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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에세이]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부를 읽다
선우 / 2018-12-15 / 조회 3,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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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부를 읽다

선우(들뢰즈 세미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부를 읽었다. 들뢰즈는 서론에서 스피노자에게 있어 “표현하다”라는 말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1부는 왜 여러 실체‘들’이 아니라 단 하나의 실체여야 하는지를 조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실재적 구별 수적 개별의 개념을 사용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접근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표현의 역할과 중요성의 논의를 따라가 보고, 속성이 동사라는 것 그리고 속성들의 존재론적 평등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1. 표현의 역할과 중요성

 

들뢰즈가 주목하는 ‘표현’ 관념은 <<에티가>> 1부 정의 6에 나온다. “내가 말하는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다시 말해 그 각각이 영원하고 무한한 하나의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이루어진 실체이다.” ‘본질’, ‘속성’, ‘실체’가 모두 ‘표현’이라는 단어와 만나고 있다. 본질은 표현된다. 속성은 표현이다. 실체는 스스로를 표현한다. 속성은 무한히 많을 수 있으므로 ‘속성들’이라는 복수가 가능하다. 실체는 그렇지 않다. 오직 단 하나의 실체이다. 실체의 단일성과 속성들의 다양성에 관련된 모든 문제가 표현 관념 속에 집약된다.

실체는 그의 속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며, 각 속성은 하나의 본질을 표현한다. 속성들은 그들에게 의존하는 양태들 -실체의 변용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양태도 표현적이다. 양태들의 표현성은 사물들의 진정한 생산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표현은 그 자체로는 생산이 아니지만, 속성이 양태들 속에 자신을 표현할 때 생산이 된다. 실체인 신은 그의 결과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기 이전에 홀로 자신을 표현한다.

 

표현 관념은 정의나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표현 관념은 정의6에 등장하지만 정의되지도, 다른 것을 정의하는 데도 사용되지 않는다. 표현 관념은 실체와 속성을 정의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미 정의 3과4에 이미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표현 관념은 신을 정의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정의는 표현에 대한 언급이 없어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표현 관념은 언제 중요해지는가? 표현 관념은 정의6에서 실체와 속성과 본질간의 관계를 규정할 때 부상한다. 실체가 절대적으로 무한할 때, 그것이 무한히 많은 속성들을 소유할 때, 오직 그 때만 속성들은 본질을 표현한다고 얘기된다. 실체와 속성과 본질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보여주는 정의6만이 실재적(實在的)이다. 나는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을 담고 있는 발생적 정의를 실재적 정의와 동의어로 본다.

 

철학적 전개와 기하학적(수학적) 증명간에는 차이가 있다. 수학자는 하나의 정의로부터 보통 하나의 특성만을 결론으로 도출할 수 있다. 삼각형의 경우를 보자. 삼각형은 한 평면상에 있고 일직선상에는 없는 3개의 점 A, B, C를 2개씩 쌍으로 하여 선분을 연결하여 이루어지는 도형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삼각형의 다른 특성, 즉 세 내각의 합은 두 직각의 합과 같다 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특성을 증명하기 위해 기하학자는 밑변을 연장하고 다른 평행선을 긋는 삼각형의 선분을 새로운 관점에서 고려해야 한다. 밑변은 저절로 자라나는 식물이 아니다. 여러 특성들을 인식하기 위해 기하학자는 관점들을 증가시켜야 한다. 따라서 기하학적인 방법은 관점들의 외부성과 특성들의 개별성(분산성)이라는 두 가지 제한에 구속된다. 이 때 제기되는 스피노자의 질문은 이후 에티카 전체를 이끌어 가는 그의 방법론이자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하나 하나 도출된 특성들을 집합적으로 고려하고, 정의 외부에서 취해진 관점들을 정의된 사물 내부에 위치시킬 수단은 없는가?”

 

철수는 원을 중심이라 불리는 하나의 동일한 점으로부터 동등한 거리에 위치한 점들의 궤적이라 정의한다. 영희에게 원은 그 한쪽 끝은 고정되어 있고 다른 쪽 끝은 움직이는 직선에 의해 그려진 도형이다. 구(球)는 그 축을 중심으로 하는 회전하는 반원에 의해 그려진 도형이다. 철수의 정의는 그 결과로부터 그 원인들을 추론하는 형식이다. 원의 특성(고유성)을 설명해주는 일반적 정의일 뿐이다. 원에 속하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그 원이 무엇인지, 그 본질(본성)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희의 정의는 원이라는 것이 도출되는 원인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다(발생적 정의). 물론 기하학에서는 이 원인들이 허구적인 것이다. 임의로 허구를 형성하는 것이다. 반원은 저절로 회전하지 않는다.

 

실체, 신, 절대자의 경우에는 허구적인 것이 전혀 없다. 무한히 많은 양태들이 실체의 정의로부터 ‘집합적’으로 도출된 ‘특성들’과 동일화되고, 속성들이 자기들이 근거하는 이 실체에 ‘내부적인 관점들’과 동일화되기 위해서는 허구가 필요하지 않다. 속성들은 실체에 대한 관점들과 같다. 하지만 절대자에게 그 관점들은 외부적이기를 멈추며, 실체는 그 자신의 관점들의 무한성을 자체 내에 포함한다. 특성들을 하나 하나 도출하는 것, 사물을 다른 대상들에 관계시켜서 반성하고 설명하는 것은 더 이상 유한한 지성이 아니다. 기하학자가 사용해야 했던 그 지성 말이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 스스로를 펼치는 것이 바로 사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현은 증명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증명하다’는 ‘표현하다’ 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2. 단 하나의 실체(수적 구별과 실재적 구별)

 

많은 속성들로 이루어진 실체‘들’이 아니라 왜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실체여야 할까? 데카르트는 각각의 속성을 가진 여러 실체를 상정했다. 사유실체, 연장실체... 연장의 속성을 가진 실체와 사유의 속성을 가진 실체는 ‘구별’된다. 또한 데카르트에게 있어 속성은 그가 질화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양태들의 본질도 구성한다. 동일한 속성을 가진 여러 실체‘들’이 있다. 실재적, 실체적임과 동시에 수적인 구별이 있는 셈이다. 연장실체의 종류인 컵과 탁자를 생각해보면, 컵은 탁자 없이도, 탁자는 컵 없이도 생각될 수 있다. 이러한 구별을 실재적 구별이라 한다. 데카르트의 실재적 구별은 존재론적으로도 구별되고 수적으로도 구별된다.

 

데카르트는 자기가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사고되는’ 사물들을 실재적으로 구별된 사물들과 결코 혼동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이 이행의 순간 ‘신’이 개입된다. 명료하고 분명한 관념 속에 있는 사물을(실체를) 우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서 창조하는 신에 의해 사물들은 실재적으로 구별된다. 데카르트에게 실재적 구별은 구별됨의 이유를 자체 내에 지니지 않는다. 그 이유는 외재적이고 초월적인 신적 인과성에 의해 제공된다. 창조주 신은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사고되는 실체들로부터 실재적으로 구별된 실체들로 우리를 이행시킨다. 상이한 속성의 실체들간에서든, 아니면 동일 속성의 실체들 간에서든 실재적 구별에는 사물들의 분할이, 다시 말해 그것에 대응하는 수적 구별이 수반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수적 구별은 실재적 구별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이 20명 있다고 할 때 숫자 20은 사람의 속성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수는 단지 양태들에만 적용된다. 따라서 수적 구별은 실체에 적용될 수 없다. 수적 구별은 실체들을 구별짓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속성을 감싸는 양태들만을 구별짓는다. 동일한 속성의 여러 실체는 없다.

수적 구별은 결코 실재적이지 않다. 실재적 구별은 결코 수적이지 않다. 속성들은 실재적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실재적 구별은 수적이지 않다. 따라서 모든 속성들에 대해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실재적 구별은 존재론적으로도 수적으로도 구별되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실재적 구별은 존재론적, 수적 구별을 함축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야곱은 존재론적으로는 구별되지 않지만 실재적으로는 구별된다.

 

3. 속성은 동사다(고유성 vs 속성)

 

“신의 고유성들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실체적으로 인식시키지 않는 ‘형용사들’일 뿐이다. 신은 그것이 없다면 신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들로 인해 신인 것은 아니다.” 압권인 문장이다. 고유성은 어떤 사물에 속하는 것이지만 결코 그 사물이 무엇인지(그 사물의 ~임)를 설명하지 않는다. 아라차는 패셔너블하다. 패서너블은 아라차에 속하는 것이지만 결코 아라차가 ~인지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들뢰즈는 고유성은 형용사로 표현되고, 본질인 속성은 동사로 표현된다고 말한다. 무한함, 완전함, 불변함, 영원함, 전지함, 편재함. 우리는 보통 이것들을 신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이것들은 실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이미 형성된 그 본질의 양상을 설명할 뿐이다. 신의 본질이 아니라, 그 속성들의 한 측면을 나타내는 고유성이다.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동사들이다. 고유성들은 단지 그 본질들의 양상을 지시하는 형용사들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고유성들로는 신의 본성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고유성과 속성의 차이 형용사와 동사의 차이를 읽으면서, 그동안 나 또한 고유성과 속성을 혼동했고 그리하여 고유성을 속성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의 고유성일 뿐인데, 그 사람의 본질로 생각하는 우를 범한 셈이다. 예쁘다 아름답다 차갑다 무심하다 는 고유성이다. 이 형용사들이 어떤 사람의 본질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 사람의 본질은 그 사람의 ‘움직임’(동사)에 있다. 그러하니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의 본성(속성 본질)을 알고 싶다면, 눈을 크게 떠서 그 사람 몸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될 일이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더 분명할 것 같다. 그 움직임의 결과 겉으로 드러난 고유성들, 형용사들 말고 말이다.

 

4. 속성들의 동등성(만물의 존재론적 평등성)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실체(신). 그 무한히 많은 속성들은 모두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 속성들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모두 각기 무한하고 완전하게 실체(절대적으로 무한한)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실재로 구별되는 것의 존재론적 통일성(평등성)은 우리로 하여금 ‘차이’를 다시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부정이나 대립, 결핍이 없는 차이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함께 있음이 같음(동일성)의 확대가 아니라, 이질성(다양성)에서 비롯됨을 알아차리게 된다.

 

조선 중기 천주교가 유입될 때 그 사상에 마음이 움직인 많은 사람들 중 서자, 서녀 출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박해와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간다.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의 평등성을 전하는 그 학문에,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서자 서녀라는 이유로 당해야 했던 모욕으로 눌렸던 이들이 눈을 떴다. “당신이 꿈꾸는 세상에 노비와 백정이 있습니까?” 최근 종영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남자 주인공 유진은 애신에게 묻는다.

 

인간만의 평등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평등함. 모두 다 신(실체)의 속성을 무한하고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는데서 오는 만물의 평등함이라는 철학은 내게 ‘평등’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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