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에세이 발표문 올려요 +1
주호
/ 2017-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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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전에 부랴부랴 수정하고 올리느라, 초고 올렸던 것과 큰 차이가 없는 발표작이 되고 말았네요.
지금의 에세이를 올리기 위해, 제게 너무나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 정말정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분들의 애정어린 도움을 받고 나서도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되는 글을 써버렸나 싶어 심한 자괴감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만,
이제 어쩌겠어요ㅜㅜ 저에게는 열두척의 배고 뭐고... 남은 게 없어요.
(비겁한 변명 따위 하지마! 라고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무튼, 내일 발표현장에서 뵙겠습니다.
올리면서 보니까, 제가 정아은 님에 이어 두번째 타자가 되는거네요. 열시 내지는 열한시 무렵...
다들 일찍 오실 건가요? 조금 늦게 오셔도... 괘... 괜찮... 아, 아니에요. 그래도 10시까지 오셔야지요!
그럼, 내일 열시에 뵐게요. 처음 하는 파레지아,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함께 공부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기대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아, 이 긴거 다 읽을 거 아니에요. 내일은 추려서 읽을 거니까, 걱정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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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삼성을 중심으로 한국의 자본가 분석
주 호
1. 왜 삼성인가?
일반적으로 ‘자본가’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를 말한다. 다시 말해, 무조건 돈이 많은 사람이 자본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본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실재적인 수단을 점유한 자가 ‘자본가’라는 말이다.
일단 자본가는 화폐소유자이다. 그러나 모든 화폐소유자가 자본가는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수입의 대부분을 은행이나 금고에 저축해 둔다면 그는 자본가가 아니라 화폐축장자에 불과하다. 화폐축장자는 화폐를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음으로써 화폐를 자본의 유통과정에서 구출한다. 이 지점에서 자본가와 화폐축장자는 구분된다. 물론, 자본가와 화폐축장자는 절대적 치부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자본가는 자본의 유통을 통해 얻은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다시 자본의 유통 안으로 밀어넣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화폐를 자본의 유통 안으로 밀어넣는 행위가 합법적일 경우 우리는 그것을 투자라고 부른다.
‘자본가는 누구인가?’라는 주제에 ‘왜 하필 이건희인가?’라는 질문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건희로 대표되는 삼성은 특별한 존재이다. 카프카의 소설《성》에 등장하는 백작의 성처럼, 사람들은 삼성에 대해 ‘절대적 애정’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절대적 공포’를 느낀다. 삼성 오너 일가의 비리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근거없는 구호에 불안감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나는 이미 세탁기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라 깨끗하다는 지난 대선 홍준표의 한마디에 “그거 고장난 세탁기 아닙니까?”라며 심상정이 일갈했고, 그에 대해 홍준표는 “그거 삼성세탁기요.”라고 되받아쳤다. 그의 말 속에는 ‘삼성은 고장 나지 않는다’라는 무한 신뢰가 숨어 있었다. 아마도 그 무한 신뢰가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속에도 심어져 있을 것이다.
나는 삼성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갖는 특이성을 통해 자본가 계급의 분석을 시도하려 한다. 재벌체제의 변화 등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 개선이나 후계 문제와는 별도로 첫째, 삼성이 세계적인 IT기업이라는 점, 둘째, 현재까지도 무노조 경영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 셋째, 삼성반도체의 화학물질로 인한 노동자들의 보건적 피해를 은폐하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최근의 국정농단 사태로 삼성의 권력 지향적 태도가 드러났다는 점 등에 나는 주목했다. ‘왜 하필 이건희인가?’라는 질문은 ‘왜 하필 삼성인가?’라는 질문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희를 통해 자본가 계급을 분석하려는 시도에 아직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세계 부자 순위 1, 2위를 다투는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도 그들의 자산을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투입한다는 점에서 이건희와 다를 바 없는 자본가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기업인이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다음 올림픽에도 자신들의 장남으로 국가대표 선수단을 꾸리겠다고 우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누구의 말일까? 워렌 버핏의 말이다. “아이들의 인생과 잠재력은 출생과 무관해야 한다.” 이 말은 누구의 말일까? 빌 게이츠의 말이다. “부자 옆에 줄을 서라. 산삼 밭에 가야 산삼을 캘 수 있다.” 서부시대나 개발시대 때 졸부나 지껄일 이런 말을 내뱉는 정신 못 차리는 자는 대체 누굴까? 우리나라 제일의 부자, 이건희다.
아무래도 우리의 자본가는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보다는 이건희를 더 닮은 듯하다.
2. 대한민국 재벌 – 축적 이전의 축적과 축적 이후의 축적
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은 물려받은 재산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가를 이룸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업을 이루거나 큰일을 해냈을 때 그를 자수성가했다고 말한다. ‘이른바 자수성가’형 자본가로는 현대 정주영을 들 수 있다. 그의 성공신화는 ‘소 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로 시작해 ‘통일소 500마리를 이끌고 금의환향…’으로 끝난다. 정주영을 대표로 하는 대부분의 창업주들은 자신을 ‘이른바 자수성가’형 자본가라고 말한다. 1995년 안랩을 창업하고 현재는 정치계에 몸담고 있는 안철수 역시 자신이 자수성가의 아이콘임을 시시때때로 어필한다. 그렇다면 최초의 자본가들은 ‘근검과 절약’만을 인생의 모토로 끊임없이 절제하고 또 절제하며 부를 축적해 자수성가한 것일까?
자본의 축적은 잉여가치를 전제하고,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하며,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생산자들 수중에 상당한 양의 자본과 노동력이 이용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전제한다. 이 모든 운동은 무한한 순환 속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데, 이러한 순환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축적에 선행하는 축적, 이른바 시초축적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초축적이란, 자본의 유통과정에 투입되어 자기를 증식시키는데 필요한 일정량의 화폐가 집적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롭지만 생산수단이 전혀 없는 무일푼의 노동자 계급이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과정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전제인 셈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행해지기 위한 조건은 봉건사회 내부에서의 역사적 조건들에 의해 점차 형성되어 왔다. 자본의 시초 축적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봉건 영주들에 의한 토지 수탈이었다. 봉건 영주들은 농노이기는 하나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었던 자영농들을 토지로부터 추방했다. 또한 공유지를 횡령함으로써 수많은 노동자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양모 산업이 발전하자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경작지를 목양지로 바꾸었다. 농업 분야에서는 차지농업가가 등장하면서 자본의 시초 축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차지농업가들은 지주에게 땅을 임대한 다음 임금 노동자를 고용해 대규모 경작을 함으로써 자본을 증식시켰고 이러한 방식으로 이윤을 확보해 자본가로 전환되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축출되어 부랑자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고 자본의 축적을 가속화하기 위해 임금인하를 위한 법령이 제정되기도 했다. 농민들은 토지라는 생산수단을 상실하고 이제 생계를 위해서 제 몸뚱아리를 팔아야하는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가 된 것이다. 토지나 공장을 소유한 사람들은 이러한 농민들을 싼값에 공급받아 엄청난 부의 축적을 이루었다. 또한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생산하던 농민들은 이제 공장에서 생산된 생활 수단을 상품으로 구입해야만 했다. 토지로부터 농민을 축출시킨 농업혁명은 산업자본에 임금 노동자를 공급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 또한 마련해 준 것이다.
자본주의적 차지농업가들의 탄생이 비교적 완만했다면 산업자본가들의 탄생은 그렇지 않았다. 길드의 장인이나 자립적 소규모 수공업자들 또는 임금노동자들까지도 소자본가로 전환했고, 임금노동의 착취를 더욱 확대해 자본의 축적을 강화함으로써 본격적인 산업자본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산업 자본의 시초 축적은 아메리카에서의 금은의 발견, 동인도의 정복과 약탈, 흑인들의 노예화 등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폭력적인 방법을 통한 축적 이전의 축적, 시초 축적의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은 자신의 절욕이 부를 축적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자수성가의 신화란 시초축적과 유사한 방식으로 탄생한다. 대한민국의 재벌은 어떻게 화폐를 축적해 지금과 같은 규모로 성장했을까? 우리의 현대사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국가와 대자본의 결탁관계, 재벌 중심의 수출주도형 경제구조, 수도권으로 초집중된 국토 불균등 발전과 독점구조가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국가는 시장을 관리해왔고 공동체의 구성원들끼리 서로 돕고 보살피는 자급경제가 폭력적으로 파괴되어 왔다. 1910년대 전반에 걸친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 1930년대의 농촌진흥운동 등은 한국의 농촌공동체를 거의 붕괴시켰다. 일제는 소농이나 소작인들을 농업노동자로, 도시 빈민으로 만들었다. 국가가 대자본을 위해 노동자에게 저임금을 강요하고 이를 위해 저곡가 정책을 농민에게 강요하며 시장에 개입했다. 그랬던 일본이 패전함과 동시에 일본이 소유했던 재산이 모두 당시 한국을 점령하고 있었던 미군정에 넘어간다. 이 귀속재산을 ‘적산’이라 부르는데, 적산은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약 9년 간 거의 무상으로 매각되었다. 따라서 미국인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거나 이승만 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이 이 적산을 불하 받아 당장 대기업가로 등장했다. 해방 직후에는 일본 소유의 산업시설이 전부였기 때문에, 적산을 불하받는 것은 해당 산업에 있어 거의 독점적 지위권을 차지하는 것과 같았다.
또한 1950년대에 재벌은 미국의 원조 물자와 원조 달러를 배정받아 자본을 축적했다. 공업용 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미국이 원조로 제공하는 밀, 원당, 원면은 제분업, 제당업, 방직업의 주된 원료였고 그 당시에는 이 삼백三白산업이 주된 산업이었다. 또한 그 당시 달러가 부족했기 때문에 원조 달러를 배정받는 기업은 횡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달러로 국내에 부족한 상품을 수입해 폭리를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삼성그룹을 있게 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도 창업주인 이병철이 절욕으로 일궈낸 부를 바탕으로 설립한 것이 아니라 이런 미국의 원조 달러로 지어졌다. 삼성은 마산의 정미소로 출발해 이후 대구의 양조장을 거쳐 서울에서 무역업을 시작했다. 이 무역업을 계기로 이병철은 제일모직, 제일제당을 설립했는데 무역, 제당, 모직 이 세가지는 정부 도움과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성공하기 어려운 시장이었다.
재벌 대부분이 자수성가가 아니라 특혜를 받아 탄생했고 성장했다는 사실, 외국에도 대기업이 많은데 유독 한국의 대기업만을 ‘재벌’이라고 부르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건희는 “약 중에 제일 좋은 보약은 검약”이라고 말했다. 마치 자신들이 검약으로 부를 축적한 것 마냥. 그리고 사람들은 이건희같이 되기 위해 부에 대한 그의 자세를 따라하려 애쓰고 그것을 내면화하며 실천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본가들도 최초에는 열심히 일해서 부를 쌓은 노동자였다’는 자수성가의 신화를 믿는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말한다. 자수성가한 자본가는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의 근원은 검약”이라고 외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이 땅에 검약하지 않으며 사는 노동자가 있느냐고. 근로기준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저임금에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하면서도 절약하고 또 절약했던 노동자들은 왜 자본가가 되지 못했느냐고.
재벌 창업주들이 항상 성공의 비결로 포장하는 ‘남다른 아이디어, 독창성, 결단력, 과감성 그리고 검약’은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황된 신화일 뿐이다.
3. 삼성, 4개의 키워드 – IT, 무노조, 산재 그리고 국정농단
화폐와 상품이 결코 처음부터 자본이 아니었듯이, 생산수단과 생활수단도 결코 처음부터 자본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사정이 필요했다. 즉, 아주 다른 종류의 두 상품소유자가 서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한쪽은 화폐와 생산수단, 생활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고 다른 한쪽은 그들이 팔 것이라고는 자신의 몸뚱아리밖에 없는 노동력의 판매자들이다. 전자는 타인의 노동력을 매입하여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가치액을 증식시키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타인의 노동력을 사용함으로써 자본가로 전환된다. 후자는 일명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되는데,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함의를 갖는다. 노동자들은 노예나 농노와는 달리 생산수단의 일부가 아니기에 자유로우며 자신의 노동력을 마음대로 판매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노동력의 판매자와 구매자는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등가물 대 등가물로써 노동력과 임금을 교환한다.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공정한 계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이 체결된 후 노동력의 구매자는 거만한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는데 노동력의 판매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시장에서 노동자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유자로 화폐의 소유자와 상대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서로 다른 상품의 소유자들로 평등했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라는 거래가 완결된 뒤, 생산과정에 들어갈 때와 다른 모습으로 생산과정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노동자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자신이 판매한 시간이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지, 어떤 목적에 의해 쓰일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노동력의 구매자인 자본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실상 자본가라는 흡혈귀는 “착취할 수 있는 한 조각의 근육, 한 가닥의 힘줄,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 노동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자본가를 뒤따라가는 노동자는 겁을 먹고 주춤주춤 할 수밖에.
자본가들은 노동력이 특별한 상품임을 이미 알고 있다. 자본가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교환가치가 있는 상품을 생산하려 한다. 둘째, 그는 상품생산에 투입된 가치 총액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상품을 생산하려 한다. 자본가의 관심은 가치이며, 더 나아가서는 잉여가치의 생산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잉여가치의 원천인 노동력, 그것의 소유자인 노동자를 공급받지 않으면 안된다. 자본가는 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동시간을 연장하고 꾸준히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며 협업과 분업을 통해 집단 생산력을 증대시킨다. 또 끊임없는 기계화와 자동화, 정보화를 통해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어 언제든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여건을 조성하고 이에 따라 자동적으로 노동강도가 강화된다. 최근 자본가들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자본의 이윤창출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다.
1) 초일류 IT기업 삼성
현대가 ‘민족’을 기업 이미지의 지표로 삼았을 때, 삼성은 ‘초일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현재, 삼성은 대한민국 최고의 IT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IT업계의 유행어 몇 가지 ‘2번 출근했더니 일주일’이나 ‘월화수목금금금’은 지금의 씁쓸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어 ‘오징어잡이배’라고 부른 것은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삼성과 관련된 거짓말 중에 사람들이 마치 진리처럼 믿고 있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삼성이 온 국민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것이고, 둘은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고, 셋은 삼성을 자꾸 괴롭히면 회사를 해외로 이전시킨다는 것이다. 첫 번째 것은 현실을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고, 두 번째 것은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거짓말이고, 세 번째 것은 노동자나 소비자가 어떤 요구를 하려할 때면 암암리에 유포되는 상투적인 협박이다.
사람들은 흔히 삼성같은 기업이 일자리를 만들어야 양질의 일자리가 많아지는 거라고 말한다. 그 말이 사실일까? 사실 IT산업의 특성상 많은 일자리 창출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IT는 노동자를 오히려 적게 흡수하는 대표적 산업이다. 한 대의 컴퓨터와 한 명의 노동자만 있으면 수십억의 자본을 창출할 수 있는데, 굳이 두세명의 노동자를 고용할 이유가 있겠는가.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 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리는 인재경쟁의 시대.”라는 이건희의 말에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구원한다는 메시아적 특권의식이 엿보이기까지 한다. 그때문일까? 삼성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뒤, 삼성 문제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는 이건희 일가의 특권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건희 가족들의 테이블에는 프랑스에서 항공기로 공수된 냉장 푸아그라가 제공됐다. 반면, 다른 테이블에는 냉동 푸아그라가 제공됐다. 와인도 마찬가지였다. 이건희 가족의 테이블에는 천만 원짜리 페트뤼스 와인이 있었지만 손님 테이블에는 이보다 훨씬 싼 다른 와인이 있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손님에게는 주인보다 더 싼 음식을 제공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런 무례한 태도의 배경에는 이건희 일가가 마치 왕족이나 귀족처럼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있다.
또 다른 단락을 살펴보자.
이건희, 이재용, 홍라희 등 이건희 일가는 자신들이 보통 사람들과 신분이 다르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살고 싶어 했다. 이건희의 집이 있는 이태원동, 한남동 일대에는 리움미술관을 포함해 승지원, 이재용의 집, 딸들인 이부진, 이서현의 집 등이 몰려있다. ‘그들만의 마을’이 형성된 셈이다. (…) 리움 미술관을 세운 목적 가운데 하나가 ‘그들만의 마을’과 관계가 있다. 미술관이 이건희 일가의 집들을 보호하는 요새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고가의 미술품이 있는 미술관에 도둑이 드는 것을 막는다는 핑계로 경비원을 대거 배치했다. 사실상 ‘그들만의 마을’에 일반인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배치된 경비원들이다.
세계 초일류 IT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앞세워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자신들을 신의 계시를 받은 자들로 생각하는 이건희 일가의 이러한 안하무인의 태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물론, 이런 특권의식은 자본가 계급 전체에 자리 잡고 있다. 자기 둘째 아들이 술집에서 시비 끝에 폭행당하자 경호원, 용역업체 직원 등을 대동하고 보복폭행에 나섰던 한화, 28억의 세금을 내지 않고 버텼던 코오롱, 청문회장과 국정감사장에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출석조차 하지 않았던 한진, 롯데, 신세계, 현대 등도 특권의식에 똘똘 뭉쳐 있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다.
2) 무노조 경영 –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상황이 이러니 이건희 일가와 삼성의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은 불보듯뻔하다. 그러나 이병철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노조만은…”으로 시작하는 무노조 경영 원칙은 이건희 시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자본의 순환과정에서 노동자와 자본가가 투쟁하게 되는 이유를 알아보자.
자본가는 자신의 화폐를 이용해 노동력을 구매하는데, 이때 노동자의 임금수준이 결정된다. 여기서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개인적 자유와 경쟁’을 최대로 보장한다는 구실로 임금수준을 최저한도로 인하하려 한다. 이것에 대항하기엔 개별노동자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단결하기 시작하고 이리하여 노동조합이 탄생한다. 임금수준의 결정은 사실상 노동자가 창조하는 새로운 가치 중에서 얼마를 노동자가 임금으로 가져가고 얼마를 자본가에게 잉여가치로 주는가에 관한 것이므로 ‘분배투쟁’의 양상을 띤다. 그러나 자동화, 합리화, 폐업, 휴업 등을 통한 실업자의 증가는 노동자들의 임금수준과 생활수준을 유지하거나 개선하려는 노동조합의 힘을 크게 약화시킨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소비, 사용하여 상품을 생산한다. 여기서 자본가는 노동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노동할 수 있도록 지휘, 감독한다. 노동시간의 연장, 노동강도의 강화, 작업장의 환경과 위생, 새로운 생산방식 도입에 따른 해고의 위험, 산업재해, 생산물의 종류와 품질의 결정 등 모든 것에 있어 노사는 필연적으로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도 노동자들의 단결이 중요하지만, 자본가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 생산과정을 지역별로 재편하거나 자본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경우에는 해당공장의 노동자들이 유효하게 대항할 수 없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가장 큰 갈등은 부wealth에 대한 개념차이에서 기인한다. 자본가에게는 부가 화폐나 상품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노동자에게는 자기발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사용가치가 바로 부다. 그러므로 노동자에게는 자본주의적 관계 밖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도 부를 형성하며, 특히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을 제공하는 자연 그 자체도 부다. 또한 ‘생산적 노동’에 대한 개념도 서로 다르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만이 생산적 노동이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노동자의 재생산에 필요한 모든 노동이 생산적 노동이 된다. 따라서 국가재정에 의해 무료로 운영되는 교육, 의료 노동도 생산적이며 가사노동도 물론 마찬가지다.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 집단의 투쟁이 마치 기업경제 자체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해체하려는 움직임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임금투쟁, 경영참가투쟁, 교육과 의료 공공화 투쟁은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도 행해질 수 있으며 이런 투쟁과정 속에서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점을 개혁하려는 질적 성장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덮어놓고 “노조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심지어 삼성은 우리나라 내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해외에서도 무노조 경영 원칙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해외란 주로 동남아 등지의 가난한 지역을 말한다. 현지의 인권 운동가들은 “한국 기업이 다른 아시아 기업에 비해 폭력적이며 군사적”이라고 평가한다. 삼성은 말레이시아에 삼성전자 공장을 유치하면서 “10년 동안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현지 정부의 약속을 받아 내기도 했다.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이면 잘해봐야 1.5류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말하는 이건희가 노조 없이 회사를 소유하고 주주들의 의사만으로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3) 산업재해에 대처하는 삼성의 자세
황유미, 이숙영, 황민웅… 이 세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두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었고, 모두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죽은 노동자들이다. 10만 명에 서너명 꼴로 발생한다는 이 희귀병이 어떻게 한 기계를 놓고 짝꿍으로 일했던 황유미, 이숙영에게 찾아왔을까? 황민웅은 황유미, 이숙영의 라인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던 엔지니어였다. 이후 삼성반도체 백혈병 대책위에 접수된 발병 사례만 해도 스무 건이 넘어간다. 물론 접수되는 사례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삼성반도체를 첨단산업쯤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화학공장일 따름이다.
2009년, 위의 세 사람을 포함한 삼성 백혈병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들은 집단으로 산업재해 신청을 했고 뜻밖에 전원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노동자들이 삼성반도체 작업장에서 들이마시는 수십 종의 화학물질의 존재, 백혈병과 화학물질 간의 명백한 상관관계, 상당한 인과관계가 성립되면 산업재해로 인정한다는 대법원의 판례도 소용이 없었다. 삼성반도체를 상대로 끊임없이 투쟁을 이어온 유가족에게 회사 관계자가 했다는 말, “삼성을 이길 수 있으면 이겨봐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종류의 말은 아닌 듯하다. 그렇기에 “삼성에 노동조합만 있었어도 우리 아이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삼성 백혈병 피해 유가족들의 말은 더 절절히 가슴에 와서 박힌다. 삼성에는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해 주는 노조가 없으며 아예 만들 수조차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가 생산한 상품을 시장에서 팔아 자기에게 필요한 상품을 사는 매우 초보적인 상품경제에서도 시장의 거래를 규율하는 관습이나 법률이 있었다. 시장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어떤 규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시장의 질서는 파괴될 것이다. 또한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어야 하고, 화폐가 제 구실을 해야만 한다. 권력이 개인에게 ‘자기의 것을 자기가 마음대로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그 권리를 보호해야만 시장이 정상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 또한 권력은 어떤 것을 화폐로 선정할지, 단위는 무엇으로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상품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사유재산을 보호하며 자본의 가치증식을 장려하는 동시에 자본의 재편 또는 구조조정을 촉진한다. 앞서 시초축적의 역사에서도 살펴보았듯 권력과 친한 자만이 자본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끊임없이 권력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가장 최근, 대통령의 탄핵까지 불러온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에서 삼성의 위치는 그래서 더 주목할 만하다.
4) 권력과 삼성
현대 정주영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가지려 했다. 권력자의 뒷주머니에 돈봉투를 꽂아주다 못해 “더러워서 내가 하고 만다!”라며 직접 국회의원이 되더니 아예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었다. 그에 비하면 삼성의 권력의지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며 지극히 은밀하다.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때부터 삼성은 권력과 결탁했다. 이병철은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잘 알려진 한국비료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는 물론 정치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꼈다. 이제야 널리 알려진 한국비료 사건은 사실상 박정희와 이병철의 합작품이었다. 비자금을 확보하고자 했던 박정희는 한국비료를 지어 헌납하라고 이병철에게 지시했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이병철은 밀수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병철의 밀수가 탄로나자, 박정희는 이병철을 배신했다. 박정희는 공식석상에서 “재벌 밀수는 반국가행위”라고 규정했고 당시 56세에 불과했던 이병철은 한창 기업을 성장시키고 왕성히 활동할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개인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2,000만원의 벌금 처분만 받았다. 또한 세상이 잠잠해지자 다시 경영에 복귀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훗날 그 아들인 이건희도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2007년 50억원대 비자금 형성과 관련된 배임과 조세 포탈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건희는 자신의 퇴임과 지배구조 개편 등의 경영쇄신안을 내놓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사건이 일단락나고 세상이 잠잠해지자 그는 다시 경영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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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재용은 어떨까? 해방 이후 최고의 정치스캔들이라고 할 수 있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삼성 오너 일가 중 처음 이재용이 구속됐다. 특검은 박근혜와 최순실이 공모해 삼성그룹으로부터 430억 원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청문회에서 이재용이 했던 말처럼 그는 단지 권력의 눈치를 보았을 뿐일까? 이재용은 자신의 사적 이익, 2015년 삼성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성사되도록 국가가 나서서 도와줄 것을 로비한 것이다. 물론, 아직 이재용의 재판이 진행중이므로 결과를 섣불리 단정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선대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는 이재용의 모습을 보면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3. 자본가는 우리 ‘안’에 있다
마르크스는 인격화된 자본으로서 ‘존중받고 싶어하는’ 자본가의 욕망을 언급한다. 자본가는 돈에 대한 욕심을 광적으로 표출하는 수전노와는 달리, 절대적 부에 대한 욕망을 사회적 메커니즘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존재이다.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메커니즘에서 자본가는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수전노와 다를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수전노는 자본가가 가장 싫어하는 구시대의 산물이다. 어떤 자본가도 자신을 수전노와 동일한 존재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환원’이라는 윤리를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필연적으로 한 기업에 투하되는 자본을 끊임없이 증대시키고, 또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갖가지 내재적 법칙을 개별 자본가들에게 외적인 강제법칙으로 강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의 모든 행위는 자본의 기능에 지나지 않고, 자본가 자신의 사적 소비는 자본의 축적에 대한 도둑질로 간주되는 것이다. 자본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생각은 근대적 자본가를 규정하는 핵심 척도이다. 이건희에 대해 다시 떠올려보자. 그는 ‘존중받을’ 자본가인가? 아니다. 그가 자본가로서 존중을 받으려면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자본을 빼돌리는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본가의 미덕은 오직 자본의 축적에 매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삼성, 이건희, 이재용과 관련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내용들의 상당수는 이미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들일게다. 말하자면 삼성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그다지 순진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단히 현실적으로 삼성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부정적 정보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삼성과 이건희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삼성이 국제 시장에서 갖는 위상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하는 모양이다.
“한담 속에서도 나는 늘 이건희 회장의 21세기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한국 문화에 대한 확고한 인식에 대해 찬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희 에세이》에 실린 추천사 중 이어령의 글 일부분이다. 소설가 박경리는 “깊은 곳에 가라앉아서 세상을 응시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웃는 모습은 스스러워하듯, 그러나 천진했다.”고 이건희를 평가했다. 사람들이 삼성과 이건희에 대한 부정적 사실들을 알면서도 그들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상성이라는 대상에 대한 한국사회의 도착적 욕망처럼 보인다. 도착증이라는 것은 ‘나는 원래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한다면 도착증자는 어머니의 거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도착증자는 이렇게 알고 있었던 사실을 부인한다. 억압된 욕망을 방어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부정과 달리, 부인은 아예 고통을 주는 현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심리작용을 의미한다. 이 상황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여기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도착증자가 만족시켜야 할 것 같은 대상이다. 그런데 이 대상을 만족시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도착증자는 참을 수가 없다. 삼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는 이런 도착증자의 태도와 닮아있다. 합리적 무시, 삼성이라는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애써 부인하는 태도를 사람들에게서 읽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함석헌의 말을 빌어 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나 속의 착취자, 압박자를 없애라. 그러면 밖에 있는 반대자가 자연 없어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궁극적인 억압자는 자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은 내가 저항해야 할 적이다. 하지만 자본이란 무엇인가? 이것이야 말로 “내 자신이 나가서 반사된 것”이 아닌가. 자본은 사물화된 욕망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나의 밖에도 있지만 동시에 내 안에 뿌리박혀 있는 적이다.
자, 이제 거울을 볼 시간이다. 내 속의 자본가와 마주해라.
당신은 승리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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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님의 댓글
삼월
'쁘띠거니'와 '쁘띠재용'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는 소름끼치는 적의 정체!
내 속에 있는 자본에 대한 욕망.
조금 길었지만, 유쾌하고 시원한 에세이였어요.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