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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오픈세미나] 국가와의 전쟁 : 국민은 왜 저항하는가 (2016-12-17 발표문) +2
삼월 / 2016-12-19 / 조회 1,404 

본문

 우리는 이기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이지

전쟁이 정의롭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 미셀 푸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중에서

 

 

1. 대통령과 왕

 

  대통령과 왕은 다르다.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아니, 그렇게 알고 있다고 믿는다. 지금 이 시대에도 왕이 존재하는 국가들이 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은 어떨까? 지난 2016년 10월 태국의 푸미폰 국왕이 죽었을 때, 대다수의 태국 국민들은 가족을 잃은 것처럼 슬픔에 잠겼다. 자연스럽게 국가 규모의 장례식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어떤 이들은 애도에 동참하지 않거나 다른 방법으로 애도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이유로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태국에는 실제로 ‘왕실모독법’이 있지만, 자경단의 자발적 테러행위는 법보다 엄하고 과격했다. 이들에게는 분명히 왕에 대한 모종의 감정이 존재하고 있다. 그 감정은 연장자나 정치지도자에 대한 예의나 존경의 수준을 넘어서 있다.

 

  국왕이 아닌 대통령이 있는 나라는 좀 다를까? 우리나라의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에게 따라다니는 호칭은 국부였다. 나라의 아버지라는 뜻의 국부. 국민들은 박정희의 아내인 육영수를 국모라고 불렀다. 가늘고 긴 목에 한복이 잘 어울려 나라의 어머니라는 호칭 또한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왕이었고, 육영수가 왕비였던 것은 아니다. 어떤 국민들은 대통령과 대통령의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왕처럼 대했다. 어떤 이들은 대통령이 왕은 아니어도 우두머리인 것은 마찬가지이니, 부모와 같은 사랑으로 국민들을 보살펴주기를 바라며 그렇게 불렀다. 여기에도 여전히 모종의 감정이 존재한다.

 

  국가의 원수, 통수권자, V IP로 불리는 대통령. 우리는 국가의 일인자가 대통령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대통령의 일은 국가를 잘 운영하는 일이라 믿고 있다. 그래서 지금 온 국민이 국가를 제대로 운영하지 않은 대통령에게 실망하여 화를 내고 있다. 화를 내면서 대통령을 끌어내린 다음엔 어떻게 될까? 다음 대통령은 어질고, 청렴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성군이기를 바라야만 할까? 제왕과 같은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동시에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을 존중할 줄 알고, 빠른 판단력을 보여주면서 절대 독단적이지는 않은 그런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만을 기다려야 할까?

 

 

2. 국가의 기원

 

  대통령이든 왕이든 관계없이, 국가의 원수는 우리에게 국가 그 자체로 다가온다. 우리는 왕도, 대통령도 국가 자체로 인식한다. 왕이나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국가 자체로 인식한다. 이렇게 같은 인식에서 다른 말들이 쏟아질 때가 있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하는 흔한 변명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다 국가를 위해 한 일이다” 대통령도 무수히 그 말을 반복했고, 심지어 대통령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그 여자 최순실도 그렇게 말했다. “다 국가를 위해 한 일이다” 이에 성난 군중들이 소리친다. “이게 국가냐” 뜻이 통하면서도 통하지 않는, 어딘가 묘하게 어긋난 말들이다. 왕과 대통령이 말하는 국가가 다르고, 국민들이 말하는 국가가 다르다는 말인가. 그럼 국가라는 건 도대체 뭔가.

 

  미셀 푸코는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한 어느 강의에서 국가와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 강의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다. 푸코가 눈여겨본 것은 프랑스 혁명기를 전후한 시기 민족과 국가에 대한 역사가들의 분석이었다. 역사가들은 왕당파와 귀족, 제3신분 등 각자의 계급에 맞는 이해관계를 담은 분석을 시도했다. 푸코의 분석을 따라 역사를 거슬러, 1789년 혁명이 시작되려는 프랑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각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프랑스의 역사가들은 근대국가가 시작되는 이 시기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역사를 계급투쟁의 전술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다들 잘 알고 있다시피,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루이16세는 왕실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삼부회는 당시 프랑스를 구성하고 있던 세 계급인 성직자, 귀족, 그리고 이 둘에 해당하지 않는 나머지 신분인 제3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3신분은 삼부회 안에 속해 있기는 했지만, 성직자나 귀족과는 달리 법적으로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다. 부르주아지나 지식인, 그리고 나중에 프롤레타리아라 불리게 될 가난한 농민, 노동자들이 이 제3신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왕은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부르주아지의 경제력이나 지식인의 전문지식을 이용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는 이들의 힘이 다른 두 계급의 권력에 대항할 정도가 되었다. 제3신분이 성직자나 귀족과 같은 권리를 달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삼부회는 파행으로 치달았고, 제3신분은 테니스코트에서 왕명에 반하는 자신들만의 서약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저항은 바스티유 습격으로 물리력을 증명하면서 혁명이 되었다.

 

  프랑스혁명 이전에 역사를 전술, 즉 자기 계급의 이론적 무기로 사용한 것은 주로 왕이나 귀족들이었다. 왕당파와 귀족들은 역사 속 전쟁들을 예로 들어 다른 계급들에 대해 자신들의 우위와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에 비해 제3신분은 그 이전까지 역사 속에서 물리적으로 우위를 점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제3신분은 다른 곳에서 정당성을 찾았다. 법을 통한 통치라던가, 국가나 조직을 운영할 행정실무능력 등이 그 예였다. 그 당시 유행하던 사회계약설이나 민족국가의 개념 같은 것들은 이런 배경 위에서 생겨났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는 제3신분들이 강조한 이런 이념들로 뒷받침되고 있다.

 

 

3. 국가의 정체

 

  역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해서 제3신분이 역사를 배격했던 것은 아니다. 지식인과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식과 자본을 통해 역사를 조금씩 변조시켰다. 고대 로마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원형을 찾고 이를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고대의 역사는 조금씩 제3신분에게 유리한 역사가 되어갔다. 원래 왕과 대립하던 귀족 역사가들은 왕이라는 존재의 기원을 전쟁터의 임시사령관 정도로 가볍게 여겼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제3신분은 왕의 역할을 법과 바꾸었다. 이제 왕의 통치는 법에 의한 지배로 바뀌었다. 법의 이름으로 모든 통제와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일이 가능해졌다.

 

  프랑스 혁명의 긴 과정을 통해 결국 제3신분이 승리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도 각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던 역사가들의 분석은 달랐다. 귀족 출신 역사가는 왕의 목을 친 자가 다음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하므로, 제3신분의 지배가 정당하다고 말한다. 더불어 제3신분을 이용해 귀족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이에 비해 제3신분은 자신들의 승리에 대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강조하면서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정당성을 내세우려 한다. 이 이념과 정당성이 굳어진 결과가 근대의 민족국가이다.

 

  그 이전까지 국가와 왕은 정복을 통한 외부로의 팽창에 주력했다. 반면에 근대의 국가와 통치자는 그 능력을 내부의 국민에게 집중한다. 외부로의 팽창에서 내부의 통치로, 국가의 역할은 이렇게 바뀌었다. 그러나 국가 자체의 속성은 바뀌지 않았다. 국가는 이민족을 침략하고 수탈하던 그대로 국민을 수탈한다. 사냥이 목축으로 변하는 양상과 같다. ‘국민은 개돼지’라는 영화 속 대사가 실제로 공무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현실은 우연이 아니다.

 

  부르주아지와 지식인들이 세운 국가는 자신들을 위한 국가였지, 대다수 국민들을 위한 국가는 아니었다. 그들이 내세운 정당성이었던 자유와 평등은 실질적이지 않았고,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다. 지배자들이 악랄하고 무자비했을 때뿐 아니라 선량하고 현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왕과 귀족들이 제3신분을 대했던 방식 그대로 부르주아지는 국민들을, 대다수의 농민과 노동자들을 대했다. 부르주아지들에게 국민들은 이민족 야만인이었고, 패잔병이었고, 노예였다. 같은 민족이 아니었고, 같은 인간도 아니었다.

 

  부르주아지들은 프랑스혁명이 시민혁명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안에 엄연히 존재했던 야만성을 지워버린다. 사회계약설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왕과 귀족들로부터 어떤 권리를 쟁취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평화롭게만 보이는 사회계약의 이면에는 야만과 광기가 있다. 이들이 강조하는 자유와 평등 안에는 다른 민족, 다른 계급, 다른 성별을 배제하는 차별의 논리도 함께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자본의 무한정한 힘이 버티고 있다. 가장 무서운 일은 이 야만과 광기, 논리와 힘들이 지금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국가는 지배자를 위한 것이었고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혁명과 역사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 속에서 국가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다. 푸코는 역사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전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식의 효과를 전술로 활용할 수 있다. 귀족을 위한 지식이 제3신분을 위한 무기가 될 수 있었고, 부르주아지를 위한 지식이 노동자의 무기가 될 수 있다.

 

 

4. 국가와의 전쟁

 

  우리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에 오래 속박되어 있었다. 사회가 사회구성원을, 즉 국가가 국민을 지켜준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국가가 외국 군대의 침입과 재난으로부터 국민을 지켜준다는 믿음은 역사 속에서 거의 지켜진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역사에서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 국가의 일이라고 국민들은 믿고 있지만, 대통령의 생각은 다르다. 법인세를 올리지 않거나 기업에 각종 특혜를 주면서, 자신의 측근이 만든 재단에 기업이 출연을 하도록 강제하는 일이 바로 국가를 위해 우리의 대통령이 하는 일이다. 대통령에게 국가란 이런 것이다.

 

  한편 성난 군중이 “이게 국가냐”라고 외칠 때, 우리는 그 외침 속에서 답을 다시 찾아야 한다. 국가가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껏 국가가 보여준 환상을 지워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국가를 우리가 물리적으로 싸워서 이겨야 할 적으로 간주해야 할까? 그러나 푸코가 말하는 국가는 그런 실체가 아니다. 권력이 우리를 내리누르는 힘이 아닌 것처럼, 국가도 우리를 억압하기만 하는 냉혹한 괴물이 아니다. 푸코가 말하는 국가는 괴물보다는 조금 더 허약하고, 집요하다.

 

  모든 권력이 절차의 총체라면, 국가는 이 절차의 총체 위에서 통치의 실천으로 구축된다. 국가는 우리의 삶과 의식적 실천 속에서 살아있다. 애국을 강조하는 의식적 의례들, 국가와 관련된 모든 감정과 믿음, 실천과 사유 속에서 국가는 살아있다. 그렇기에 허약하면서도, 집요한 것이다. 권력이 우리의 실천과 사유 속에 있다면, 저항 역시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우리는 권력을 기꺼이 받아들여 내면화하면서도, 자주 권력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이 혐오 속에서 우리는 다시 저항을 사유하고 실천한다. 권력과 마찬가지로 저항 역시 우리의 사유와 실천으로 나타난다.

 

  광장에서 여러 집단들이 국가를 위해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우리는 각각의 집단마다 다른 국가의 환영을 볼 수 있다. 만약 천 명의 인원이 모였다면, 천 개의 국가에 대한 환영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는 환영이다. 권력관계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우리가 만들어낸 환영이다. 우리는 이제 ‘왜 우리가 국가를 사랑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국가를 사랑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당연하지 않다. 그런데도 역사와 현실에 반하여 우리는 국가를 사랑하는 일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다. 다만 좋은 국가와 나쁜 국가를 나누어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나쁜 국가를 좋은 국가로 바꾸고, 나쁜 대통령을 좋은 대통령으로 바꾸면 될 뿐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좋은 국가란 없다. 국가의 환영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국가와 싸워야 한다. 그 국가는 우리 밖의 실체가 아니다. 저항은 전쟁처럼 국가를 대상으로 하게 된다. 푸코는 자신에게 철학은 ‘진실의 정치학’일 뿐이라고 말했다. 진실과 투쟁으로 순환하지 않는 지식은 아무 힘도 없다. 정치는 투표권을 행사하고,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배격하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정치인도 믿어선 안 되고, 사랑해선 안 된다. 그 믿음과 사랑이 또 다른 국가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싸우고 있는 게릴라들이다. 싸움의 정당성은 필요 없다. 적의 부당함 역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의 적이 누구인가를 아는 문제이다. 그 적은 국가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기능들, 국가에 대한 모든 실천과 사유 속에 존재한다.

 

댓글목록

로거스의짐작님의 댓글

로거스의짐작

삼월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국가가 외부로 향하던 칼날을 국민에게 돌려 수탈을 일삼는 다는 구절은 저도 깊은 공감이 갑니다. 삼월님은 국가가 무엇인지 먼저 인식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반발을 얘기하셨는데, 이 또한 공감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좌절하게 됩니다. 하나 하나의 객체는 무리 혹은 세력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울러 사람들은 세력에 대한 동경을 느낄 때도 자주 있습니다. 국가이든 기업이든 국민을 수탈의 대상으로 보는 것 같지만  여전히 국가의 보호를 의지하고 기업의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것을 자주 보면서 한알의 무력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세력을 만들어 싸우자는 것은 아닙니다. 삼월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국가를 바로 보듯이 외부원인에 무력한 객체의 인식을 먼저해 볼려고 노력하지만 원망과 울컥함이 먼저 앞서게 되는 경우가 많네요. 앞으로도 많은 고민을 나눌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댓글의 댓글

갑자기 댓글이 달려서 깜짝...
잘 읽어주어서 감사해요.
푸코의 강의록들을 이전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읽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푸코는 주체나 개인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냉혹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지적하는 데 큰 의미를 두지도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일단은 따라가보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푸코가 말하는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더 써보고 싶습니다.
그때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준다면, 무척 고마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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