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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1강 0103 후기 +3
소리 / 2018-01-07 / 조회 1,948 

본문

 이번 강은 "인권의 역설"이란 주제로 시작했습니다.

 

 <인권의 역설>이라는 부제답게 먼저 '인권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인권은 무엇이고, 왜 지켜져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은 순진한 근거인 "인간이니까!"하는 답 밖에 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인권이란 개념의 빈약성은 더 좋은 이유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폐기 가능한 개념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나치 독일이 예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권리를 보증해주는 토대는'신', '질서', '관습'이라고 하는 낡고 빈약한 근거 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을 이후로 이러한 낡은 토대는 힘을 잃고 '인간'이 그 토대를 대체했습니다. 그러나 이 추상적인 인간, Man, Homme는 nomos라고 하는 법체계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평등 위에 서 있습니다. 따라서 법 위에 인간의 평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nomos 안에 들어가지 않는 인간은 어떠할까요? 난민과 같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인간의 법체계는 완전무결하게 완벽하지 않으며, 평등한 인간을 완벽히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인간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권리가 현실적으로는 없을 수가 있습니다. 아렌트는 이를 토대로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최소한 '자연적으로' 평등한 인간은 없습니다. nomos(이하 노모스)노모스 속에서 약속과 합의를 거쳐 그 안에서, 즉 정치체 안에서 권리를 얻어야지만 평등할 수 있는 존재이자 인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우리는 쉽게 자연권이자 인권을 토대로 법과 주권이 세워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에 불과합니다. 현실적으로 비시민일 경우 자연권인 인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인권이 보장되는 경우는 특정 정치체에 속해있으며, 법에 의해 보호받고, 억압도 받을 수 있으며, 주권자가 될 수 있는 경우에만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는 정치체와 법, 주권자 위에 인권이 보장됩니다. 이에 강좌 시간에 에드먼드 버크라는 복고파의 귀족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의 말이 나옵니다. 인권은 없고, 국가시민의 권리만 있다는 것이지요. 아렌트는 그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관습과 역사, 정치체에 속한 이들만 가질 수 있는 '권리'만이 현실에서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 외의 사람들은 헐벗은 삶, 즉 단지 인간일 뿐 아무것도 아닌자들, 쓰레기같은 자들이 됩니다. 비문명인들로서 인권이 보장되는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되는 것이지요. 처음에 이 개념은 문명과 대비되는 비문명에 대한 제국주의를 위해 쓰였지만, 2차 세계 대전이후로 유럽 내에서도 이러한 헐벗은 삶의 사람들이 대거 발생하게 됩니다.

​ 아렌트는 안정되고 의미관계가 있으며 관계망이 있는 고향을 상실한 자들, 법적지위를 상실하고 정치적 권리 또한 상실한 이들을 "지구의 쓰레기"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아렌트의 무국적자인 난민의 삶을 빗댄 표현이기도 합니다.  

법의 보호는 물론 억압조차 받지 못하는, 범죄자나 노예보다도 못한 존재들, 죽어도 어느 누구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의 삶이 "지구의 쓰레기"들인 난민의 삶과도 닮았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난민은 훨씬 넓은 개념으로 쓰입니다. 난민은 원래 어떤 나라에서 정치적이니 이유나 사상적 이유, 종교적 이유로 탄압 받고 망명한 이들이지만, 20세기 이후 아렌트의 정의에 따르면 난민은 어떤 인종으로 태어났거나, 어떤 계급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추방이나 숙청당하는 이들까지도 포함되게 만듭니다. 이 대목에서 단순히 난민 뿐만 아니라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계급들까지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이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지만 인간으로의 권리가 없는 자들, 무쓸모한 물건 혹은 쓰레기 같은 자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숨죽인 채로, 목소리도 모습도 지워진 이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아렌트는 이들의 권리에 대한 투쟁이 단순히 "인권이니까!" 혹은 "나도 인간이야!"라는 구호는 사회에도 국가에도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간의 권리를 부여 받을 권리 조차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어떤 정치체에도 속하지 못했으며, 먼저 정치체에 속할 권리부터 얻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멤버쉽을 가질, 정치체에 속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권리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치체의 형태가 문제시 됩니다. 주로 국민국가(natio-state)는 현실적으로 인권의 토대가 됩니다. 선생님은 강의에서 "마치 유대인들의 권리가 이스라엘이 생기고 나서야 보장된 것"이라고 말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약간 이해가 안 가는 비유였습니다. 전 세계 각국에 있는 유대인들의 권리가 이스라엘 건국 이후 더 높아진 것이라고 생각되지도 않고, 이스라엘을 통해 유대인들의 권리가 어떻게 보장되었다는 것인지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어쨌든, 강좌와 아렌트의 포인트는 정치체 안에 속해서 권리를 가질 권리부터 획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체의 문제가 문제시 됩니다. 아렌트의 스승이기도 한 야스퍼스는 '세계 시민주의적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아렌트도 선생님도 저도 이 생각은 너무도 이상주의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계 시민주의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이 도덕적 각성을 해야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도덕적 각성이라 함은 인류애와 동포애, 박애를 기반으로 하는 온정주의적, 비 정치적 덕목에서 기반합니다. 이는 다양성을 저해시키고 이방인들을 인정하기 보다는 주류에 동화시키려고 하는 방법으로 나갑니다. 현재 한국의 많은 난민/다문화 가정에 대한 정책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지요. 일례로, 제가 난민 관련 한국어 강사 자원봉사를 할 때의 일입니다. 시중에 나오거나 정부 보조의 책들과 프로그램들을 보고 소름끼쳤던 적이 있습니다. 한국 시가 문화에 대처하는 현명한 외국인 며느리에 대한 처세술 책이나, 한국 음식 만들기 프로그램, 한국의 역사와 풍습에 대한 다양한 책과 프로그램들이 있었지만, 한국에 사는 난민과 외국인들, 다문화 가정의 입장에서 한국인들을 교육시키는 것들을 없었습니다. 현재는 조금 바뀌었길 바랍니다. 그러나 불과 5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살아야만 하는 외국인들이 한국인으로 동화시키는데에만 치중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각설하고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온정주의는 다양성을 고려한 것도 아니며, 정치적으로 채택할만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온정주의에 기반한 세계 시민주의적 공동체는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아렌트는 말합니다. 어떤 것이 좋은 정치체인지에 대해서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아렌트는 아테네 폴리스의 정치체계처럼 혁명기에 탄생한 정치체로서 평의회의 형태를 가진 형태를 이상적으로 보았습니다. 다양한 권력이 구성가능한 상태의 모습이 좋다는 것이지요. 이 얘기 후에 아렌트가 아나키스트는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끊임없는 힘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고 새로운 권력을 생성하고 없애고 하는 과정이 아니냐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아렌트는 정치체 제도화를 중요시합니다. 혁명을 좋아하지만 영구 운동론이나 영구 혁명론을 믿지 않습니다. 그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안정성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예를들어 무국적자는 이동의 자유라는 근본적인 자유가 보장되지만, 그 외의 다른 것은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고 이동의 자유라는 인류의 중요한 권리가 있으니 인권을 보장 받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렌트는 인권을 획득하기위해 싸우는 행위를 중요시했습니다. 이 때의 인권은 인간을 토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거기서부터 싸워서 정치체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번 수업을 들으며, 인권이란 단어에 대한 의문이 다시금 제기되었습니다.

저는 인권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인권보다는 생존권, 권리라는 말이 훨씬 와닿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권이라는 말은 권리를 쟁취하려는 운동성을 저해시키는 물타기 같은 효과를 내는 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렌트와 관련된 강좌를 들으며 더욱더 근로자, 광복절과 같은 느낌으로 인권이란 단어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트렌스 젠더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아렌트의 논의를 밀고가면, 트렌스젠더는 남성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혹은 동성애적 성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류의 성별이분법의 질서에 편입되려는 시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듭니다. 게이로서 레즈비언으로서 바이섹슈얼로서 싸울 수 있는 것을 성을 바꾸는 시도로 무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들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이런 논의가 국외에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에 관련된 내용도 궁금해졌습니다. 다양한 물음을 던지게 하는 그런 강의였습니다. 익숙하던 것을 다르게 보게 되는 것, 그것을 위해 공부하는 요즘 아렌트의 강의가 더욱 와닿았습니다.

댓글목록

정창조님의 댓글

정창조

역시 반장인 소리님! 성실한 첫 후기 감사합니다~ㅎㅎ 무엇보다도 난민 한국어 교육 봉사 활동이라는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 적어놓으신 부분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인권'이 왜 다른 '좋음'들을 가장한 논리 속에서 '순진한 것', '단지 이상적인 것' 따위로 치부되어 버리고,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인권을 위해 싸운다고 할 때에도 꼭 고민해 봐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이후, 신이나 관습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타고난다고 가정되는 '추상적 인간'이 인권의 토대가 되었으며, 이러한 생각은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지요. 근대 법체계도 이런 류의 인간을 기반으로 한 인권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고요.

그러나  무국적자 난민은 인간이지만 인권을 보장받지는 못합니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자연권 이념 대로라면 그는 비-시민이라고 할지라도 인권을 보장받아야 하잖아요. 왜 인권이라는 토대에 기반한 법체계를 가진 국가들은 비-시민의 인권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태는 인간이 인권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고, 도리어 특정 정치체에 속할 때만이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건 아닌지 물음을 던지게 합니다. 18년간 무국적자로 살았던 아렌트 같은 경우 이 역설적인 상황을 직접 체감하기도 했고요.

- 소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의 비-시민 소수자 문제에 이 무국적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광범위하게 적용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다만 소수자들이 놓인 처지는 모두 다릅니다. 여성, 성소수자 같은 경우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지요. 하지만 제가 강의 때 유독 난민들(혹은 수용시설에 갇힌 장애인들)에 집중한 것은 그들이야말로 아렌트가 묘사한 '쓸모없는 이'에 가장 유사한 조건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억압할 필요조차 없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은 처지에 놓이게 될 이들의 조건에 대해 여러분께서도 생각해 보시길 바라면서 말이지요~

-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인권 말인데요~ 유대인들은 그 민족으로 구성된 국민국가가 따로 없었지요. 그리고 다음 수업에서 조금 다룰 것이지만, 그들은 그러한 조건 속에서 자신이 거주하던 국가, 예컨대 체코, 독일, 프랑스 등으로부터 추방되거나 온전한 체코국민, 독일국민, 프랑스 국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언제든지 '단지 인간일 뿐 아무것도 아닌' 지구의 쓰레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나라의 온전한 국민이 되기 위해 유대인성을 버릴 것을 요청받기도 했으며, 양차대전 사이에는 대량으로 무국적자가 되어 버렸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만들어졌네요? 그리고 그 국가의 영토에서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는 이제 국민이 되었기에, 인권을 국가로부터 보장받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아렌트는 유대인 주도의 이스라엘 국가 설립에 강력하게 반대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낳을 또 다른 난민들(팔레스타인인)의 문제를 걱정하며, 유대인 주도의 이스라엘 건국을 주장하던 시오니스트들과 내내 대립하지요. 그런데 아렌트 본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던게 있었습니다. 소속된 국가없이 유럽을 떠돌던 지구의 쓰레기들도 이스라엘 '국민'이 되니 어쨌거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긴 했다는 거예요.

- 아렌트가 추구하는 정치체 같은 경우 저희가 앞으로 더 다룰 날이 많을 것입니다~다만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는 그것이 잘 안드러난다는 것 뿐이고요.

- 마지막 부분에서 참 논의해 볼 문제가 많은데요. 이런 주제로 강의를 하다보니 인권 자체가 무의미하고 참 허약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인권'을 외치지 않았다면, '스스로가 인간(추상적인 인간 포함)임'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몫없는 자들이 스스로의 몫을 쟁취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저는 한편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인권의 허약성만큼이나 자연권 이념이 발휘해온 긍정적 힘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 힘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건 무엇일지 저도 항상 개인적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해 인권을 통틀어 말하는 것보다, 구체적 권리'들' 중 하나하나에 천착하는게 더 현실적이고 의미있는 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자연권적 구호가 진보적 인권운동 진영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고 또 그것이 수많은 성과를 내고 있지만, 인권을 만들어온 것은 사실 '그들이 타고난 권리'가 아니라, '그들의 행위' 때문이었다는 사실까지 염두에 두면서 말이지요. 이것이 아렌트의 인권론이 급진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고, 또 실은 진보적 인권운동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절실히 체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아렌트 입장에서 인권은 인간이라고 해서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파리아들이 권력을 구성해서 싸우고 요구하고 타인들과 약속을 할 때 비로소 보장됩니다. 실제로 비-시민들이 시민으로서 세계에 들어오는 것은 대부분 이 과정을 거쳐 오기도 했고요.

- 지적하신 젠더 문제같은 경우 좀 논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젠더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던 아렌트 입장에서 말씀드리기는 더 힘들고요.. 다만 저는 트랜스젠더 같은 경우 성별이분법에 단순히 포함되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렌트를 젠더 문제에 가져와서 해석하는 연구들(요즘 참 많은 듯 한데 제가 아렌트 관련 연구 중 제일 잘 모르는 분야입니다) 도 그렇게 해석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은 드네요. 파리아로서 싸우기에 대해 저희 모두 더 고민해보고, 민감한 주제일 수 있는 만큼 다음 수업 뒷풀이 때 얼굴보고 더 논의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올리비아님의 댓글

올리비아

너무나도 좋은 강좌, 좋은 후기, 좋은 댓글까지 ~~
(개인적으로 강좌 후기쓰기가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1인)

정치에 그닥 관심이 없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 삶이 정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강의를 들으니 더욱더 와닿습니다.
"혁명을 좋아하지만 영구 운동론이나 영구 혁명론을 믿지 않습니다. " 많이 고민되는 부분입니다.
안전을 추구하지만 기존 체제에 문제점들은 많고 혁명으로 바뀐다 해도 새로운 체제가 100%문제가 없을린 없조.
그러나 .. .. 안전이.......ㅋㅋㅋㅋ 기존 체제에 순응한 안전은 스트레스고, 혁명은 피곤합니다~
어찌 살아야 하는지 . ㅋ ^^;;;;;;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지난 강좌 '인권의 역설'에 따르면, 인간이니까 당연하게 주어진 권리로 간주되는 '인권'은
특정한 정치체에 속할 때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인권이란 시민권이 없는 무국적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권리라는 것이지요.

이와 유사하게, 소수자들(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역시 인간이지만 인권의 바깥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무국적자는 인권의 여러 범주 가운데서도 시민권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특이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역시 언제든지 시민인 채로 시민권의 바깥으로 튕겨져나갈수 있다는 점에서,
성소수자나 장애인에 비해 무국적자가 우리와 보다 가까운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에게는 이번 [한나 아렌트] 강의가 소수자 - 무국적자를 공부하는 특별한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소리반장의 후기와 정창조선생님의 꼼꼼한 코멘트, 모두 유용하게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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