이미 주어진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저 근저에 있는 바탕과 거기서 떨어져 나오려는 존재, 괴롭고 낯설지만 이런 존재론적 차이를 만든 것을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묻는다.
우리가 일반적 생각하는 개념적 차이는 ‘차이 그 자체’가 아니고 차이를 ‘매개’할 뿐이라고 말한다. 완벽한 분류로 세계를 그렸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와 개념적 차이를 조근 조근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종(種)적 차이, 유(類)적 차이를 말한다. 종차(種差)는 동일성을 기반으로 성립되는 유적 개념 안에서 합치될 때 성립된다. 네 개의 발이 있고 발굽이 있는 것은 말이라는 동일한 유적 차이 안에서 흰말과 검은말이라는 종적 차이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흰말이라도 옆집의 흰말은 밭에서 일하는 말일 수도 있고 우리 집 흰말은 경주마일 수도 있다. 달리기라는 능력에서 보면 우리 집 흰말은 오히려 사냥개와 비슷하다. 이렇게 종적 차이로는 자신들에 의해 달라지는 즉 본성이 바뀌는 차이를 말할 수 없다. 차이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규정되지 않은 개념의 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뀐 것뿐이라고 들뢰즈가 꼬집어 말한다.
동일성에 근거한 유에 대한 종의 관계를 보면 분류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차원이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존재의 다의성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의 유안에서 성립하는 종들의 일의성 배후에는 상이한 유들 안에서 성립하는 존재의 다의성이 자리한다.”(99쪽) 생물학의 분류를 보면 종속과목강문계라는 순서를 따라 종으로 갈수록 서로 세세한 유사성이 인지되어야 같은 종에 속한다. 그리고 분류레벨이 ‘문(門)’이라는 높은 유로 되는 과정은 유비판단에 의한 추상적 선택을 하게 된다. 동일한 것을 상정하고 상반성과 대립으로 차이를 인식하는 반성적 개념의 차이일 뿐이다. 개념적 차이는 스스로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동일성, 판단의 유비, 술어들의 대립, 지각된 것의 유사성이라는 것들로 ‘매개’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동일성, 유비, 대립, 유사성이라는 재현의 4개의 기둥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개념일 뿐이지, 어떤 존재의 본질이 되지 못한다. 개념적 차이는 존재를 표준/정상/비정상 등으로 범주화 시켜서 일반성, 동일성의 기준 아래 줄을 세울 뿐이다.
들뢰즈는 일의적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존재의 개념은 유가 종에 대해 그런 것처럼 집합적이지 않고, 다만 분배적이고 위계 설정적이라고 말한다. 존재라는 개념 자체 안에는 내용을 갖지 않고 단지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항들에 비례하는 내용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 항들이 존재에 대해 서로 동등한 관계를 가질 필요는 없다. 이 존재의 개념은 분배적으로만 공통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과 위계적 순서에서만 일차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몫과 공간을 할당하는 비례적 분배와 정해진 기준에 멀고 가까움의 판단에 따라 존재자들을 바라보는 비율적 위계는 존재를 유비적으로 할당할 뿐이다. 들뢰즈는 존재를 유목적 분배와 왕관을 쓴 무정부적 위계로 바라본다. 존재를 이루는 사물들이 배당되지 않은 모든 범위에 걸쳐 자신을 펼쳐 나가는 것이 유목적 분배이다. 여기에서는 자기에게 정해진 몫이란 것은 없다. 장벽과 울타리를 뛰어넘으며 소유지를 어지럽히듯 도약과 혼란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크든 작든, 열등하든 우열하든 그 어떤 것도 존재에 더나 덜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한계를 다해 역량을 펼쳐내는 것을 무정부적 위계로 본다. “그러므로 존재의 일의성은 또한 존재의 동등성을, 평등을 의미한다. 일의적 존재는 유목적 분배이자 왕관을 쓴 무정부 상태이다.”(106쪽)
“존재는 일의적(一義的, univocity)이다.”라는 둔스 스코투스의 존재론을 유일한 존재론적 명제로 인정한다. 존재는 여러 모습(양태)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은 존재론적 구별이 아니라 형상적, 질적, 기호학적 구별일 뿐이다. 하나의 별을 보고 새벽별 또는 저녁별이라 부를 수 있다. 한 존재에 대한 여러 지칭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