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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사료연습] 사도세자 사건을 구성하는 조건-의지-우연 +2
오라클 / 2017-02-19 / 조회 2,925 

본문

사도세자 사건을 구성하는 객관적 조건, 주체의 의지, 우연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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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건에는 조건ㆍ의지ㆍ우연이 함께 들어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왕조의 가장 참혹한 사건 중에 하나이다. 한 나라의 왕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던 엽기적인 사건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도세자 사건을 규정했던 객관적 조건은 무엇이며, 주체의 의지는 어떻게 작용했으며, 우연은 어디서 개입했나?

 

하나의 사건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는 동일하게 일어날 수 없다. 사건이 발생하는 현장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사건을 공통적으로 구성한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든, 무엇이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은 '지금-여기'에 생성되고 있는 사건에 참여하고 있다. 그 전부가 함께 협조함으로써 ‘지금-여기’ 사건이 펼쳐지도록 추동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었던 1762년(영조 38) 윤5월 21일, 창덕궁 뜰 거기 역사적 현장에는 무엇이 ‘함께 존재’했던가? 그날 뜰을 비추던 무심한 햇살과 음험한 공기, 스쳐지나던 바람, 그리고 돌멩이 하나 까지 그 사건에 가담하고 공모했으리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죽었던 임오화변은 영조 38년 윤5월 13일부터 21일까지 일어났다. 영조실록은 '그날들'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불러왔던 직접적 계기는 20여일 전에 제기된 나경언의 고변이었다. 그는 세자의 비리를 영조에게 고변했다가 무고 혐의로 참형에 처해졌는데, 그러나 그 고변으로 영조는 세자의 비리를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다. 그후 영조의 분노와 고민은 더욱 깊어져 건명문에서 밤을 지새면서 새벽에 영의정과 우의정을 입궐케 했다. 신하들은 “요즘 세자께서 매우 뉘우치고 있다”고 감쌌지만, 영조는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여망(餘望: 남은 희망)이 전혀 없다”고 개탄했다(윤5월 1일). 한편 영조는 신하들에게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겠는가? 지금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 때문에 부당(父黨)ㆍ자당(子黨)이 생겼으니, 조정의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고 말했다(윤5월 6일). 이 발언은 임오화변의 원인이 정치적 문제에 있었다는 중요한 근거로 거론된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13일 ::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실록에는 ‘뒤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扣頭]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 세손(世孫)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映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21일 :: 사도 세자가 훙서하다. 왕세자의 호를 회복하다 

사도 세자(思悼世子)가 훙서(薨逝)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 세자(思悼世子)라 한다. 

 

사도세자 사건을 구성하는 객관적 조건과 주체의 의지

 

역사적 사건을 구성하는 조건, 의지, 우연 가운데, 사도세자의 사건은 객관적 조건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었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해석하는 방식에는 정치세력 간의 당쟁으로 희생된 사도세자로 보는 ‘당쟁희생설’ 혹은 비정한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은 불쌍한 사도세자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부자불화설’이 있다. 이 역시 사건에 포함된 하나의 요소일 것이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세습왕정이라는 구조’였다.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준 사람이 다름아닌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이었다. 그런 만큼, 사도세자의 비행과 광증은 심각한 것이었고, 세자가 죽기 10년 전부터 영조는 거의 세자를 포기한 상태였다. 일찍부터 사도세자의 정신불안과 의대증(아무 옷이나 입지 못하는 병)은 폭력성으로 나타나, 세자는 10여세 이후 장성하기 전부터 살인을 저질렀다. 생모 선희궁의 고변에 따르면, 내관과 나인 100여명을 죽였고 불에 달궈지지는 악행을 가했다. 이러한 폭력성은 사랑하던 후궁 빙애, 아내인 혜경궁, 생모 선희궁, 간난 아기 왕자 은전군에까지 확대된다. 

 

이렇게 미친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조는 “비록 미쳤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처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한탄하고, 마침내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희망이 전혀 없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제 남은 것은 미친 세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처분의 방법’이었다. 

 

왕조가 아닌 보통의 가족관계였다면 달리 처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자는 왕위를 이어야 할 존재였고 살려둘 수는 없는 문제였다. 살려두면 혼군(昏君)이 될 것이 뻔한 미친 세자에 대해, 영조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달리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세손이 왕위를 잇는 경우,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일 수 밖에 없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규정하는 객관적 조건이 왕정이라는 구조였음을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뒤주’라는 물건이다. [영조실록]에는 ‘뒤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안에다 엄중히 가두었다(自內嚴囚)”고만 기록되어 있고, ‘뒤주’라는 표현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나오는 것이며, 그 뒤의 [정조실록]에도 ‘한 물건(一物)’이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사도세자의 ‘뒤주’는 실록에서조차 정면으로 보기 힘들었던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해서 사도세자는 ‘사약이나 참형’이 아닌 ‘뒤주’의 방식으로 죽음에 이르렀는가?

무엇보다 왕조가 아니었다면 사약이나 참형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왕위에 오를 세손을 생각한다면, 그의 아버지에게 누가 사약을 들고 갈 것이며, 누가 칼을 들 것인가? 특정인이 개입이 없이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방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이는 특정인’이 아니라, 사도세자를 ‘죽게 할 물건’으로 뒤주를 선택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세습왕정이라는 구조가 아니면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왕조라는 구조가 사도세자 사건을 규정하는 객관적 조건이라면, 왕조를 지키고자 했던 영조의 결단은 이러한 조건을 실행하는 주체의 의지를 구성한다. 객관적 구조는 인간의 의지와 대립적이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주체의 의지는 객관적 조건 속에서 작동하는 실천적 행위이다.

 

사도세자 사건에 참여하는 구조적 필연과 우연적 요소

 

이렇게 사도세자의 죽음은 왕정이라는 ‘객관적 조건’과 왕조를 지키고자 하는 영조의 ‘주체적 의지’가 결합된 비극이었다. 한편 ‘왕정’이라는 객관적 조건은 우연적 요소와의 관계에서 구조적 필연을 구성한다. 즉 사도세자의 비극은 왕정이라는 ‘구조적 필연’과 여기에 개입된 ‘우연적 요소’의 결과물이었다. 

 

먼저, 장조가 세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왕위서열의 문제. 만약 효장세자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장조(사도세자)는 세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왕비였던 정성왕후나 생모에게서 다른 왕자가 있었다면, 장조는 계속 세자의 자리에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 왕위를 계승할 세자에 대한 영조의 기대와 거기에 미치지 못한 세자. 장조가 세자가 되지 않았다면, 아버지 영조의 기대가 그만큼 컸을 것인가? 영조의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았다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도세자의 광증이 그토록 심각했을까? 세자가 일찍이 정사政事에 관심이 크고 문文보다는 무武에 관심이 많았다면, 영조의 눈 밖에서 답답함과 무시와 조롱으로 시달렸을까?

 

또한, 영조의 장수 혹은 영조의 성정. 영조가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다면, 혹은 영조가 보다 온건하거나 유약한 인물이었다면? 사도세자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고 어쨌거나 왕위를 계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군이 되어 조선왕조를 광증으로 참혹하게 물들이고 자신마저 몰락의 길로 갔을 것이다!

 

“우연이란, 서로 목적이 다른 두 개 이상의 사실이 만나거나, 서로 목적이 같은 두 개 이상의 사실이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수다한 ‘그랬다면’으로 가정되는,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우연적 요소가 개입한다. 그러나 이 모든 우연적 요소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세습왕정이라는 구조적 필연이다. 이 모든 우연적 요소는 세습왕정이라는, 구조적 필연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계기이며, 다른 한편 구조적 필연을 작동시키는 강력한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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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이 있다. 어린시절 라디오에서 혹은 엄마의 흥얼거림에서 들었던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가요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풍성한 조건과 의지와 우연이 들어있는지는 그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그 노래. 제목도 <사도세자>인 그 노래는 사도세자의 뒤주 안의 죽음을 이렇게 슬퍼한다. 물론 가사는 나의 기억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네이버가 제공한 것이다. 

 

1. 금이야 옥이야 태자로 봉한 몸이 / 뒤주 안에 죽는구나 불쌍한 사도세자

    꽃피는 청춘도 영화도 버리시고 / 흐느끼며 가실 때엔 밤새들도 울었오.

2. 궁성은 풍악과 가무로 즐거운 밤 / 뒤주 안이 웬말이요 야속한 사도세자

    황금의 왕관도 황금도 버리시고 / 억울하게 가실 때엔 가야금도 울었오.

 

댓글목록

여하님의 댓글

여하

우리들이 낼 문집=실록을 의식한 글로 보임. ^^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호호호 맞습니다. 선생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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