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레지아2기_스피노자] 강사인터뷰2 - 고병권 :: 윤리는 세계와 관계맺는 방법이다
우리실험실
/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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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지아2기_스피노자] 강사인터뷰2 - 고병권 :: 윤리는 세계와 관계맺는 방법이다
[우리 실험자들]의 2016년 1학기 파레지아 주제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입니다. 스피노자가 어떤 사람이고, ≪에티카≫는 어떤 책인지 다들 기대하고 궁금할 것입니다. 이 기대와 궁금증을 중심으로 고병권선생님과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스피노자와 ≪에티카≫가 지닌 매력들이 전달되면 좋겠습니다. 강사인터뷰는 2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1회는 스피노자가 중심이었고, 2회는 ≪에티카≫가 중심입니다. |
앎의 과정은 앎의 도구마저도 생산한다, 얼른 시작하라!
인식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해내야 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며, 여기서 하나의 앎이 다음 앎을 낳는다는 생각도 나타납니다. 기하학적 증명과 도출로 이어지는 ≪에티카≫의 진행방식은 인식의 발전, 혹은 자유의 증대 과정과 같습니다. 이 진행방식이 앎의 전개과정이며, 삶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앎의 과정을 중요하게 봤는데, ‘앎의 길이 앎의 방법’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앎의 도구마저도 앎의 과정에서 생산해내는 것이지, 앎의 전제과정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앎과 방법은 따로 있지 않고, 앎이 나아간 길 자체가 앎의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하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나의 결핍을 인식하는 일보다, 얼른 시작해서 다음 앎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윤리적 행동은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연못 안의 물고기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을 자연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윤리적 행동이 이 자연법칙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를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스피노자 윤리학의 특징입니다. 이런 면에서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일도, 작은 물고기가 떼지어 다니며 생존가능성을 높이는 일도 모두 자연법칙이며 윤리적 행동입니다. 우리가 연못에 빠져죽을 수 있는 일도, 수영을 배워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모두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으며 윤리적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윤리학은 내가 연못이라는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법, 어떤 것이 나에게 좋은 것인가를 고민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세계는 우리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허용합니다. 그렇다면 당장 내 앞에 있는 것에서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 긍정이 되고, 부정은 무능력한 상태입니다.
신에는 윤리가 없고, 개체에는 윤리가 있다
보통 우리가 무엇인가를 미와 추, 선과 악이라고 부를 때는 그 대상이 내가 기대하던 것에서 벗어났을 때입니다. 이것을 목적론적 사고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던 질서에서 벗어난 것을 무질서로 봅니다. 근대철학에서 ‘moral’은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하도록 하라’는 말이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moral’의 라틴어 어원은 신체적 습속에 관한 단어였습니다. 추상적 의미의 보편적 선악은 없습니다. 다만 각 개체가 살거나 죽고, 더 자유로워지거나 그렇지 않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윤리는 그런 차원에서 존재합니다. 신에게는 윤리가 없고, 개체에는 윤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우주에는 선과 악도, 좋고 나쁨도 없다
아담이 만약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몸이 아팠다면, 그건 그냥 배탈이지 악이 아닙니다. 신의 계시를 어겨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음식이 그의 신체에 맞지 않았을 뿐입니다. 도덕은 위반에 대한 처벌을 말합니다. 스피노자는 도덕이라는 추상적, 보편적 규범질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주 자체에는 선과 악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습니다.
≪에티카≫에서는 대신에 상대적인 것, 더함과 덜함의 문제만 남습니다. 윤리는 한 개체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도덕적 가르침은 윤리에서 나왔으나, 나중에는 율법으로 남아 개인을 망치기도 합니다. 개체의 윤리를 법질서와 사회계약으로 볼 때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윤리는 개체의 자유를 위한 것입니다.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코나투스’는 라틴어로 ‘노력’이라는 말인데, 독일어로는 프로이트의 책에서 ‘충동’이라고 번역되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코나투스’는 개체가 마련되면 스스로 작동되는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생물과 무생물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자유인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입니다.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때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될까요? 저 같으면 '코나투스의 전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공포, 슬픔 같은 것들이 외부에서 닥쳐올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고, 죽음을 향하게 됩니다. 공포나 슬픔은 죽음의 다른 이미지들입니다. 세계에는 우리에게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들이 존재합니다(우리의 현재적 역량상 말입니다). 우리 몸은 공동체와 같아서 어떤 부분은 좋아하지만, 어떤 부분에는 맞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불량식품 같은 걸 예로 들 수 있겠지요.
이 맞지 않음이 쌓여서 우리 몸 안의 각 부분들이 모여있게 된 원인인 ‘공통개념’들이 사라지게 되면, 각 부분들은 함께 있기가 괴로워집니다. 그 괴로움과 슬픔이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향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윤리학의 과제는 우리 안에서 어떻게 슬픔을 줄이고, 기쁨을 늘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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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지아 : [우리 실험자들]이 기획한 철학대학
파레지아는 [우리 실험자들]이 기획한 철학대학이며,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하기의 정신입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시작된 파레지아(Parrhesia) 실천은 진실-말하기(Truth-telling) 혹은 진실을 말하는 용기(The Courage of Truth)로 번역됩니다. 우리는 철학이-공부가-안다는 것이, 진실말하기의 실천이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에 대한 진실말하기로부터 타자에 대한 진실말하기로 이어지는 진실의 순환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사물과-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생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