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2017 오픈세미나 에세이
namu
/ 2017-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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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주의 전복이란? 『차이와 반복』에세이 namu
_이데아론의 선별방식 및 시뮬라크르를 중심으로
화이트헤드가 이르기를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했다는데요. 이는 영원불변의 동일자의 사유인 플라톤 철학이 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주류적인 사고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다는 말로도 읽힐 수가 있겠지요. 한편 푸코는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차이와 생성의 테제에 천착한 들뢰즈 철학이 21세기의 문제의식을 제대로 포착했다는 뜻으로 이해되는데요. 그렇다면 그 문제의식의 한복판에 플라톤 사유의 극복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란 한마디로 시뮬라크르들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사본에 대한 원본의 우월성, 혹은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월성을 부인하면서, 아울러 사본에 맞서서 시뮬라크르의 권리를 긍정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우선 논의의 진행을 위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결부하여 시뮬라크르의 정체는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플라톤은 “그것은 무엇인가?”하고 물으며 사물의 본질(whatness)을 탐구합니다. 이러한 본질주의를 겨냥한 질문법에는 이미 확정된 그 무엇이 내용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그 방향 또한 결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플라톤이 바라본 세계를 경험적인 감각계感覺界와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가지계可知界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들뢰즈는 이데아론의 진실된 동기는 선별하며 분류하고자 하는 의지의 측면에서 찾아야한다고 합니다. “이데아론은 차이를 드러내는 것, 즉 ‘사물’ 자체와 그 이미지들을, 본래적인 것과 그 사본을, 모델과 그 시뮬라크르(허상)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적 분할은 매개념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선택을 영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계보에 대한 선별의 깊이, 즉 주장들을 분류하여 거짓된 주장으로부터 참된 주장자를 가려내려는 플라톤의 동기를 간과한 처사라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지상 세계는 이데아의 실재의 형상(eidos)들을 모방하는 그림자 혹은 이미지(eidolon)에 불과한데요. 플라톤은 여기서 에이돌론을 다시 두 층위로 나눕니다. 형상과의 질적인 유사성을 띤 것을 에이코네스(eicones)라 하고, 형상과의 유사성이 배제된 것을 판타스마타(phatasmata)라고 합니다. 이 후자가 불어로 시뮬라크르(simulacre)이고 우리말로 허상虛像· 환상幻像· 환영幻影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계는 실재와 이미지의 두 세계로 나뉘고, 이미지는 다시 사본(copy)과 시뮬라크르로 나뉘는 것이지요.
이미지를 사본과 시뮬라크르로 다시 나누어 근거가 확실한 사본과 엉터리 허상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철학은 이원론이 아니라 차라리 삼등급의 구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삼자론三者論은 플라톤 사상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이 삼단계를 ‘분유 불가자’, ‘분유되는 자’, ‘분유하는 자’라는 성스러운 삼항 관계로 나눕니다. 이는 ‘근거’, ‘주장의 대상’, ‘주장자’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들뢰즈는 또한 공주의 신랑감 고르기(왕-공주-구혼자)라는 아라비아의 민담에 비유하여 이해를 돕고 있는데요. 가령 왕은 자신의 소유물 가운데 하나인 딸을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가 있고요. 그러나 자신이 가진 절대권력은 결코 나눠줄 수가 없는데요. 그래서 그는 ‘분유 불가자’이고 왕의 소유에서 사윗감의 소유로 넘어가는 공주는 ‘분유의 대상’, 즉 나뉘는 물건이므로 ‘분유되는 자’인 것이지요. 한편 공주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후보자들은 왕의 소유물을 나눠 갖는 자들, 즉 ‘분유하는 자’가 됩니다. 이때 그들은 필연적으로 저들끼리 경쟁하는 지망자인 셈이고요. 이들은 근거에 호소하는 지망자들로서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근거’의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왕으로 비유된 ‘분유 불가자’는 어떤 물건을 처음으로 소유한 일차적 소유자로서, 이는 근거 자체이자 이데아입니다. 근거의 고유한 본성은 타자에게 분유의 기회를 줌으로써 자신의 성질을 이차적으로 나눠준다는 데 있습니다. 그 소유물이 바로 ‘분유되는 자(공주)이지요. ‘분유分有한다’는 것은 차지한다는 것을 말하며, 첫 번째 소유자에 이어 이차적으로 차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근거’가 제시하는 시험은 무엇일까요? 이데아와 이미지의 관계에서 그 자격을 가늠하는 잣대는 바로 유사성입니다. 원본을 순수하게 분유分有하고 있는 것이 진짜 구혼자이고, 단지 사본을 흉내내고 있을 뿐인 것은 가짜 구혼자입니다. 따라서 선별의 기준은 이데아 자신과 얼마만큼 닮았느냐를 따지는 유사성이고, 여기서 모든 종류의 등급, 위계가 엄격히 구별되는 것이지요. 원본과 질적인 유사성을 가장 많이 간직한 이미지는 사본이고 원본과 거의 닮지 않은 가짜 혹은 허상이 시뮬라크르입니다. 탈락한 구혼자처럼 시뮬라크르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세상의 밑바닥 저 깊은 동굴 속에 처박힐 터이지요.
플라톤에 따르면 소피스트들이 그러한 가짜들입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도 근거를 얻지 못하며 아무데나 지망하는 오지랖 넓은 푼수들이라고나 할까요. 켄타우로스나 사티로스 등도 그러한 허상입니다. 플라톤주의 전체는 허상이나 시뮬라크르들을 몰아내려는 이런 의지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시뮬라크르에는 대양같이 자유로운 차이들, 노마드적 분배, 왕관을 쓴 아나키 등의 성질이 있고, 사본만이 아니라 원본까지 조롱하는 심술궂음이 있는데요. 플라톤은 이 역동적인 힘이 두려워 원본과 닮지 않은 이 무수한 ‘차이’들을 폐기시켜 “바닥없는 대양 속으로 던져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플라톤은 내재성의 장들에 이데아라는 초월성을 끌어들였던 것일까요? 고작 신화(『파이드로스 』는 영혼의 윤회,『정치가 』는 태고와 연관된 시간)에 기초한다는 근거를 끌어들여 무모한 동일자의 폭군이 되었던 것일까요? 당시 고대 아테네는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로써 시민이라면 누구나 아고라 광장에 나와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가 있었잖아요.『정치가』에서 그러한 대목을 엿볼 수가 있는데요. 정치가는 ‘사람들을 방목할 줄 아는 자’로 정의됩니다. 하지만 의사, 상인, 농부서껀 모든 부류의 경쟁자들이 “진정한 인간 목자牧者는 나다!”라고 들이대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이렇다보니 주장들을 분류하고 거짓된 주장자로부터 참된 주장자를 가려내려는 선별의 원리가 요구되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지망자와 경쟁자들은 어떤 시험을 거쳐야하는데, 이때 또한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고요. 따라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배후에는 폴리스의 질서를 재확립하려는 도덕적인 의도가 있었다는 게 들뢰즈의 입장입니다. 이러한 선별의 원리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근거로서 제시된 이데아가 어떤 결함없이 완벽하게 작동될 수 있는가하는 점이지요.
들뢰즈는 이 지점에서『소피스테스』에서 드러나는 기막힌 아이러니를 포착하게 되는데요. 이 대화편에서는 『파이드로스 』나『정치가 』와는 달리 근거로서의 신화가 엿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그 대화편의 목적이 가짜 주장자들, 즉 소피스트들을 축출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지요. 플라톤은 시뮬라크르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와중에, 시뮬라크르란 단순히 거짓된 사본이 아니라 오히려 사본과 모델의 개념 자체를 의문시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소피스트에 대한 최종 정의는 소피스트 자신을 짧은 논쟁을 통해 활동하는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소크라테스 자신과 구분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마는 것이지요. 들뢰즈는 이 대목에서 플라톤 자신이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데 있어서 최초로 그 방향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짓궂은 물음을 던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뮬라크르 존재 자체가 이데아론의 결함을 폭로하게 되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란 사본에 맞서서 시뮬라크르의 권리를 긍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뮬라크르는 격하된 사본이 아니라 원본과 그 사본을, 모델과 그 재생산을 부정하는 적극적인 역능인 것이지요. 부연하자면 플라톤적 사유 방식이란 “오로지 유사한 것만이 차이를 낳는다.”는 것으로 유사성과 동일성에 따른 재현의 세계를 가리키는데요. 이는 우리로 하여금 미리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된 그 어떤 유사성 또는 동일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차이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이때의 차이는 동일성에 사로잡힌 양적인 차이로써 정도의 차이입니다. 이러한 세계는 수직적인 위계질서로써 억압을 낳는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세계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인 “오로지 차이들만이 서로 유사하다.” 는 시뮬라크르들의 세계를 정의하며, 세계를 그 자체가 허상인 것으로 제기하는 것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유사성 더 나아가 동일성을 일종의 생산물처럼, 즉 바탕을 이루는 같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 생산물처럼 인도하도록 제시합니다. 여기에서의 차이는 상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질적인 차이로써 본성상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는 수평적인 관계망을, 즉 차이들의 동등성을 바탕으로 한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평등한 세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단 하나의 존재가 아우성을 이룬다.”는 존재의 일의성一義性(univocite)의 세계인 것이지요. 이러한 존재의 일의성의 세계는 또한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아무래도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