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유한속에서 무한을 어떻게 느끼나요" (0712 후기) +7
유택
/ 2017-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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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2강 후기 - 7월12일 "유한속에서 무한을 어떻게 느끼나요"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도 평소와 같이 열강 해 주신 울 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방대하고, 알 듯 말 듯 그러나 여전히 잘 모르겠는! 강의내용을 요약은 도저히 못하겠고, 그냥 제가 수업 들으면서 느낀 점들을 나열해볼까 합니다. 강의안 다시 꼼꼼히 읽고 수업 분량의 텍스트 읽는 건 좀 쉬다가 혼자 천천히 하려고요. ^^;
2강 수업은 장자 내편에서 그 첫번째 ‘소요유’에 대한 해설과 이야기들로 진행 되었습니다. 자유라는 것 그리고 방랑, 방황, 그 끝없음… 기존의 인식체계로는 잡히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 하지만 그것이 삶과 시대를 관통하는 ‘절대적’ 진리는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것. ‘진리/진실’이라는 이름이 나를 인도하고 규정 내리게 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사력을 다해 반문해보겠다는 것. 진리를 그리고 진실은 힘들게 노력해서 다다라야 하는 그 무엇이거나 혹은 수풀을 파헤쳐서 어렵게 발견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자신이 새롭게 구성하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 혹은 <장자>식으로 말하자면 진리 혹은 진실은 우리의 언어로 말해질 수 없다는 것. ‘知者不言 言者不知 아는 사람은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라는 놀라운 말이 수업시간에 나왔습니다. 평소 책에서 뭐 좀 읽으면 줄 쳐놨다가 친구들에게 바로 적용해서 ‘질타/공격’용으로 쓰는 저의 에토스와는 전혀 다른 차원 혹은 정반대라서 무진장 충격적이었습니다.
진리/진실도 사실 그 시대와 역사의 맥락 속에서 파악 되어야 한다는 것. 프리즘 혹은 퍼스펙티브라는 말과 함께 말이죠. 그래서 저의 통념적 감각으로 파악되어 지는 것 그 이상을 (‘이상’ 혹은 ‘너머’라는 단어를 쓰려고 보니 뭔가 중심 혹은 베이스먼트가 있고 그 밖의 것들을 서열화하는 위계적인 느낌이 들어서 표현을 바꾸어야 할 것 같아요) 아니 그 ‘다름(difference)’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역량(새로운 감각을 신체에 새기는 것 장비처럼!)을 만드는 게 제 공부의 목적이 (어서 빨리) 되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자는 계속 질문을 합니다. 장자는 제가 바라는 도식화되고 명확한 답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리송한 질문의 형식과 이야기들을 통해 저의 실존을 묻게 만듭니다. 지금 이 순간 그 자체로서의 삶. 뭔가의 목적을 향해서 노력하고 획득하려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지금 나무 밑에 누워 있는 펄떡이는 실존으로써의 지금의 내 삶. 그래서 유한한 내 동물적 수명의 시간 속에서 무한을 느끼고(‘신성’까지 느껴야 하는 건가요? 그건 너무 어려워~~ㅠ) 온전히 내가 내 정신으로 내 삶을 살아 간다는 게 가능이나 할까 계속 질문하게 만듭니다.
앞으로 수업시간에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드디어 내가 나비인지 인간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며 백기를 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라는 주체는 원래 그때 그때 만들어지고 변동하고 유동하는 액체와 같은 것이니 어찌 보면 장자의 비유가 ‘딱이다 딱이야~’라며 호들갑스럽게 아는 척 너스레 떨어야 할까요. 푸코 같으면 ‘제발 니가 누구인지 골똘히 시간 들여 묻지 마시고 그냥 잘 실존하세요 잘 사시라구욧~’라고 할 것만 같습니다. <장자>를 계속 읽는 부류는, 뭔가 삶의 해답을 <장자>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 보다는 <장자>의 사유방식에 설명하긴 힘들지만 뭔가 멈출 수 없는 모호한 매력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하는 강사님의 언급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동물이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도덕/종교/통념/가치)에 의해 또 사람은 온전히 지배당하기도 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하던데요. 그래서 수업시간에 ‘본성’의 장자적 의미 그리고 반복되는 행위를 우리가 본성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닐까 반복되는 행위를 제거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써 편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아리송한 말도 나왔습니다. 같은 사물을 바라봐도 누구는 ‘쓸모없다’라고 생각하고 누구는 ‘쓸모 있다’라고 생각한 후 다르게 사용하기도 합니다. 중국 공산혁명의 시대에 장자의 이야기는 패배주의, 루저의 이야기 그래서 반혁명적인 이야기로 치부되었다가 또 시대가 바뀌면서 그 평가도 달라집니다.
‘아지랑이와 티끌이 날라 다니는 세상, 이 미약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구만리 창천을 바라보면 무엇이 보일까?’라는 장자의 말이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야밤 남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수많은 서울 시가지의 불빛들, 그 불빛들 아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터져 나오기 직전의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연들, 이야기들, 눈물들 그리고 삶들, 그것을 주파하며 관통하는 언어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처음 접하는 <장자>에 대한 이야기들에 흠씬 온 몸 적시며, 이 즐거운 혼돈 속에서, 이 시간을, 이 순간을, 이 유한을 원껏 느끼고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저녁이었습니다. 후기 이상입니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우와 푸코와 유택의 실존으로 버무려진 맛깔나는 후기네요.
장자의 이야기는 쉬운 듯 어렵고, 가벼운 듯 무겁다고 느껴지는 점이 많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리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여러 가지로 곱씹어보고 생각이 다르게 뻗어가는 걸 느꼈어요.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는 것이라는 강사님 이야기도 여러 가지로 울림을 주었지요.
저 스스로는 요즘, 철학이라는 것의 속성이 바로 이 감각의 문제가 아닐까, 의심을 넘어 확신이 들기도 합니다.
자신 안의 통념을 굳건하게 두고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는 지식을 더 소유하려고 하는 게 결코 철학이 아니라는 거지요.
오히려 세계의 구조보다도 굳건한 자기 안의 통념을 흔들고, 부수고, 허물고, 지식을 섬세한 감각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철학이 내 삶과 맞닿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 맞닿음이 조금씩 드러나는 후기, 잘 읽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자주 소환되는 니체와 루쉰에 대한 이야기들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아Q정전 속에 등장하는 혁명은 신해혁명, 청 왕조의 멸망과 관련한 혁명인데, 강사님이 요즘 루쉰에 대한 다른 해석들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지요. 시간이 없어 질문을 못 했는데, 강사님이 거기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신다면 무척 감사하겠어요!
선우님의 댓글
선우
삼월 말에 완전 동감~^^
자신의 자아를 더 굳건히 하기 위한 책읽기는 아무 소용 없잖아요.
나이가 든다는게 더 완고하게 고집 세지는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또 한편, 정말 아닌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 감각도 생기게 하는거 같아요.
그래서 여유도 생기고, 시간 속에서 사람 보는 눈도 생기고, 어떤 일에 너무 조급하게 반응하지 않게도 하고...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아Q 생명의 여섯 순간>에서 옮깁니다.
70쪽.
대다수 비평가는 논의의 중심을 아Q의 정신승리법 총결에 두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나는 분석의 초점을 정신승리법의 우연한 효력 상실에 두고, 아Q의 인생과 거의 성격.운명에 내재된 여섯 가지 주요 순간을 중점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152-154쪽.
곧바로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반성하도록 길을 열어주려면 그 계기가 어디에 존재해야 하는가? 그 계기는 바로 정신승리법이 효력을 상실하는 순간에 존재한다. 바로 그 순간 '순환'이 '중복'으로 바뀐다. 행동의 의의는 이제 더는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상황과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루쉰이 탐색한 것은 바로 영원한 효력 상실의 가능성이었고, 또한 '중복'의 중복 불가능성을 드러내어 '순환'의 환각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중복'의 중복 불가성은 현실관계가 활짝 열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가능성은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아Q의 생명에 내재하는 것이다. '접신승리법'이 효력을 잃는 순간 아Q는 기존의 '자아'를 잃고 자신과 주의 세계의 순환관계를 더는 재건할 수 없게 된다. 이로써 모든 안전감을 잃어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공포심에 사로잡혀 오직 본능에 따라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 중략 ...
아Q의 역사는 기존 질서의 역사다. 다만 그처럼 우연한 '비역사적' 순간만이 아Q 자신의 역사에 속한다. '비역사적' 순간은 '순환'의 종결이고, 그것의 중복 출현은 역사의 변천을 나타낸다. 이러한 몇몇 순간은 전면적으로, 그러나 자각적이지는 않게 세계 자체를 드러낸다. 또한 그 순간들은 '비역사적'이기 때문에 일단 그것이 역사로 전개되면 어떤 하나의 '발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과거의 연속이 아니라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혁명의 정치는 반드시 '무'에서 탄생한다. 그것은 마치 아Q의 혁명도 반드시 '무'에서 탄생하는 것과 같다.
아Q는 그 '역사적' 순환의 순간에서 이탈함으로써 비로소 한 명의 정치적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아Q에 대해서 말하면 '역사적 순환'에서 이탈한 것은 '의식의 중단' 혹은 '본능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적 인간'은 결코 '역사'나 '의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비역사'에서 오거나 '역사(의식)'와의 단절에서 온다. 신해혁명과 마찬가지로 아Q의 혁명도 두 가지 혁명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역사 내부의 혁명이다. 이 혁명 과정에서 아Q는 구태의연한 행동방식을 따르며 혁명을 상상하면서 모든 구질서를 회복한다. 그는 결국 구질서 회복인 혁명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다른 하나는 아직 은폐되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혁명이다. 그것은 대부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아Q의 모호한 본능과 직감 속에 존재한다. 구질서의 회복으로 억압된 혁명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비역사적'이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위 <아Q 생명의 여섯 순간>의 저자 왕후이는 <아Q 정전>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루쉰이 아Q를 통해 '무', '역사 혹은 의식의 단절'을 드러내었다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루쉰이 생각한 근본적 혁명과 닿아 있다는 점이라는 이야기인데요, 나름 새로운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미루어 나가면 '정신승리법'이 한계가 있겠지만, 그 정신승리법이 효력을 상실하는 순간, 그 찰나적 순간이야 말로 새로운 것이 깃드는 순간이기에, 아Q야 말로 혁명의 틈을 경험한 인물이라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선우님의 댓글
선우
와~ 멋지다 유택!! (언제 또 장자에 가 있는겨?ㅋㅋㅋ)
초반부는 푸코 얘기랑 똑같네요. 장자도 그렇게 얘기했다는 거죠?
푸코는 자신이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서양 사유의 전통을 '초월에 대한 복종'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초월의 형식을 '진리'라고 보았고요.
다름,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는 역량, 아 이 얘기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나오겠죠? ㅎㅎ
아침부터 푸코와 들뢰즈, 장자, 유택의 목소리 한꺼번에 다 듣고 갑니다.~~
허당님의 댓글
허당
장자! 2강 후기
21세기에 장자를 공부한다?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 장자를 공부한다?
왜?
떠나라!
장자는 나를 떠나게 한다.
터잡고 기생하는 나에게
자꾸 등 떠민다!
떠나보라고!
넓은 세상 경험해보라고!
직면해라!
낯섦과 마주치라고 용기를 준다.
집 떠나면 고생인데,
그래도 나가란다.
훌쩍 떠나 떠난 자리
돌아보란다.
뭣이 중헌디!
뮛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디도 모르면서.
장자의 퍼스펙티브!
고정관념을 뒤집고 통념을 뒤집는다.
장자에 대한 해박한 지식.
풍부한 비유.
분명한 어조.
선생님 잘 배우고
있습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꼼꼼한 후기 감사드려요.
읽다보니 저도 고민할 거리가 마구 생각나는군요. ^0^;;;
여러 개념을 장자의 표현으로 바꾸면 생각이 더 또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무한無限'이라는 말이 장자에는 좀 낯설게 느껴지는 게 있어요. 장자 주석 가운데 비슷한 표현으로 '명막무애溟漠無涯'라는 표현이 있기는 합니다. '아득하여 끝없고 가 없음'이라 하겠는데... 사실 그보다는 무궁無窮이라는 표현이 장자에는 많이 쓰입니다. '무한'보다 '무궁'이 낫지 않을가 생각하는 것은 무한은 한계를 상상하고 그를 지워버린다면, 그렇기 때문에 늘 한계가 잠재적으로 그어진다면, 무궁은 말 그대로 '다함 없음'이어서 더 광대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수학적으로 '무한수'라는 것을 이야기하나 '무궁수'라는 건 이야기하지 않지요.
그리고 '절대絶對'라는 표현보다 '무대無待'라는 표현이 장자에 어울리는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문득 '절대'가 번역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여튼 장자의 입장에서는 무엇과 상대되지 않는 독립된 무엇을 이야기하긴 합니다. 이를 독립무대獨立無待라 쓸 수 있을 텐데, 이것이 과연 '절대'에 상응하는 개념인지 의문이 드네요.
후기를 보고 생각나는 것을 마구 적어 보았어요. 더 고민하고 생각할 주제는 다음으로 미루고 ^0^;;;
곧 <제물론>으로 찾아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