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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오픈세미나] 여기에 마녀가 있다 (2016-12-17 발표문)
소리 / 2016-12-26 / 조회 1,450 

본문

1. 당신에게 마녀란?

 

  마녀, 마녀란 어떤 존재일까? 깔깔깔깔 거리는 기괴하리만치 높고 기괴한 웃음소리에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여자들. 화장은커녕, 얼굴에 검버섯과 사마귀가 가득한 쭈글거리는 노파의 얼굴. 때때로 젊은 여자의 얼굴로 남자를 유혹하여 파멸로 이끄는 무서운 존재. 온갖 세상의 흑마법을 쓰며 사람들을 공격하는 마녀. 세상이 알려준 마녀는 늘 이런 방식으로 그려졌다.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존재로, 때로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흉측한 외모를 가진 늙고 추한 모습으로 말이다. 마녀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 과도한 아름다움이나 추함으로 인해 거부감을 일으키는 존재, 남들과는 다른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이 모두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백할 것이 있다. 사실 나는 마녀다.

 

2. 만들어진 마녀

 

  마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마녀사냥과 관련된 16세기 서양의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 구교와 신교가 갈라지면서 지역별로 이 둘 간의 권력투쟁이 생겼다. 이들은 각각 기선제압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본보기로 이단자를 처벌해야했다. 특히 종교개혁의 물결이 거셌던 서유럽의 독일과 스위스 같은 종교개혁의 본산지에서 마녀사냥이 훨씬 더 강도 높고 빈번히 일어났다. 금욕의 가치를 중시하는 당대의 분위기와 함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남성을 현혹한다 하여 젊은 여성들을 마녀로 몰았고, 늙은 노파들은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말과 함께 마녀가 되어 살해당했다.

  그러나 마녀사냥이 단순히 기독교 교파간의 싸움과 기독교적 가치관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기독교는 명분에 불과했다. 마녀사냥은 16세기 서양의 국가와 각계각층의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 무렵은 농촌 지역에서 농업 자본주의 발달로 대지주의 토지 점탈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으므로, 농촌의 부호들은 소농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 혹은 양모 산업 기반인 목초지로 확대해 갈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농촌의 부호들은 주로 신분이 낮고 가족의 든든한 보호는 없지만 돈은 있는 여자들을 마녀로 몰았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이들을 처단한 후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수입원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경찰력을 제공했다. 또한 전염병과 기근에 대한 사회적 불만을 돌릴 수 있는 도구로도 마녀의 존재는 유용했다. 국가는 국가대로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고, 민중들은 민중대로 여러 가지 사회적 스트레스를 분출할 수 있는 국민적 스포츠의 형태로 마녀사냥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마녀사냥을 가장 집요하게 추진해 나갔던 가장 큰 이해관계가 연결된 집단은 당대 엘리트 계급인 의사집단이었다. 중세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의 치료는 마을의 치료를 잘하는 여자들의 몫이었다. 치료를 담당하던 또 하나의 집단은 수도원으로, 십자군이나 순례자 등, 주로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을 치료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도시화가 진전되고 인구 밀집 지역이 생기면서 많은 전문가 집단이 분화하였고, 전문 의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주로 옥스퍼드, 몽 페리에, 볼로냐 등지에 생긴 대학의 의학부에서 공부했고, 이들은 주로 엘리트층의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학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남성 의사들은 마을에서 활동하던 ‘현명한 부인’들이 조직적으로 커나가는데 경쟁심과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이는 <마녀의 철퇴>라는 책의 한 구절에도 잘 표현되어있다. “만일 여자가 감히 사람을 치료하려 들면 ... 그건 마녀니까 죽여야 한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사례 중 하나로 1322년 파리에서 마녀로 처형당한 쟈코바 펠리시(Jacoba Felicie)의 사례가 있다. 기록에 남아있는 그녀의 죄목은 “이 여자는 속병을 앓고 있거나 상처나 기타 신체 외부 질환을 가진 환자들을 치료해주었다. 이 여자는 아픈 사람들을 집요하게 방문하였다.” 의사가 포기한 후 그녀의 치료를 받고 살아난 환자들이 그녀를 선처해달라고 호소하며 증언하였다. 그러나 이런 증언이 더욱 그녀를 불리하게 만들었고, 고문당한 후 화형에 처해졌다. ‘현명한 부인’으로 불렸던 이 여의사들은 약초학을 발전시켰고, 전문직을 가진 자들로서 경제력이 있었으며, 남성의 경제적 보호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주로 비혼이 많았다.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이들은 당대 의학대학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의술-주로 약초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존재에 불안함을 느꼈던 남의사들은 여의사들, 즉 ‘현명한 부인들’을 마녀로 몰아 살해했다. 동시에 당대 발전했던 약초학 지식의 대부분도 같이 소실되었다.

 

   요약하자면 역사적 사실로 알아본 마녀로 살해당한 여성들은 뛰어난 전문직의 비혼의 여성들이었고, 재산과 경제력이 있는 여성들이었으며, 마을에서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거나 나이가 든 현명한 노인이었다. 이들은 남성의 도움이나, 보호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여성들이자, 가부장적 사회질서의 외부에 존재하는 여성들이었다. 남성적 혈연관계와 결혼으로 남성 사회에 편입된 부속품적 존재로서의 여성,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하는 여성, 남성보다 똑똑하지 못한 여성, 즉 독립적인 사고와 생활이 가능하지 않은 여성을 세상은 바람직한 여성인 ‘마녀가 아닌 자’라고 불렀다. 여성들은 스스로 마녀가 아님을 끊임없이 입증해야만 했다. 마녀는 당대 사회가 제시하는 여성상에 벗어난 여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3. 마녀 되지 않기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재에는 이러한 의미의 ‘마녀’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이제 더 이상 ‘마녀’라고 불리는 여성들이 마녀재판을 통해 고문을 당하고 산채로 불태워지지는 않는다. ‘마녀’라는 단어는 동화책 속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말들로 굳어져버렸다. 그러나 사회가 원하는 여성상과 다른 이들을 향한 훨씬 더 교묘하게 변한 통치 수단들과 그들을 비난하는 단어들은 더 많이 분화하여 우리 주변에 산재해있다.

  16세기의 마녀재판은 푸코가 말하는 ‘주권권력’의 자기 가시화의 모습일 뿐이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의 모습, 의식, 예식, 퍼포먼스로 자신의 권력을 나타내는 가신-주군의 형태가 뚜렷한 주권권력이 말이다. 현대의 우리는 이런 가학적인 형태의 처벌을 자주 접하기 어렵다. 푸코에 따르면 현대는 주권권력이 아니라 ‘규율권력’의 체계로 넘어온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규율의 내재화, 그리하여 자신 스스로 끊임없이 검열하고 감시하며 처벌하게 하는 권력의 새로운 통치로 말이다. 규율권력은 제일 먼저 신체를 훈육하는 방식으로 신체를 포획한다. 이때 이용하는 것이 가족이다. 가족이 감시를 맡으면, 국가와 사회는 훈육을 담당한다. 규율권력적인 통치수단으로 넘어온 현대의 남성들의 지배는 16세기 보다 훨씬 더 교묘해졌다.

 

  현대의 사회는 여성이 규율을 통해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하게 한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화장과 다이어트 같은 여성의 ‘외모 가꾸기’이다. 이 이야기는 연애 시장 내에서의 매력경쟁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여성 전반과 남성 전반의 권력구조의 이야기다. 여성은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외모를 가꾸기를 강요받는다. 사회에서 여성의 젊음과 외모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소유한 여성의 권력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남성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자의 권력이다. 이 구조 안에서의 주체는 언제나 ‘선택하는 남성’이며, 여성은 ‘선택받는’ 객체가 될 수밖에 없다. ‘선택받는 자’의 권력은 일시적이며, 남성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권력을 주는 자는 언제나 남성이며, 이것을 거두는 것도 남성이다. 가부장적 사회의 서사구조에서 언제나 사랑을 쟁취하는 자는 남성이고,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자이다.

  이것은 얼핏 보면 “유혹하는 자의 능동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지점이 여성들 스스로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외모 가꾸기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함정이다. 남성의 유혹과는 달리 여성의 유혹에는 수동성을 내포한다. 사회가 바라는, 남성이 바라는 “여성스러움/여성성”에는 수동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보다는 작지만 너무 작지 않은 적당한 키, 말랐지만 큰 가슴과 골반, 털 없이 매끈한 피부, 얇은 팔다리, 윤기 나는 긴 머리, 청순한 화장, 하이힐, 짧은 치마, 브라 등등은 사회가 말하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반면 남성성을 상징하는 것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과는 극명하게 다르다. 몸을 죄고, 깎아내고, 축소시키고, 시간이 많이 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확장시키고 팽창시키는 것과 관련 깊다. 큰 키, 근육으로 상징되는 건강한 몸, 운동화, 정장구두, 다리털, 겨털 등등. 편한 옷차림은 편한 차림대로, 정장 같은 옷은 정장대로 남성성을 상징하는 것들은 허용의 범위가 훨씬 넓고, 자연스러운 것이 더 많다. 억지로 털을 밀고, 지지고, 화장으로 덮는 것과는 다르다.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기위해, 즉 남성에게 선택받기 위해 수동성을 기표를 취해야만 한다. 남성이 좋아할만한 언행과 옷차림을 하고, 흰 피부를, 옅은 화장을, 여리여리한 몸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사회는 그것이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말하며 끊임없이 이 기준에 맞는 자에게는 상을 아닌 자에게는 가혹한 시선과 관리라는 처벌을 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한국 사회처럼 마른 것이 아니라 뚱뚱한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사회는 다를까? 아프리카 서부에 위치한 국가인 모리타니에는 “라블루흐(Leblouh)”라는 관습이 존재한다. 소녀들의 할머니나 전문적으로 고용된 여인들이 주로 라블루흐를 주도하는데, 소녀들이 비만이 될 수 있도록 음식을 먹이는 가족문화를 라블루흐라고 한다. 이곳은 조혼풍습이 있어서, 적게는 5살 많게는 10대 중반인 소녀들을 비만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양의 음식과 음료를 섭취하도록 가족들로부터 강요받는다. 할당된 양을 먹지 못하면 손가락과 발가락을 막대에 끼운채 비트는 식으로 채벌을 하며 음식을 먹고, 토하면 토사물까지도 먹게 하여 억지로 몸무게를 늘린다. 6세 아이는 보통 2kg의 수수가루를 섭취하고 20L의 우유를 마셔야한다. 이 사회에서는 비만이 아름다운 여성의 기준이고, 교양과 선의 척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교양 있고, 아름다운 여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라블루흐”이다.

   모리타니의 문화는 우리가 보기에는 무척이나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며 가학적으로 느껴진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의 다이어트 문화, 화장 문화, 소아성도착증을 부추기는 온갖 동안 문화들은 라블루흐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외모 가꾸기는 여성의 건강과 생명에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그것들을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예의’라는 이름으로 강요당하고 내면화하게 된다.

 

  이처럼 사회는 외모 가꾸기를 통해 여성에게 “선택 받아야 한다”는 가치관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그런 사회 속에서 여성은 그 가치를 내면화한다. 그리고 세상이 정해준 아름다움이란 기준에 맞춰 자신을 가꾼다. 남성과는 달리 외모가 여성의 자아존중감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선택 받아야 한다”는 규율이 여성에게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규율기제는 자율적으로 자신을 점검하고 검열하며, 통치하게 하는 수단이다. 이 규율은 여성 스스로에게 가하는 규율이기도 하지만, 같은 여성이 같은 여성을 감시하고 규율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통해 남성들/남성적 사회(은)는 “아름다움”이라는 허울 좋은 말을 가져와 직접 손대지 않고, 여성을 이용하여 다른 여성을 감시하게 하고 통제하는 규율체계를 유지시킨다. 

 

  여성 스스로가 자신을 감시하고 다른 여성들을 통제하는 것은 비단 아름다움의 범주에서만이 아니다. 여성은 도덕성에 대해서도 사회로부터 높은 기대를 받으며, 여성들 스스로도 그것을 내면화하고 다른 여성에 대해 같은 잣대를 들이민다. “남자는 나이가 들어도 애야”라는 말은 있어도,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애야”라는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소녀야”라는 말로 성인 여성의 존재를 소녀로 축소시키는 말은 있다. “남자는 다 늑대야”, “남자의 성욕은 어쩔 수 없는거야”라는 말은 통용되어도 여성에 대해서는 같은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사회로부터, 남성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으며 인내와 친절, 호의를 요구받는다. 그리고 여성 스스로도, 다른 여성에게도 같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나쁜 년, 이기적인 년, 못된 년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런 환경 속에서 여성은 스스로에 대한 무수히 많고, 강한 검열기제 속에서 갇혀 있다. 자신이 틀릴까봐, 남들과 다를까봐, 대다수의 남자들 보다 훨씬 더 많은 검열의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여성들은 끊임없이 같은 여성의 눈치를, 남성의 눈치를, 사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끊임없이 타인에게 평가받는 ‘선택 받는 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무난한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길이의 헤어스타일과 적당한 화장을 하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잘 웃으며 살아야한다. 이것이 사회가 제시한 ‘바람직한 여성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벗어나는 순간 수많은 호기심 어린 질문들과 제재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심할 때는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유별나고 까탈스럽고 자기 멋대로인 ‘마녀’ 취급을 받는다.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 타인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 권력이다. 그것이 여성을 통치해온 남성들이 가진 권력의 모습이기도 하다. 틀린 말이라도, 옳지 않는 말이라도 여성보다 더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것,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을 수 있는 것... 이 사소한 것들이, 검열체계에서 벗어난 이 사소한 언행들이 여성들에게는 없는 권력이다. 내면화된 규율로 인해 검열이 일상화되면 원래 인간의 것이었던 권력을 박탈당하게 된다.  

 

  규율에서 벗어난 자는 권력자이다. 다른 말로 규율에서 벗어난 자는 곧 권력자가 된다. 이 남성적 권력은 체계적이고 교묘하게 사회 체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것이 곧 국가가 되고, 민족이 된다. 그리고 이것들을 움직이는 권력의 최소단위는 가족이다. 가족들로부터 여성을 감시하도록 한다. 가족들은 여성들에게 말한다. “여자다워지렴.”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곧 사회가 말하는 ‘바람직한 여성’에 벗어나는 ‘마녀’가 되지 말라는 말이다. 끊임없는 감시 속에서 여성들이 ‘바람직한 여성’에 벗어나는 순간, 가족들은 경보를 울린다. “여자답게 해!”라는 말로 말이다.

   국가에게 ‘마녀들’은 필요 없다. 국가의 태생 자체에 여성들은 없었다. 있었어도 지워졌다. 서양의 역사에서 현대적 국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프랑스 혁명의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에서도 여성들이 먼저 감옥을 습격하고 나섰지만 이 사실은 주류 역사기록에서 지워졌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1)에도 자유의 표상으로서의 여신만이 있을 뿐, 민중들 속에 여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최초의 근대 민주국가라는 미국에서도 독립선언서(1776)에 서명한 이들은 모두 남성들이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는 유관순 말고도 이신애, 안경신, 정정화, 김마리아, 남자연, 최용신 등등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많지만 우리가 아는 이름은 안중근, 윤봉길과 같은 남자 독립운동가들 뿐이다.

  국가는 자신의 가부장적 체계 하에 있는 권력체계를 안정적으로 이양하는데 필요한 인구재생산을 성실히 수행할 순종적인 여성들이, 즉 ‘바람직한 여성’들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요할 뿐이다. 국가에게 여성은 2등 시민이다. 국가는 기원부터 여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나 현재의 체계로나 국가는 뿌리 깊게 남성적이며, 가부장적이다.

 

 4. 여기에 마녀가 있다

 

 가부장적 지배구조와 결탁한 국가는 경제력을 가지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자를 원하지 않는다. 이들은 국가의 근간인 가부장제를 위협하는 존재이며, 인구 재생산을 통한 가부장적 지배질서를 유지시키는데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들일 뿐이다. 여성들이 많이 종사하는 교육계, 돌봄 노동의 직종이 갈수록 저임금과 되어가는 현상과 여성의 가사노동은 저평가되다 못해 무임금으로 착취하는 구조, 그리고 전 세계적인 여성임금차별의 현상은 국가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여성억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세계는 민주주의라고,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고 외치고 있지만 여성은 구조적으로 임금차별과 고용차별, 유리천장과 경력단절을 겪고 있다.

 

  국가유지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능력 있는 여성들, 타인과 다르게 살고 싶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로 편하게 살고 싶은, 비혼의 여자들을 향해서 사회는 ‘독한, 욕심 많은, 이기적인, 잘 웃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남성들과 사회가, 언론이, 여성들이 그녀들을 공격한다. 그녀들은 사회의 여성상과 부합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녀들은 마녀다. 사회의 규율에, 가부장제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마녀가 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마녀를, 마녀의 삶을 자처한다. 그렇다. 나는 마녀다. 세상이 정해놓은 여성의 틀에서 벗어난 삶을 꿈꾸는 나는 마녀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마녀들이 더 늘어날 것이다. 국가의 규율권력과 가부장제 질서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기꺼이 투쟁하는 마녀들이 말이다. 갑갑한 지상의 규율로부터 벗어나 하늘을 누비는 중세의 마녀들처럼, 세상의 아름다움과 여성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 모습을 추구하는 그런 자유로운 마녀들. 나는 그런 마녀들과 함께 하늘을 나는 삶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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