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공백] 詩는 어떻게 존재를 말하나
우리실험실
/ 201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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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詩는 어떻게 존재를 말하나 .......... 발표자 : 류재숙
: 진은영의 <있다>와 이수명 <비의 연산>에 나타난 존재론
1. 진은영의 <있다> : ‘무엇’이 아니라 ‘있다’!
있다
창백한 달빛에 네가 나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 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전등 두개의 빛이 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 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
존재자(행위) 존재자(행위) 존재자(대상)
존재자(행위)
존재자≑존재
존재(시간)
존재(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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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있다>는 존재에 대한 詩이다. 존재를 이처럼 직접적으로 언급한 詩가 있을까? <있다>는 ‘있다’라는 말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특정한 ‘존재자’에서 ‘존재’ 일반으로 다가선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있다’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거기 새가 있다’ 거나 ‘새는 노래하고 있다’고 할 때처럼, 어떤 대상이 있다거나 그것이 어떤 상태(행위)로 있다고 할 때이다. 이렇게 어떤 대상의 상태(행위)를 설명하거나 대상 자체를 말할 때조차, ‘있다’는 특정한 ‘무엇’에 속하는 것이다. 이 경우 ‘있다’는 ‘이다’의 변형이다.
그러면 ‘있다’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있다’ 자체를 설명할 수는 없을까? 있다가 특정한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일반을 언급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우리는 진은영의 <있다>를 존재자와 구별되는 존재에 대한 시로 읽는다. ‘이다’와 구별되는 ‘있다’의 개념은, ‘존재자’에 대한 사유와 구별되는 ‘존재’에 대한 사유이다. ‘이다’의 개념이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 존재함’을 말하는 존재자에 대한 것이라면, ‘있다’의 개념은 ‘그저 있다’로만 말할 수 있을 뿐 특정한 대상으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것이다.
1연 ~ 2연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를 말하고 있다. “네가 나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어떤 상태에 있음)”거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어떤 대상으로 존재함)”고 말한다. 여기서 ‘있다’는 ‘이다’로 귀속될 수 있는 것이다.
3연에서는 ‘존재자’에서 ‘존재’로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거나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언급에서. 그러나 우리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존재자를 스치는 존재의 형상을 감지할 뿐이다.
4연에서는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지점을 표시한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이때 ‘있다’라는 말은 모든 규정성이 소멸하고 대상적 의미가 사라지는 지점을 표시한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있다’는 이런 것이다. “여기에 네가 있다.” 흑인인지 백인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서 네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밤새 우는 것이 있다. 그렇기에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는” 대상도 이유도 알 수 없어 규정할 수 없는 것임에도 어떤 감응을 가지고 나의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이 ‘존재자’의 상태나 대상적 규정성이 사라진 모든 ‘이런 때’ 우리는 비로소 ‘있다=존재’를 사유하게 된다.
5연에서 진은영은 비로소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이때 ‘있다’는 규정할 수 없는 존재, 대상적 규정을 상실한 채 ‘있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는 이런 것이다. 더 이상 나팔일 수 없는 깨진 나팔, 더 이상 낙하산이 아닌 물위의 낙하산, 더 이상 누구도 아닌 투신한 여자, 그리고 집 둘레의 노래이다. 특정한 존재자-특정한 대상성-특정한 형태-특정한 기능을 상실했을 때, ‘무엇이 있음’이 아닌 ‘단지 있음’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비로소 ‘존재’를 사유하게 된다.
2. 이수명의 <비의 연산> : 비는 어떻게 연산되는가?
비의 연산
깊은 밤 검은 우산이 홀로 떠 있는 명령을 내린다. 그냥 떠 있는 것을 사랑해 우리는 일제히 비예요.
우리는 비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비의 배경이다. 우리는 세계를 채운다. 우리는 우리 이전과 구분되지 않는다.
합이 도출되지 않는 이 끝없는 연산을 무엇이라 부를까. 만나지 않는 선들이 그냥 떠 있지 그냥 사랑해 더 가늘게 더 두텁게 불확실하게
우리가 주고받는 것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연수로 탄생하고 자연수는 무효가 될 때까지 자란다. 낮과 밤이 어디로부턴가 흘러나와 시가전을 벌인다. 낮과 밤을 떠다니게 하라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이곳에서
형상을 시작하자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 속에서
틀림없어지거든요
틀림없이 비를 닮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비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비의 배경이다. 우리는 세계를 벗어난다.
우리는 마찬가지가 될 모양입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 그러나 없는 베개를 움켜잡고 베개에 머리를 묻고 떠내려갑니다. |
이수명의 <비의 연산>은 존재방식에 대한 것이다. ‘흐름’으로 존재하는 비의 존재방식을 통해, 사물의-자연의-우주의-세계의 존재방식을,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일제히 비예요” 우리는 “비의 형식”이고, 비는 ‘흐름’으로 존재한다. “떠 있다, 떠다니다, 떠내려간다”는 흐름으로 존재하는 비의 형식이다. 흐르기 때문에 떠다니거나, 떠다니기 때문에 흐를 수 있거나. 비는 응고된 몰Mol적 실체가 아니라, 자유로운 분자molecular적 흐름이다. 이렇게 우리는 흐름으로 “그냥 떠 있는” 존재이므로, 우리를 이유 없이 “그냥 사랑”한다.
“우리는 이전과 구분되지 않는다” 흐름으로 존재하는 한, 우리는 구분될 수 없는 무엇이다. 흐름은 흐름 자체의 요소를 갖는 것이지, 흐름이 형성되기 이전이나 이후에나 구분할 수 있는 입자들을 단위로 갖는 게 아니다. 흐름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자면, 작고 단단한 알갱이보다는 어떤 무한소일 것이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가장 단순한 신체’로서, 극히 미세한 신체들까지 극한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물처럼 흐르는 것’을 볼 것이다. 이수명의 비는 모든 ‘물처럼 흐르는 것’의 이름이다.
“합이 도출되지 않는 이 끝없는 연산을 무엇이라 부를까” 흐름으로 존재하는 비는 무엇보다 셀 수 없고 연산되지 않는다. 연산이 끝없이 이어질 때, 연산은 연산이기를 멈춘다. 그래서 그것은 “더 가늘게” 때로는 “더 두텁게” 그렇게 “불확실”하다. 우리는 무수한 세포들로 이루어진 집합적 개체이고, 이렇게 이루어진 개체는 공동체로 접속하고, 이는 다시 우주적 신체로 합류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고받는 것을 하지 못할 때” -흐름으로 접속하고 합류하지 못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셀 수 있는 “자연수로 탄생하고 자연수는 무효가 될 때까지 자란다.” 이제 “낮과 밤”이라는 분명한 구분이 생겨나 대립한다-“시가전을 벌인다.” 이제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이 때 비의 연산은 다시금 명령한다. “낮과 밤을 떠다니게 하라!” 낮과 밤의 구분을 해체하고 다시 비의 흐름이 되게 하라!
“형상을 시작하자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 속에서” 흐름으로 존재하는 우리가 흐르기를 멈추었을 때, 우리는 ‘형상’을 갖게 된다. 이렇게 ‘형상’을 갖기 시작하자, 우리는 하나의 ‘현상’으로 고정된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끝없는 연산은 비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것도 될 수도 있다. 비는 무엇이기 이전의 ‘어떤 것’이고 무엇이 될 ‘어떤 것’으로 존재할 뿐이다. 형상의 시작은 다른 것으로의 생성과 변신의 멈춤이다.
“틀림없어지거든요, 틀림없이 비를 닮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마찬가지가 될 모양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불안하게 되뇌인다. 우리는 처음부터 비였으며, 동시에 “우리는 비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비의 배경이다.” 그러나 비가 멈추고 자연수로 탄생할 위험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흐르지 못하는 것은 비의 죽음이다. 비도 일종의 ‘다수’이지만, ‘셀 수 있는’ 다수가 아니라 ‘셀 수 없는’ 다수이다. 사물이 셀 수 있는 존재, 연산가능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생성의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셀 수 없음에 대한 연산, 비는 이런 방식으로 존재한다.
3. 사물의 존재, 詩의 존재론
우리는 어떻게 존재를 사유하게 되는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를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진은영의 <있다>는 존재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대체로 우리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사물만을 본다. 그러나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공간임을 보게 되는 어느 순간이 있다. 특정한 무엇으로서 사물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공간이라는 존재를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의 모습이나 나에 대한 유용성에 이끌려 그와 친구가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존재 자체에 내가 기대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사라지고, 내가 잃은 것은 단지 그가 아니라 관계임을 알게 된다.
공간은 사물이 존재하는 배경이며, 그는 내가 기대어 있는 관계이다. 공간이 없다면 사물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친구관계-연인관계-가족관계 같은 모든 관계가 사라졌을 때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공간 자체’이지 ‘어떤 공간’이 아니며, 나를 친구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그의 어떤 모습’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이나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선물이며 나의 근거Grund이다. 존재를 사유하게 되는 것은, 존재자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렇게 존재자에 가려진 존재를 보는 것은, 우리의 근거-우리의 존재를 보는 것과 같다.
한편,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우리가 ‘끝없는 연산’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수명의 <비의 연산>은 존재방식에 대한 서술이다.
먼저 ‘끝없는 연산’은 ‘흐름’으로 존재한다. 무엇보다 ‘흐름’은 ‘끝없는 연산’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자유로운 흐름으로 존재하고, 접속하고 합류하고 변형되고 그리하여 생성되는 ‘흐름’ 자체이다. 또한 ‘끝없는 연산’은 ‘집합적 신체’를 만든다. 모든 개체는 서로 접속하고 합류하고, 이 과정은 우리가 우주적 신체로 확장될 때까지 무한히 끝없이 계속된다. 이처럼 끝없는 연산은 집합적 신체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존재방식이다. 우리는 우주의 무한한 흐름 속에 존재하는 다만 하나의 결절점이다. 이제 ‘끝없는 연산’은 ‘변신과 생성’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언제든지 다른 것과 합류하여 수천개의 너무 많은 이름의 비들로 흐를 수 있다. 여기에 흐르는 것의 물-되기, 물의 비-되기, 비의 강물-되기, 강물의 바다-되기, 바다의 구름-되기······로 이어지는 생성과 변신의 테마들이 있다.
진은영의 <있다>가 존재에 대한 것이라면, 이수명의 <비의 연산>은 존재방식에 관한 것이다. 일상 속에서 존재는 보이지 않고, 존재방식은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일,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일이 시의 작업이다. 곧 시의 일이란, 우리를 감각하는 신체로 깨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