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의 질서] 3강 후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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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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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강좌 ‘담론의 질서’ 3강 - 후기
201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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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과 ‘거짓’.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 이 단어들을 접한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산수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해가 맞으면 그 명제는 참, 틀리면 거짓. 그것은 매우 단순명료했고, 어린 나에게 참과 거짓의 분할은 일종의 놀이처럼 보였다(사실은 좀 쓸 데 없어 보였다). 참과 거짓의 무게감을 미처 알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푸코가 말한 배제의 세 가지 외부적인 과정들(금지, 분할과 배척, 진위의 대립)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진실과 거짓의 대립이다. 수업 후 드는 의문 몇 가지. 우리사회에서 진실이라 불리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그것을 주장하고 있는가. 사실 진짜 궁금한 것은 진실의 정체를 알게 되었음에도 '내가 곧 죽어도 진실이라 믿는 것이 남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이다.
푸코의 텍스트는 해독하려 할수록 오독만 쌓이는 것 같아서 강의 내용을 중심으로 ‘진실’에 대한 몇 가지 ‘진실’을 정리해보겠다.
① 진실은 불순하다
모든 진실의 내밀한 곳을 파고들면 욕망과 권력 의지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에게 무력하게 농락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정 담론의 내부에 있는 자는 그것의 폭력적이지 않은 폭력성을 감지하지 못한다. 이미 내가 그것을 진실로 보도록 조건화돼 있기 때문에 진실을 추구하는 자신이 사적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약 내 안에 조건화돼 있지 않은 특정 담론을 만난다면? 반박은커녕 그냥 지나칠 뿐이니.. 그들과 조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② 나는 진실이고 너는 거짓이다
참과 거짓은 자연스럽게 옳고 그름의 층위와 결탁한다. 옳고 그름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장치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한 담론은 정의를 말하는 담론’이라는 비합리와, 우리와 다른 그들을 굳이 교정하려 드는 오지랖을 범하게 된다. 허경 샘은 성리학적 도덕주의 영향을 언급했지만 모든 문화권으로 일반화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의 자신을 기준으로, 자신과 다르면 틀렸다는 재단에 대해 강의 스타일을 빗댄 설명(공부에 순서가 있고 방법이 있다는 웃기는 생각에 저항해 강의를 막하는 거라는...ㅎ)은 과거 나의 경험을 불러들였다. ‘나는 체계성을 신뢰하는 정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니체)’. 6년 전, 세계문명사를 넘나드는 (다른 체계를 가진)선생님의 첫 수업을 듣고 도망쳤던 나는 아무래도 체계성을 신뢰하는 정신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하나의 단계를 더 추가하자면 참과 거짓이라는 진위판별은, 옳고 그름의 신념의 층위뿐 아니라 좋고 싫음(혐오)의 감정적 층위와 또 다시 결합하면서 매우 강력하게 자체 강화되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것 같다. 어떨 때는 호러영화보다 더 공포스럽다. 여기서 허경 샘의 시그니처를 빼먹어서는 안 되겠다. 나를 포함해서!
③ ‘사실’은 ‘진리’도 ‘진실’이었다.
· 사실(事實) : 1.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
3.(‘사실이지’ 또는 ‘사실 말이지’ 꼴로 쓰여) 자신의 말이 옳다고 강조할 때 쓰는 말.
· 진실(眞實) : 1.거짓이 없는 사실 2.마음에 거짓이 없이 순수하고 바름.
· 진리(眞理) : 1.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 3.<철학>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실 말이지’란 표현이 자신이 옳음을 강조하는 장치라는 것은 국어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공식적으로 판명된 것이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사실과 진실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진실과 진리는 아예 다른 차원에서 사용한다. 즉 진실은 개체성이 주관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반면, 진리는 ‘영원불변’, ‘절대적인’이라는 수식어를 자동소환하듯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대단한 무언가로 인식한다. 하지만 푸코는 우리가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진실의 정체를 고발하고, 진리도 진실에 다름 아님을 밝히며 우리의 순수를 파괴한다. 보편성은 보편적이지 않고 정치적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또 다른 층위에 위치하고, 만약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가로 질러~”
마지막으로 텍스트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지난 수업 텍스트 중 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을 뽑아봤다. 다른 층위에 위치하고 지식을 가로지르는 능력이라, 무한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옳고 그름에 대한 신념의 층위일 뿐 아니라 좋고 싫음의 감정적 층위와도 연결된다"고 하신 부분이 인상적이네요^^
싫으면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해버리기도 하니까요.
오늘 읽고 있는 책에서
<대념처경>에는 '세상에 대한 욕심'이 첫번재 장애이고,
'싫어하는 마음'이 두번째 장애라는 말이 나오는데
싫은 걸 옆에 두고 봐야 하는 '원증회고'는 '애별리고'만큼이나 고통이지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3강 당번 분들이 후기를 잘 써주시니, 참 기쁩니다요.
감사합니다 모로님!
삼월님의 댓글
삼월
신이 죽어도 신앙심은 남는다는 니체의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진리에 대한 갈망이 순수하다는 신앙심은, 진리가 부정되었고, 다시 반복해서 여러 번 부정되는 순간에도 남아있습니다.
심지어 무신론자에게도, 격렬하게 신을 부정하는 자에게도 신앙심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이 작은 공간에 모여 만드는 회합이 서로의 신앙심을 들여다보고 확인하는
종교집회를 닮은 듯 하여 문득 재미있다고 느꼈습니다.
모로님의 차분하고도 위트있는 문장을 따라 읽다 보면 저도 해방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까요?
기분 탓인지 이미 조금은 가벼워진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로님의 댓글
모로저도 가끔 우리의 진지함, 성실함, 무게감이 니체의 중력의 정령과 다른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ㅎ
라라님의 댓글
라라
후기를 읽다보니
제가 10년 전에 입버릇처럼 하던 말 "틀린거 있어? 틀린 거 있으면 고쳐봐!"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럽습니다. 내가 옳다고 확신했던 모양입니다.
성의+깊이를 성실+무게로 헷갈리지 않도록 깨어있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