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 강사인터뷰_정창조_0103(수) 개강
우리실험실
/ 20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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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강사인터뷰_정창조 :: 2018-0103(수) 개강
‘악의 평범성’을 지적한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지적한 ‘악의 평범성’과 그로부터 나온 담론들은 현대사회에서 탄생한 온갖 윤리학적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이 개념은 서구의 전체주의나 가깝게는 한국 근현대사의 온갖 악들을 만들어내는 데 복무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해 버리자는 논리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단어는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권위를 사유하지 않은 채, 진부한 태도로 그것을 정언명법처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비판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관료였고, 나치정권 당시로서는 불법을 저지른 사람도, 그렇다고 악마도 아니었습니다. 악한 동기도, 범죄 동기도 없었던 이가 유대인 강제수용과 절멸의 한 과정에 참여했다는 거예요. 그것도 직접 살인을 저지르는 형태가 아니라, 단지 데스크에 앉아서 말입니다. 그는 진부한 행정업무의 반복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명령을 공무원으로서 수행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입법자로서의 능력’을 포기했으며, 그러한 태도가 실제로 엄청난 악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유죄입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무시무시한 인간형이라 평가하는데요. 왜냐하면 아이히만은 가해자가 피해자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도 그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거든요. 이러한 무사유無思惟는 언제든지 아이히만과 비슷한 유형의 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요?
한나 아렌트 :: 철학자도, 좌파도, 자유주의자도 아닌 ‘유대인’
아렌트는 자신을 철학자도, 좌파도, 자유주의자도 아닌,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나치 통치기의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무국적자가 되어야 했던 아렌트는 ‘의식적 파리아(pariah,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로서 사유하고 행위하고자 했습니다. 의식적 파리아란 버림받은 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자각하고, 그 위치에서 주류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저항하는 자입니다. 아렌트가 ‘나는 유대인이다’라고 한 것은 역사적ㆍ생물학적으로 고정된 ‘유대인성’에 자신을 합치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 난민이 억압을 받고 있다는 혹은 ‘무국적자’로서 자신이 거주하는 국가로부터 억압을 받을 자격조차 갖지 못하다는 ‘정치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사실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자 하는 것일 뿐이지요. 이러한 차원에서 아렌트는 “A가 A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는다면, 독일인, 프랑스인,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A로서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주류사회에 ‘동화’되길 거부하고, 억압받는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싸울 것을 촉구하는 것이지요.
현실적으로는 많은 파리아들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주류사회에 동화되려 하거나, 안정적인 상황이 도래하면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망각하고 이제 주류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낙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렌트에 따르면 파리아들은 주류사회에서 여전히 파리아로 남아있을 것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언제든 다시 억압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과거와 역사를 망각하려 해봤자, 과거는 딱지처럼 계속 그를 따라 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방인 및 소수자가 자신을 여전히 ‘국외자’, ‘내부의 외부’로 취급하는 주류사회의 구성원으로 무작정 편입되려 하거나, ‘자신도 추상적인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하며 해방을 구걸하는 것은 아렌트에게서 결국 현실도피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파리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서 세계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주목하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 개념도 파리아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서 등장한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역사방법론 :: ‘이야기하기’로서의 역사
아렌트는 당대의 지배적인 역사서술 방법론을 비판하며, ‘이야기하기로서의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왜 아렌트는 하필 이야기하기에 주목했던 것일까요? 철학전통 속에서 이야기가 가진 불확실성과 비-진리성을 비판해 온 이들이 참 많습니다만, 저는 이야기가 실제 투쟁현장들에서 발휘하고 있는 저항적 힘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이야기가 지배계급의 억압도구나 폭민들의 선전도구로 활용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사실조차도 실은 인간의 실존이 이야기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지요.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사멸적이며, 그들이 수행하는 행위는 현상공간에 나타나자마자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그 중 가치있는 것들을 어떻게 계속 인간 의미망의 세계 속에 보존할 수 있을까요? 아렌트가 대결하고자 한 교조주의적인 합법칙적 역사관은 모든 행위와 사건들을 하나의 법칙적 운동과정으로 환원시켜 버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행위자의 독특한 ‘누구임’과 사건 자체가 독립적으로 가질 수 있는 ‘진귀함’은 사라져버릴 수 있지요. 이는 레지스탕스, 그리고 파리아들이 만들어온 저항공간, 즉 거대한 역사적 맥락에서는 ‘사소한 것들’로 치부되곤 하는 것들을 가치절하하고, 심지어 망각의 위협 속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이야기꾼은 보물을 발굴하듯이, 이 소소한 것들이 갖는 진귀함을 세계에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는 억압받는 자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나름의 안정된 정치공간, 즉 전통을 가진 ‘기억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요.
‘지금 여기’의 정치와 한나 아렌트
서구 사회에서는 난민, 이주노동자 관련 문제가 대두되고, 또 그 흐름 속에서 극우세력이 선전을 거듭하면서 아렌트의 저술들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트럼프 당선 이후 『전체주의의 기원』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하더군요. 아렌트가 오늘날의 이 문제들에 명확한 정답을 주지는 않습니다만, 그것들을 어떻게 사유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파리아 난민 문제’,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물론이고, 아렌트가 전체주의 체제가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본 ‘전체주의적 요소’와 관련해서 말이지요.
한국의 경우, 2016년 촛불을 ‘아렌트적 공간’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촛불은 ‘인민들의 함께 행위하는 힘’, 즉 아렌트가 말하는 ‘권력’의 실현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공간은 그곳에 모인 다양한 요구들을, 그곳에 참여한 자들의 위치성에 따른 다양한 의견의 마주침을 단 하나의 응축된 의지로 변형시켜버리기도 했습니다. 아렌트가 정치의 기본조건이라고 본 ‘복수성의 조건’은 금방 단일한 전체의지의 실현공간으로 변하곤 했지요. 이에 소수자 이슈와 결부된 숱한 문제제기들, 심지어 신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들조차 ‘정상국가로의 복귀’라는 대의 하에 ‘나중에’로 미뤄지곤 했습니다. 아렌트에게 혁명이란 구체제를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운 정치경험을 제도화 하는 것인 만큼, 촛불이 아렌트 입장에서 ‘혁명’이라 볼 수 있는지도 조금 더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고요. 이러한 차원에서 아렌트의 텍스트들은 촛불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는 데 의미있는 재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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