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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고원] 1025_3강 말과 사물_후기 +4
준민 / 2017-10-29 / 조회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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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말과 사물 :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선생님의 강의를 꼼꼼하게 정리한 후기를 쓰고 싶었지만 능력 부족으로… 실패하고 책을 다시 들춰봤지만 역시 수업을 듣고 나서 다시 읽어봐도 너무 어렵네요. 선생님의 강의에선 이해되던 게 책으로만 가면 다시 무슨 말인지… 허허

 

제가 첫 번째로 읽은 들뢰즈의 책은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였습니다. 이어서 천의 고원을 읽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에 비해 몹시 부족합니다ㅜㅜ) 이번 강의인 “말과 사물: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는 제가 읽었던 첫 번째 책인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주를 이루던 ‘주관적 언어학’의 관점에서 보면 카프카는 말 그대로 비가시화된 인물입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소설까지 썼으니까요. 카프카의 소설은 엄청난 카오스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주관적 언어학’의 뿌리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소쉬르로 인해 탄생한 ‘객관적 언어학’은  언어의 체계, 분류, 구조를 규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언어학은 과학적이라고 주장했죠. 언어학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근대성 일반은 탈마법화를 통해 학문을 신화적 자장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구조화한다는 것은 틀 안에서 상하관계를 나누는 것이 되고, 구조화되지 못하는 것을 비가시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대화 도중 어려운 영어를 섞어 쓰는 상대를 만났을 때, 나 또한 나도 모르게 영어 사전을 뒤져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면, 언어 외적인 권력만이 그 대화를 주무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언어학 안에서 자체적으로 생긴 힘의 불균형이 그 대화를 주무르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필히 (다는 아니지만) 언어를 써야하는 문학은 정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문학은 언어를 사용해야하기 때문에 언어와 대립하고 언어를 분열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죠) 들뢰즈는 카프카의 소설 속에서 탈영토화의 지점들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재영토화 과정에서 재오이디푸스화 되는 것을 끊임없이 비판했습니다. 선생님은 “영토화가 선차적이라면 탈영토화는 의미가 없다.”고 하시며 재영토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효과적으로 탈주한 후 다시 정치화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최근에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읽었습니다. 찾아보니 그 소설에 대한 철학자들의 평도 많이 엇갈리더군요. 저 또한 바틀비를 저항적 주체로 봐야할지, 탈영토화에는 성공했으나 재영토화에 실패한 인물로 봐야할지 헷갈렸습니다. 또 이런 해석들과 별개로 바틀비라는 인물에게 또 다른 생명력을 주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술가에게도, 평론가에게도 무진장 섬세한 작업이겠지요. 눈 앞에 그 섬세함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한 것이구요...

 

몰적, 분자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은 언제나 사건적이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말을 100%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을 곱씹으며 이제 막 예술을 시작하려는 한량의 치기어린 후기를 (급하게) 마치겠습니다.

 

부족한 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수요일 저녁에 들은 강의내용이 거의 희미해져 가는 즈음, 세심한 후기를 읽으니
좋으면서도 곤혹스럽고, 이번 주 강의를 더 기대하게 되기도 하고 그렇네요. 잘 읽었습니다.
지난주 강의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아 후기 쓰기가 더 어려웠을 거예요.
혹시 강의내용이 마무리되었더라면,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혼란스러웠던 것처럼 더욱 고민에 빠져들게 되었을까요? ㅎㅎ
모든 언어는 권력관계 안에 있다는 말, 언어는 자연에 대한 폭력이라는 말과 함께
언표행위의 배치 역시 기계적 배치에 속한다는 말을 기억합시다.
모든 발화는 명령-어이며, 카프카는 그런 언어-기호의 폭력성을 알면서도 글을 씁니다.
바틀비의 저항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이상한 행위와 카프카의 글쓰기를 보며,
언어의 감옥 안에서 시작하는 문학이라는 행위에 대해 고민해보게 됩니다.

준민님이 지난 강의에서 되새겨준 몇 개의 문장을 기억하며, 이번 주 강의를 들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왕정수님의 댓글

왕정수

후기올려주셨네요.., 저도 어제 초안만 잡고 아직까지,,.ㅠㅠ
준민씨의 후기 잘 읽었습니다. 들뢰즈 사유가 준민씨의 예술가로서의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래봅니다..
저도 내일까지는 올려야겠네요...

연두님의 댓글

연두

준민씨 후기가 먼저 올라와 있는 걸 보고 바짝 긴장해서 제 후기도 마무리했습니다.
오늘까지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마워요.
워낙 내용이 어렵기도 하고, 3강 강의 내용이 끝나지 않아서
강의 녹음을 몇 번을 들어도 정리하기 참 쉽지 않더군요.

몰적, 분자적인 것의 구분은 언제나 사건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사건의 어떤 배치 속에서만 두 개의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듯해요.

희음님의 댓글

희음

오오오오, 필경사 바틀비,가 나오는 대목에서 눈의 번쩍 뜨입니다.
카프카 세미나에서, <단식광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바틀비와 광대가 어떤 지점이 서로 맞닿고 또 갈라지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답니다. 당연히 들뢰즈를 떠올리기도 했고요. 다음에 그에 관련해서 준민 님과 이야기 나눠 볼 수 있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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