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강좌 > 강좌에세이
  • 강좌에세이
  • 강좌에세이 게시판입니다. 좋은 공부는 에세이로 생성됩니다.
강좌에세이

[호모 히스토리쿠스] 과제 +2
토라진 / 2017-02-20 / 조회 2,297 

첨부파일

본문

1.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오항녕 선생님의 <호모 히스토리쿠스>강의의 첫 번째 과제는 첫 수업의 내용을 정리하고 3주 후에 첫 수업을 떠올리며 다시 기록하는 것이었다. 나는 첫 수업 후 일주일이 지나서 강의 내용을 써 보았다. 이미 그때는 많은 기억들이 휘발되어 있었다. 필기했던 노트와 책을 보면서 복기하듯 글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2주 후, 첫 수업의 내용을 다시 써서 내는 날이었다. 수업 전 나는 연구실 컴퓨터에 앉아 기억을 짜내고 그동안에 내가 생각해왔던 것들을 덧붙여 글을 썼다. 하지만 써놓았던 원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아마도 내 실수였겠지만) 컴퓨터 파일을 아무리 뒤져도 어디로, 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낭패였다. 기억은 다시 희미해지고, 기록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세 번째로 기억을 되살려야 했다. 어찌되었든 과제를 내야 했으니말이다. 책을 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을 뿐 아니라,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가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 보고 싶었다. 다시 써내려간 글은 사실보다는 관심과 해석 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다. 물론 망각 속으로 발을 헛딛고 희미한 기억 속을 헤매야 했던 것은 당연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이라는 정의처럼, 내 글은 망각과 기억이 빚어내는 부끄러운 역사가 되어 있었다. 또한 오항녕 선생님의 말씀처럼, 내 글 속에서서의 ‘기억은 꺼내 오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된 것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첫 번째 기억]

 

첫 번째 질문 - '사건이란, 사실이란' 무엇인가?

재밌는 이야기는 왜곡된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사건(사실)에는 ‘조건, 의지, 우연’ 이 세가지가 모두 들어있는데, 이것을 놓치면 역사가 왜곡된다. 비중은 다르지만 이 세 가지 모두가  들어있다. 한 가지에 너무 치중하게 되면 사실은 왜곡된다. 모든 사건은 유니크하다. 그러나  ‘조건, 의지, 우연’이 전제되지 않는 사건은 없다.  
- 조건은 구조의 문제이다. 환원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 
- 의지는 목적론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 
- 우연은 불가지론이나 상대주의로 빠질 수 있다.  

 

두 번째 질문 – ‘우연’이란 무엇일까?

사건을 만났을 때 흔히 사람들은 우연의 문제로 원인을 분석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워털루 전쟁’이다. 실각 후 반전을 노리던 나폴레옹은 전투하려는 날 내린 비 때문에 패퇴했다. 하지만 우연히 내린 비가 나폴레옹을 물러나게 했던 모든 원인은 아니었다. 그 당시 이미 나폴레옹은 다시 일어설 조건이 되지 못했을 뿐더러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촉발하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우연’이란 다른 의지를 가진 계기, 사건이 필연의 영역을 벗어나 생겨나지 않는다. (콩 심은 데 팥은 나지 않는다) ‘우연’이란 서로 목적이 다른 두 개 이상의 행위가 만나거나 서로 목적이 같은 두 개 이상의 행위(사실)이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세 번째 질문 – '역사를 견딘다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5월의 마중>에서처럼 반복되는 사건들은 우리에게 매번 새로운 시간을 가져다준다. 반복 속에서의 새로운 조건, 의지, 우연을 찾아내며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역사를 인식하는 것, 그 출발점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조건, 의지, 우연’의 문제를 판단하는 식견이 필요하다. 조건의 문제를 의지의 문제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과제를 잃고, 세 번째로 건져 올린 기억]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그런가? 과연? 어디에서 읽었나?”
“라그랑주입니다. 파크리크 나그랑주. 프랑스인입니다.”

 

위 구절은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나온다. (‘라그랑주’는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라그랑주’의 역사의 대한 해석은 오랫동안 나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기억과 기록이 인간의 욕망과 의지와의 관계를 통해 어떻게 역사로 조립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첫 수업 때 사건을 조건, 의지, 우연의 문제로 분석하는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왜 이 구절을 떠올렸을까? 그것은 최대한 ‘부정확한 기억’이 되지 않기 위해서, 거짓이 아니라 사실로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조건, 의지, 우연’을 면밀히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건과 사실, 그리고 역사에 대해 상념이 일게 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우연'이란 서로 목적이 다른 두 개 이상의 행위가 만나거나 서로 목적이 같은 두 개 이상의 행위(사실)이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조건, 의지, 우연’ 세 가지 중에서 가자 흥미로웠던 것은 ‘우연’이다. 조건과 의지는 역사를 설명할 때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요소이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연은 어떨까? 우연은 조건, 의지의 표면 아래로 흐르는 무의식 같은 것은 아닐까? 무의식은 주체의 의지와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주체와 떨어져서 움직이지 않는다. 주체가 처해 있는 시공간이나 상황과 무관하지도 않다. 우연은 어쩌면 ‘사건’이라는 주체에 감추어진 욕망인 것은 아닐까?

사실과 해석 : “왜 다를까?”로부터 시작하는 질문

사건은 끊임없이 벌어진다. 하지만 사건은 ‘조건 의지, 우연’ 중 한쪽으로 기울어진 해석으로 왜곡되어 받아들여지거나 명확한 ‘사실’의 규명 없이 뭉뚱그려져 흘러가버린다. 첫 강의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러한 문제들을 분명하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늘 부정확한 기억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사실’을 정확하게 바라보려고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견디는’ 방식이자 인간이 역사 속에서 숭고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2. 인간의 조건 : 살아남은 자의 기록

 <호모 히스토리쿠스> 강의를 들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1980년 미국 에너지부가 주관한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인접 학문 학자와 실무자들은 방사능 폐기물 매립 지역에 대한 정보를 1만년 뒤의 후손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줄 것인가를 연구했다. 여기서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매립지 자체의 위치와 그 위험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1만년 뒤에 방사능을 알리는 기호들의 의미가 후세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후세의 사람들이 기호들을 읽을 수 있기 위해서는 현재의 끊임없는 기록이 지속되어야 한다. 아카이브와 여러 기록 문서들, 영화 등의 기록 등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후세에 현재를 알리는 것은 역사의 의미이기도 할 것이며 오늘을 살아있는 자들의 의지이자 의무일 것이다. 

 

그런데 기록에 대한 이러한 의지와 의무는 가장 극한 상황, 죽음이 되는 조건 속에서 더욱 절박해진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제 오늘 하루는 끝이 났고 곧 잊혀진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하루가 아니며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있지 않으리라. 우리는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것을 안다.······그렇지만 내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기억이란 희한한 도구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아주 오래전 내 친구가 내게 써줬던 시 두 구절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  
           어느 날, ‘내일’이라고 말하는 게
           아무 의미를 갖지 않을 때까지.

 

 이곳이 바로 그렇다. 수용소이 은어들 중 결코 사용하지 않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내일 아침’이다.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오늘은 순간순간이 긴 역사이다. 과거가 되어 버리는 순간순간을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는 살아남았다는 안도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 사이에서 싹튼다. 그리고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은 그들의 기억과 이야기들을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부채감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역사를 실감하는 것이 자신의 일기 정도뿐인 우리들은 어떠할까? 사실 아우슈비츠라는 극한 상황이 아닐 뿐이지, 우리 역시 내일의 운명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우리의 ‘오늘’은 아우슈비츠의 ‘오늘’과 다르지 않다. 다만 절박함의 무게가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인 것은 아닐까? 우리가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과거를 탐험하는 한가로운 여행이 아니라 현재의 복잡하고 난해하게 얽힌 굴레들을 헤치고 삶의 의미를 명확히 들여다보는 실천과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가  역사가 되는 것은 역시 이러한 실천과 행동 속에서일 것이다.   

한 달 넘게 강의를 들으면서 <호모 히스토리쿠스>로서의 ‘나’와 ‘우리’, 그리고 오늘을 생각하게 되었던 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열성적인 강의와 학자로서의 깊은 자부심을 보여주셨던 오항녕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댓글목록

여하님의 댓글

여하

내가 잘 살고 있나 궁금할 때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고 싶은가, 묻습니다. 그래서 레비의 내일이 가슴아팠습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댓글의 댓글

이유 없이 잠 드는 게 힘든 날, 그 날 몫의  시간이 어디에 고여있는지 두리번거리곤 합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고 싶은가?' 하는 질문은 두리번거리고 더듬거리는 와중에 길을 찾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강의를 함께 하지 못해 아쉬었습니다..
담에 기회가 된다면 '완전출석' 하겠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강좌에세이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