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백-오픈세미나] 발표문 +2
반디
/ 2016-09-28
/ 조회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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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번역시 읽기의 한계와 희망>으로 수정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랭보'가 있어서, 세미나 후 추가 작업하겠습니다.
번역시 읽기의 한계와 희망
詩 공백 세미나 시즌 1에서는 네 명의 외국 시인을 다루었다. 현대성을 대표하는 보들레르와 랭보는 프랑스 시인,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예이츠는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파울 첼란은 유대인이었지만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독일어로 시를 썼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대도 각기 달라서 보들레르와 랭보는 1800년대 중후반을 살았고 예이츠는 1865년생이었지만 그의 주요 활동 시기는 1900년대 초였다. 첼란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등 인류참상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남은 비극의 디아스포라였다.
시대도 언어도 다른 다양한 외국시를 우리말로 접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우리는 시에서 시의 형식, 운율, 메시지, 철학적 전언, 표현의 묘미 등 여러 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하지만 번역시의 특성 때문에 시의 형식이나 운율 등은 거의 포기한 채로 의미를 해독하는 일에 몰입하는 한계를 맛보아야했다. 해독조차 여의지 않았을 때는 영어 번역본을 참고하기도 하면서 텍스트의 1차적 의미를 해독하는데 집중 했다. 세미나 회원들이 하나같이 학구적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시 본령에 얼마나 다가갔는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았다.
보들레르, 랭보, 예이츠는 여러 번역자들이 다루었던 반면 파울 첼란은 그렇지 못했다. 번역자가 오직 한 사람이라면 그 번역자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번역자가 여러 명일 경우 같은 시라도 번역자에 따라 선택하는 어휘가 달랐다. 상대적으로 번역자가 많았던 보들레르는 황현산, 윤영애, 안민재 등의 번역이 있었다. ‘이응’님의 후기를 인용하면 ‘어머니/샘, 정부/애인, 쾌락/기쁨, 의무/눈물, 입맞춤/키스, 항성/태양, 호흡/숨결’ 등 번역자에 따라 언어 선택의 폭이 컸다. 번역자가 선택한 단어만 보아도 내용에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다양한 번역이 시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 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주기는 한다.
그러나 보들레는 시에 있어서의 형식을 중시하였고 의도적으로 ‘추의 미학’을 추구하여 살인, 시체, 술주정뱅이 등을 자신의 시의 소재로 삼았다. 그는 <악의 꽃>을 저항에의 열정적인 욕구, 그리고 증오의 산물로 칭하면서 시가 신경쇼크를 유발시키도록 권장하고 독자를 자극시키려하였다. 이런 시의 분위기상 곱고 아름다운 단어보다는 위악적이고 거친 어휘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시가 많다. 이런 시인의 전체적인 의도나 목적을 간과한 채 또 번역자가 문학, 그것도 시라는 특성을 무시한 채 불어라는 언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만 몰두했다면 독자로서는 번역시를 읽었다는 경험만 간직할 뿐 그 시를 제대로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또 번역자가 시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가지고 단지 아름다운 언어만을 골라서 번역을 했다면 시 본연의 어조나 분위기와는 전혀 상반되는 그야말로 조미료 맛으로 범벅된 음식을 먹는 것처럼 달달한 시를 읽게 될 것이다. 우리의 해독이 대부분 즐겁고 아카데믹한 오독일 확률이 높지만 이런 경우에는 본의 아니게 느끼한 오독을 하게 될 것이다.
아일랜드 시인인 예이츠는 신화를 소재로 시를 썼다. 우리가 읽었던 ‘레다와 백조’가 대표적이다. 15행의 짧은 이 시에는 그리스 신화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스 3부작’이 함축되어 있다. 시대 때도 없이, 처녀든 유부녀든 가리지 않고 겁탈하는 제우스. 이번에는 백조로 변신하여 레다를 겁탈한다. 이런 묻지마 성 폭력으로부터 잉태된 전쟁과 살육의 이야기가 대를 이어 진행되는데, 예이츠는 이것을 3연 15행에 다 담아내었다. 당시에 예이츠는 이 시를 소네트라는 형식에 담았다는데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파울첼란의 시는 전영애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시인의 대표작인 ‘죽음의 푸가’는 ‘푸가’라는 음악의 형식을 빌린 것인데 우리는 그동안 다른 번역시에서 맛보지 못했던 시에 있어서의 형식을 맛 볼 수 있었다. 주제를 향해 차이를 내포한 채 반복되는 푸가의 형식은 내가 번역시를 읽으면서 유일하게 경험한 시의 형식이었다. 첼란의 육성으로 ‘죽음의 푸가’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일부분이지만 동시대를 살며 시를 공부하는 우리에겐 값진 경험이었다. 그는 비록 신경증에 시달리다 세느강에 몸을 던졌지만 함축적이고 절제된 언어와 생생한 이미지, 사유의 흔적이 그대로 전해지는 시편들에서는 그런 병력을 짐작하기는커녕 지나치게 명료한 이성의 작동을 느낄 수 있었다.
지리적 국경의 개념이 희박해진지 오래고 문화적 국경의 개념도 희석되면서 돋을새김 되는 글로벌 시대다. 출판사에서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당일, 수상자의 작품을 번역 출간하는 민첩함인지 얍삽함인지를 보여주었다. 최근 민음사에서 세계시인선 리뉴얼판을 출간 중인데 지난 5개월 동안 16권이 새로 출간되었다. 그동안 내가 읽은 외국시집은 출간도 번역도 오래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출판사의 이런 발 빠름이 시집 출간에도 한몫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것이 반드시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선택과 비교의 폭이 넓어지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랴. 우리가 세미나에서 선택한 시인의 시를 통째로 접해보고 싶은 것은 개인의 희망으로 남겨두고 시즌 2에서도 다양한 시인들의 시를 좀 더 깊이 접해보고 싶다.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멋져요 ~~~ 바로 어제 오후에 러시아에서 러시아 은시대(러시아혁명 직전 시대)의 시를 공부한 분을 만났는데, 지난 번 반디님이 말씀하였듯이 당시 상징주의 시에는 운뮬이 매우 엄격하여, 우리나라의 시조처럼 엄격한 운율을 따랐고, 심지어 글자 숫자까지 맞추어야 했다고 하더군요. 번역시는 의미만을 겨우 파악할 뿐이고 운율이나 그 언어의 어감이나 형식을 재현하거나 느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는군요. 번역시와 관련된 좋은 의견을 많이 담아 주실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
반디님의 댓글
반디
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엄격한 형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 줄 번역도 하지 못하는 저는 사실 번역자게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읽는 우리들의 자세랄까, 유의사항이랄까에 대해 생각을 모아보겠사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