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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히스토리쿠스] 숙제4 +2
gkpaul / 2017-02-16 / 조회 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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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히스토리쿠스] 숙제4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감독: 추창민, 2012.9.13개봉)' 예고편 중 앞 10초 간에서 (역사적)오류를 찾으시오."입니다.

 

먼저 오디오 부분에서 유의미 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은 배우 류승룡의 대사입니다.

1. "당장 승정원에 가서 보름간의 일기를 가져오게. 훔쳐서라도 뺏더라도 반드시 가져오게."

다음으로 영상에서 자막 두 개가 주목됩니다.

2. "광해군8년, 2월28일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  可諱之事, 勿出朝報"

3.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라진 광해군 15일간의 행적"

 

1과 관련해서 살펴봅니다. 승정원(承政阮)은 조선시대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던 기구로 오늘로 치면 대통령비서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승정원에서는 이와 관련한 취급문서와 사건의 기록을 정리하여 매달 한 권의 기록을 작성했다고 하는데 반드시 그 다음달 안으로 완성하여 보존했다고 합니다. 양이 많을 경우는 2권 이상으로도 했다고 합니다. 이게 '승정원일기(承政阮日記)' 인데요. 원래 조선 개국 초 부터 일기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이후 영조20년(1744년) 승정원 화재로 또다시 대부분이 소실되어 영조22년(1746년) 일기청(日記廳)을 설치하여​​​​​​​​​​​​ 개수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사료가 거의 소실되어서 결국 인조1년(1623년)부터 경종1년(1721년)까지만 개수를 결정하여 영조23년(1747년)에 완료합니다. 해서 오늘날에는 인조1년(1623년)부터 고종31년(1894년)까지의 승정원일기만 현존합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상정하고 있는 시대인 광해군 당시에는 승정원일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대사 중에 언급된 '일기'를 '광해군일기'로도 오인할 수 있을법 합니다만 광해군은 폐위(廢位)된 임금이어서 묘호(廟號:왕 사후 종묘(宗廟)에 신위(神位)를 모실 때 붙이는 호(號))가 따로 없이 '군(君)'이고 그의 재위기록도 '실록'이 아니라 '일기'가 된 것인데요. 이 기록의 생산은 다음 왕 때에서야 비로소 시작됩니다. 하니 이 시대에는 광해군일기가 아예 존재할 수 없습니다.

 

2와 관련해서 살펴보자면 이 자막은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초본(中草本)과 정초본(正草本) 모두에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하니 사실인데요. 문제는 ​​​'​朝報​​(조보)'를 '기록(記錄)'으로 일반화해서 번역한 데에 있지않나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항녕샘의 주장(호모히스토리쿠스, 99쪽)을 옮겨봅니다.

'조보는 요즘으로 치면 관보(官報)로 각 관청 사이의 주요 전달사항이 실려 있고 관청에서 베껴간 뒤에는 바로 폐기했던 공문서'라고 합니다. 사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기사의 배경에 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인목대비를 폐서인(廢庶人)하려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중국에서 사신들이 오고, 광해군은 정인홍과 이이첨의 뜻에 따라 진행되던 페비논의가 중국에 알려질 경우 외교 문제로 비화될 것이 걱정되어 이런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친형인 임해군을 유배(광해군즉위년, 1608년) 보낸 전후 명나라가 의심을 품고 사신을 보냈고, 그 사신에게 은(銀)을 뇌물로 바쳐 구슬리는 것이 상례가 되었는데, 폐모 논의마저 사신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구차한 이유 때문에 했던 명령'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해군일기의 위 기사는 조보에 인목대비폐모 관련 사항을 보안(保安)하라고 각별히 주의를 준 게 요지였던 것입니다.

 

3과 관련해서 살피자면 두가지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3의 내용은 2의 명령이 있고 이를 근거로 1을 실행해서 결론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광해군과 관련한 15일간의 기록이 사라졌다는 것일텐데요. 그렇다면 승정원일기 보름치를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제거하면 왕과 관련된 퇴임 후 기록의 생산이 불가능해질 것인가입니다. 이는 이것이야 말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퇴임한 왕의 기록이 실록이든 일기이든 그것의 생산은 기본적으로 사관들이 무수하게 기록한 사초(史草)에 있고, 여기에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내의원일기(內醫院日記), 관상감일기(觀象監日記) 등등 다양한 주체에 의해 기록된 수많은 자료들의 정리와 선별, 종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진위여부가 뚜렷하므로) 두번째 문제는 정말 광해군일기에서 15일치의 기록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맥락상으로 보면 2의 날짜인 광해군8년(1616년) 2월28일 전후일 텐데요. 전후로도 아니 광해군일기 전체로도 15일간 기록이 비어 있는 시기는 없습니다(광해군일기 정초본 기준). 가장 길게 비어 있는 게 ​​​​8일간 인데​​요. 두 번 있습니다. 광해군2년(1610년) 6월20일과 29일 사이, 그리고 광해군15년(1623년) 3월14일과 23일 사이가 그것 입니다. 앞의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뒤의 것은 사정이 짐작이 갑니다.  광해군15년(1623년) 3월14일은 광해군이 대비에 의해 폐위된 날이고, 3월23일은 아들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간 날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1.2.3.에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만한 것은 2의 광해군8년(1616년) 2월28일자 광해군일기 기사 '可諱(숨길'휘')之事(가휘지사), 勿出朝報(물출조보)'인데요. 이 역시도 '조보(관보)'를 무리하게 '기록'으로 일반화 하고 배경사건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역사에서 자유로운 영화적 상상력과 전개는 흠 잡을 것이 아니라 창작예술에서 오히려 권할 일입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의 서사와 구조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있고 그것이 영화의 내용에 긴장으로 작동해서 작품의 성취까지 상당부분 담보하고 있다면 이때에 그것은 그야말로 fact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네이버 지식검색과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그리고 오항녕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호모히스토리쿠스'가 참고자료입니다. 그리고 지난 4강후 뒤풀이 자리에서 오항녕 샘과 참석한 수강자들에게 酒邪亂動(주사난동) 부린 것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고 반성합니다. 아울러서 진심으로.. 엎드려 사죄드립니다.)

 

 

댓글목록

여하님의 댓글

여하

훌륭한 과제 수행능력입니다.

gkpaul님의 댓글

gkpaul

송구합니다. 샘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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