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의 질서] 1강 후기 :: 0707_1강 시작하면서 +4
아라차
/ 2018-07-07
/ 조회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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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담론의 질서] 강독_0707 강좌 후기_아라차
‘강독’에 대한 ‘조건화된’ 경험 때문인지, 한시(漢詩)가 해석되어 어떤 의미로 다가오듯이, 이 난해한 번역문이 하나의 의미가 되어 저에게 다가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또 하나의 난해한 단어들이 되어, 붕붕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 단어들을 붙잡아 후기를 써 보고자 합니다.
푸코는 당대의 석학들 앞에서 취임강연을 시작합니다. 아마도 원고를 준비해 와서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푸코는 “말을 하기 보다는, 모든 가능한 시작 너머로 옮겨지고 싶다”고 합니다. 여기서 ‘시작’이라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봐야 합니다. 아마도 당대 석학들이 모두 인지하고 있을 어떤 철학적 사건이나 변화(=보편성의 파괴)같은 것이겠지요. 푸코는 “말하는 그 순간, 이미 어떤 목소리가 오래전부터 존재했음을 알게 됐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시작하지 않아도), 보편성이 파괴된 어떤 틈에 이미 존재했으면 하는 것이죠. 그랬다면, 이렇게 담론의 스피커가 되는 대신에 하나의 얇은 틈,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 수도 있었을 담론이 사라지는 지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푸코는 본인의 뒤 쪽에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계속해야 한다, 나는 계속할 수가 없다, 계속해야 한다, 단어들이 존재하는 한 단어들을 말해야 한다, 단어들이 나를 찾아낼 때까지 단어들을 말해야 한다, 낯선 고통, 낯선 잘못이지만, 계속해야 한다, 아마도 그 일은 이미 일어났고, 아마도 단어들은 이미 내게 말을 했으며, 나를 아마도 내 이야기의 문턱까지, 내 이야기 위로 열리는 문 앞으로 데려갔겠지만, 그래도 문이 열린다면 나는 놀랄 것이다.” (이쯤에서 구조주의-이중의 사유를 쌤이 말씀하셨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도 계속해서 보편의 틀을 깨는 단어들이 이미 내게 말을 걸고 있으며, 그 말들이 어떤 문을 열게 해 줄 것이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푸코는 많은 사람들에게 “담론의 건너편에 존재하는 자기를 보고 싶어 하는 어떤 비슷한 욕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도는 이 욕망에 대해 아이러니한 형식으로 답을 합니다. 그것은 보편성을 깨거나 변화하는 것을 “위엄에 찬 것으로” 무게감을 주거나, “침묵과 주의의 원환으로 둘러싸” 무시해버리거나, “의례화된 형식을 부과”하며 조롱(?)하는 것입니다. 기존 시스템의 연속인 것처럼 당사자들이 믿게 해 주는 그 무엇인가가 이미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죠.
그래서 욕망은 ‘시작’하고 싶지 않아합니다. “나는 나 자신이 담론의 이 우연한 질서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단호하고도 결정적인 그것 안에서 담론의 질서와 엮이고 싶지 않다.” ‘우연’은 ‘위험’하고 ‘불안정’하니, 욕망은 “그 질서 안에서, 그 질서에 의해, 난파선의 행복한 잔해처럼 그저 실려 가기만”을 희망합니다.
제도가 또 답합니다. “너는 시작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가 네게 담론이 법의 질서에 속한다는 것, 우리가 오래 전부터 담론의 출현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담론에 영광을 주지만 담론을 무장 해제시키는 어떤 자리를 담론에 마련해두었다는 것, 그리고, 만약 담론이 어떤 권력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로부터, 담론은 오직 우리로부터만 권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 있다.”
제도의 대답은 아주 교묘합니다. 담론은 법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에 새로운 담론이 나와도 그 담론의 연속선상이거나 그 담론의 다른 형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해방시키는 담론이 다시 우리를 지배합니다. 보편성이란 “어떤 특정 시간대의, 특정 사람들의, 특정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권력일 뿐”인데도, 그것이 법이고 진리인 것처럼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정상인데도 지배적 정상이 다른 정상들을 비정상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자기하고 다른 질서를 무질서라고 이름 붙여놓았습니다. 정상담론의 탈을 쓴 이 특정 담론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질서와 정상을 안 지키면 됩니다. 그럼 세상이 무너질 것 같죠? 그럼 무너지면 됩니다.(Feat. 허경)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처럼, 5번의 불안이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결국 욕망이든, 제도든 ‘불안’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삶에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면 아무도 변화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을 하고, 나는 ‘시작’합니다. 욕망과 제도는 자꾸 ‘위험’과 ‘불안’에 대해 말하는데, 도대체 그 조건화된 욕망은 누구의 것이고, 그 아이러니한 제도는 어떤 권력의 하수인일까요? 위협은 어디에 있으며, 존재하기라도 하는 걸까요?
쌤의 단어들과 저의 단어들이 섞어서, 질서를 벗어나 후지산으로 간 후기였습니다.
다음 번에는 <담론의 질서> 강독이 어디 산으로 흘러갈지 궁금하네요.
"철학은 수사학이 아니라 정확성"이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게 뭥미? 격의 후기여요.
암튼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다음 주에 예정된 일이 많아서 일찍 후기를 남깁니다.
다음 당번인 분들은 (화)요일까지 후기 남겨주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네요. 모두 편안한 한 주 되십시요!
삼월님의 댓글
삼월
시작하면서.
본문은 짧았지만, 제도와 욕망과, 그럼에도 (시작을 무력화하려는 제도에 맞서) 시작하려는 기운이 아우성치는 첫 시간이었네요.
후기를 시작하는 아라차님에게도 그랬겠지요.
아아, (이미 파괴되어 기능을 상실했지만 어떤 고통도 감지하지 못하는) '난파선의 행복한 잔해처럼 그저 실려가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기분이 드는 그런 일요일 아침에 아라차님의 후기를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라차님의 목소리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목소리에 감사합니다.
불안과 위험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은 왜 이다지도 불안하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걸까요?
결국은 이 모두가 내가 얼마나 우연히 형성되어 우연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아는 시간이 되리라 다시 불안 속에서 짐작해봅니다.
그리고 다시 두려움과 기대 속에서 다음 시간을 기다리게 됩니다.
도통 내가 수긍하거나 사랑할 수 없는 다른 질서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가끔 이야기가 산으로 가서 산삼을 캐거나, 광맥을 만나기도 하듯
맡아놓은 짐보따리를 넘겨주듯 후기를 남기다 보면
무언가 발견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후기를 쓰려고 노력해요.
(그러니 우리 회원님들도 후기를 열심히;;;)
그리고 삼월 님의 후기와 댓글은 옆으로 새지 않고도 언제나 산삼이고 광맥이기 때문에
열심히 읽고 또 힘을 받습니다.
'시작하면서'가 '시작'하려는 기운이 아우성치고 있는 글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네요.
엄청난 '수사'를 사용해 '정확'하게 짚어주시는 내공..!
덕분에 "도통 내가 수긍하거나 사랑할 수 없는 다른 질서들의 존재"에 대해
또 한번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너울님의 댓글
너울
새로운 담론이 나와도 법의 질서 속에서 다시 제도로 구속되고ᆢ
이 절망감은 떨쳐낼 수 없는것일까요? "그럼 세상이 무너질것 같죠ㅡ? 그럼 무너지면됩니다"..풉^^ 동영상인줄~ 법과 질서를 파괴하고 정상담론을 무너뜨리고 싶은 파괴 욕구도 생기네요ᆢ행복한 잔해로 살아온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