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에세이 올립니다 +2
정아은
/ 2017-06-16
/ 조회 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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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이 나는 왜 회사를 그리워하는가.hwp 다운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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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음에 안 들지만...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그냥 올립니다. 아, 수요일에 하셨던 분들은(이제 저와는 신분이 달라진) 이 순간을 어떻게 감당하셨는지...무슨 핵전쟁 단추라도 누르는 것처럼...완료 버튼 앞에서 계속 망설이게 되네요. 에잇.
나는 왜 회사를 그리워하는가
이 새로운 성적 사회계약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은 인클로저 때문에 남성노동자가 상실한 토지의 대체물이자 가장 기초적인 재생산 수단이 되었으며, 또 누구나 뜻대로 전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유재가 되었다. 스스로 매춘에 나선 창녀를 지칭하는 16세기의 “공유여성” 개념에서 이 “시초축적”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노동편성에서는 모든 여성이 공유재산으로 변했다. 일단 여성의 활동이 비노동으로 정의되자 여성의 노동은 마치 공기처럼 누구나 마음껏 쓸 수 있는 천연자원으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마르크스 <자본>의 협업과 분업 파트를 읽던 때, 내가 예전에 회사에 다니던 때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는 내가 회사 다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회사 이외에는 군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공동체가 파괴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회사에 다니던 때의 내가 행복에 겨웠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말단의 자리에서 중요직책에 있는 다른 노동자를(주로 남성이었던) 보조하는 일을 주로 하면서, 나는 울분에 차고, 때려치울 궁리를 하고, 영혼이 파괴되고 있다고 여기저기 호소하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돌아보니 그 시절의 내가 완전히 불행했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의 생활과 비교해보면 그때의 내가 훨씬 행복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지나간 과거는 어느 정도 미화되기 마련이고, 그때는 젊고 활기에 차 있던 때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때에 대해 느끼는 내 소회는 단연코 ‘지금보다 나았다’는 쪽이다. 나는 이를 ‘임금 노동자’였던 때와 ‘비임금 노동자’인 지금의 나의 위치 차이에서 찾고자 한다.
1. 회사원에서 주부로
큰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를 그만둠과 동시에 아이양육과 온갖 종류의 ‘가사일’이 온전히 내 어깨 위로 쏟아져내렸다. 그 뒤로 이어진 나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내밀 명함이 없으며,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일정한 금액이 매달 송금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처절하게 인식하는 기나긴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눈뜨자마자 아이들 밥을 먹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온갖 종류의 자잘하고 반복적인 가사일을 하다보면 하루가 가는지도 모르게 가버렸지만 사람들은 내게 “너 회사 그만두고 집에서 논다며?”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졌다. “어...놀아.”라고 대답하면서 어쩐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했지만 나는 내가 왜 그런 느낌을 가지는지 알지 못했고, 이후로 누가 물어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날아왔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나 회사 그만두고 요즘 놀거든.” 빈번히 내 입에서 빠져나갔던 그 말. 내 귀에서 커다랗게 울려 퍼지며 묘한 잔상을 형성하던 그 말. 나. 요즘 놀거든. 당시의 나는 몰랐던 것이다. 내가 하는 가사일이 ‘노동’임을. 지불받지 않는 노동이기 때문에 일한다고 매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집에서 노는’ 주부는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도 가치를 매겨주지 않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해내야 하는 다양한 종류의 반복노동을 수행하는 일과에 간신히 적응해갈 무렵,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수반하는 새로운 고난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름하여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먹고 산다는 말 참고 견디기’. 나는 이 말을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장소에서 수도 없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뭐라 항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분명히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먹고, 살고 있었다. 그 뚜렷한 사실의 저편에 있는 갖가지 사정들, 즉 아이 둘 키우는 것만 아니면 지금이라도 나가서 남편만큼 돈을 벌 수 있다거나(라고 믿으며 나를 달랬다), 나는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 편하게 ‘쉬려고’ 회사를 그만둔 게 아니라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사정들은 한없이 작게 쪼그라들어서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처음 몇 번은 애써 나의 ‘능력’을 내세우며 항변하기도 했으나,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입금액을 잃은 나라는 존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가 듣기에도 지질하고 초라했다.
그러나 직접 번 돈으로 먹고 살지 않는다는 경제적 측면의 질곡보다 더한 무게로 나를 짓누르는 요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사회에서 고립되었다는 단절감과 막막함이었다. 회사에 다니던 때의 나는 비록 ‘이등 남성’ 혹은 ‘열등한 남성’쯤으로 취급받긴 했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난 이런이런 일을 하고 있네, 라고 말할 수 있었고, 연봉이나 연봉 외의 회사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각종 특권을 과시하는 여러 대화에 끼어들어 기죽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으며, 회사일을 기반으로 사회 각층의 사람들과 다양한 층위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일의 특성상 알게 되는 정보를 기반으로 시사적인 지식을 뽐내거나 가끔은 아홉 시 뉴스에 나오는 인물과 내가 일로 엮여 만난 적이 있음을 과시하는 소소한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경제 뉴스나 시사 뉴스에도 뒤쳐지지 않고 끼어들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주부’라는 이름의 정체성을 갖게 된 뒤, 이 모든 소소한 행위들이 오직 사회에 속해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2. 자본주의의 자장 안에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여성의 위치 변화
회사를 그만 두고 몇 개월이 지난 뒤, 재택근무로 하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회사에 나가서 했던 일들의 일부를 받아서 집에서 하거나(헤드헌터 일) 원서 리뷰, 단행본 번역 등‘파트타임’ 혹은 ‘프리랜서’라 불릴 만한 일을 했다. 경제적으로 필요하기도 했고,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매달 돈이 찍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양산하는 수많은 타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아이들 돌보면서 일을 할 수 있어서 좋겠다”고 부러움 혹은 찬사를 보냈지만, 내 생활은 전투와 같았다. 출퇴근을 하지 않고 작업장소가 집이기 때문에 일할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는 것부터가 일종의 전투였다. 내 일은 예고 없이 불쑥 불쑥 생겨나는 여러 가지 집안 일, 갑자기 아픈 아이들, 내가 ‘시간이 자유로운’일을 하니 아무 때나 불러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각종 ‘시어른’들의 호출로 침해 받기 일쑤였고, 마감 때가 되면 이박 삼일 혹은 삼박 사일 꼬박 밤을 새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처럼 되어버렸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면 으레 “그러게 그런 일을 왜 하니?” “얼마나 번다고”와 같은 말이 돌아오기 마련이었고, 종내는 나도 ‘내가 도대체 돈도 얼마 되지 않는 일을 왜 이렇게 하고 있나’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다시 회사에 들어갔다. 오십 군데 정도의 회사에 원서를 넣고 삼십 군데 정도의 회사에 면접을 다닌 뒤 가까스로 들어가게 된 회사를, 나는 펄쩍펄쩍 뛰면서 잡아먹을 것처럼 다녔다. 잃어봤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알게 된 나는 회사생활의 모든 순간을 너무나! 너무나 사랑했다. 예전에는 울분에 차 펄쩍펄쩍 뛰었을 ‘열등한 남성’ 취급도 유들유들하게 넘길 수 있었고 초과노동,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 떠맡기, 역겨운 상사의 작태 견디기 등 각종 억울한 상황도 예전보다 수십 배의 융통성을 발휘하며 능구렁이처럼 넘어갔다. 이 기간에 만난 사람들은 나를 “내가 만나봤던 사람들 중에 가장 성격 좋은 사람”, 혹은 “한 번도 찌푸린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했고, 이는 내 인생을 통털어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그런 종류의 평가였다.
자본주의의 심장과도 같은 회사에 다시 발을 디뎠던 이 기간에 나는 결혼해 아이가 있는 여자가 회사에 다닐 때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통렬하게 깨달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확대가족(주로 시가쪽)과 관련된 각종 행사에서 면제된다: 결혼한 여성에게 가족관련 행사란 엄청난 양의 강제불불노동을 의미한다. 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한 가지 변명거리는 “저 그날 출근해야 되는데요”이며, 이것의 중요성을 나는 지불노동 종사자의 지위를 잃었던 기간에 뜨겁게 절감했다. 지불노동 종사자의 지위에서 떨어져나오자 어찌나 많은 종류의 가족행사가 생겨나 활짝 활짝 팔을 벌리던지!
2)의미 있는 사회적 관계망이 생긴다: 아이와 남편에 관한 이야기 외의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종류와 양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증폭된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각종 효과는 셀 수 없이 많다. 내가 사회에 속해 있으며 작게나마 사회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은 이 관계망의 형성에서 나온다.
3)집에서 온종일 가사노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집에서 논다며?”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고,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편하게 먹고 산다는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 정말이지 여기서 벗어나서 너무 통쾌했다!
4)작게는 쇼핑의 가격대를 정하는 문제부터 거주지를 정하는 문제까지, 여러 현안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5)직접 번 돈으로 가용할 시간을 살 수 있다. 즉 가족들을 위해 나를 언제나 ‘대기’ 상태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내 시간은 전혀 ‘내 시간’이 아니었는데, 이제 내가 벌어들인 돈으로 그 일부를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6)가부장제 하에서 받는 여러 부당한 대우에 직면할 때,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당당하게 맞서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지불노동 종사자의 지위를 떠났을 때는 이게 안 됐다.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성들 중 80퍼센트가 생계 때문에 이혼을 못하고 산다는 통계를 떠올려보면 경제력이 여성에게 자존감의 원천일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안전’, 극단적인 경우에는 ‘생사의 문제’에도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3. 마르크스가 보지 못했던 지점
<자본>을 읽으며 그립게 떠올렸던 회사 생활은 아마 내가 지불노동자의 위치에서 떨어져 나왔다가 다시 돌아갔던 두 번째 기간에 해당할 것이다. 그 기간이 내게 핑크빛으로 남은 것은, 결혼한 뒤에도 일정 기간 동안 자본주의의 자장 안에 계속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체감하지 못했던 가부장제의 품에 내가 확실히 안겨본 뒤에 새로운 시선을 갖고 다시 자본주의 공간으로 돌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가부장제 본격체험의 전과 후로 나뉠 수 있을 이 차이를,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고서야 의식하게 되었다. 이는 <자본>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종류의 ‘껄끄러움’에서 유래했다.
...노동력의 가치는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드는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이 가치인 한, 노동력 그 자체는 거기에 대상화되어 있는 일정한 양의 사회적 평균노동을 표현할 뿐이다. 노동력은 오직 살아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재생산은 이 개인의 생존을 전제로 한다. 이 개인이 살아있다면, 노동력의 생산이란 이 개인 자신의 재생산, 그의 생활의 유지다. 살아 있는 개인은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결국 이 생활수단의 생산에 드는 노동시간이 된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다.
...마르크스 <자본>
이 부분을 읽으면서 느꼈던 껄끄러움이 뒤에 나오는 협업
댓글목록
정아으님의 댓글
정아으몇 번 시도했는데, 본문이 잘 안 넣어지네요.;; 너무 길어서 그런지...첨부파일에는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내일 다 프린트해서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 자료 업로드시 텍스트 잘림현상에 대한 대처 ]
텍스트 잘림현상은 내용이 길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지요^^
한글.워드문서를 복사해서 홈페이지에 붙여넣을 때, 텍스트가 부분만 나타나는 잘림현상이 생깁니다.
그것은 한글.워드문서에서 웹문서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한글.워드문서의 속성(밑줄, 볼드, 크기)들이 웹문서의 html태그로 변환되어 용량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한글.워드문서의 텍스트를 복사해서 -- 메모장에 붙였다가 다시 복사해서 -- 홈페이지에 올리면,
원본문서의 속성들이 지워지면서 잘림현상이 해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