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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에세이 올립니다. +3
비욜 / 2017-06-16 / 조회 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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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제에 가까운 에세이 입니다. ^^;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1. 양가감정에 대하여

 

  맑스의 <자본>은 단순한 듯 하며 어렵다. 이미 ‘갑질, 흙수저, 은수저’가 일상어가 된 현대인에게 자본의 폭력성과 착취가 새로운 사실도 아니고,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회현상도 아니다. 물론 그 방법의 창의성과 잔인함은 매번 상상을 뛰어넘지만, 동기를 치부욕이라 생각한다면 굉장히 단순한 현상으로 이해가 된다. 치부욕은 현대인의 자연스러운 욕망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인간의 욕망에 가장 충실한 사회형태’라고도 이야기 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본>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의 비판지점이 단순히 자본가들의 탐욕과 폭력성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 자본이 딛고 서 있는 평면 그리고 그 평면에 내재되어 있는 기만적 성격과 자본의 실재방식을 가리면서 나타나는 많은 장치들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 안에서는 실재적인 것이 끊임없이 ‘위장’되고 ‘은폐’되고 또는 인과가 전도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인식도 욕망도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은폐장치가 얼마나 정교하게 잘 작동되고 있는지는 <자본>을 다 읽은 후에도 자본에 대해느끼는 나의 양가적 감정과 누군가가 나를 ‘노예’라 부르면 분명히 느꼈을 불쾌한 반응이 그것을 증명한다. 맑스가 그 시절의 노동자들을 ‘백인노예’라고 불렀을 때 아무도 납득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직장인들의 출근 모습을 보며 착취될 그들의 모습을 애처로와 하다가, 알바시장에서 마저 이제 50대 여성은 더 이상 ‘착취의 대상’조차 안된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서글픔.  <자본>을 읽으며 그 때 직장을 그만둔 것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였구나 위안을 삼았다가, 신랑이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호소하면 밤새 뜬 눈으로 걱정하는 내 모습. 그리고 다시 직장을 그만두었던 시점으로 돌아가도 다시 똑같은 결정을 내릴까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직 자본에 대해 희망을 품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양가감정은 아직도 내가 ‘자본’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리어 책을 다 읽은 후 나의 자본적 욕망을 온전히 긍정할 수도 그렇다고 비자본적으로 살 용기도 방안도 없는 이중의 부정 상태. 그래서 이 양가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한번 자본의 내용을 정리해 보려 한다. 길은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2. 자본의 가치 공간에 들어선다는 것 – 물신을 숭배하는 종교의 신자가 된다는것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자본사회에 산다는 것은 모든 활동이 상생과 화폐로 매개된 사회에 들어서는 것이라는 점을 안다. 매일 매일의 생활 수단을 구하기 위해 화폐와 상품을 교환하고 또 그 화폐를 조달하기 위해 다시 자신의 노동력을 임금과 교환하는 것이 현대인의 일상적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상품 교환행위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일상화 되어있는 상품제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사회형태인 것인지 깨닫는 것이 <자본>의 출발점이자 도달 지점이다.

 상품제 사회 이전에도 재화의 교환행위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특수한 공간, 특수한 계급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세심하게 규제된 활동이었고, 일반인들의 보편적 활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교환행위가 일상적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이 상품화된 세계를 전제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미 많은 노동생산물이 애초부터 ‘교환’만을 위해 생산되고  그러한 성격이 이미 설계 시점부터 고려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산물이 그것의 ‘유용성’과는 분할되는 ‘(교환)가치’라는 초감각적 성질을 띠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물의 이중적 성격은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집의 가격이 갑자기 등귀하거나 등락할 때 느끼는, 온갖 불안 또는 기대심리로 잘 드러난다. 가치로서의 집의 존재감이 불쑥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상품의 교환행위에 대해 어떤 지점에서 놀라야만 하는 걸까? 그것은 질적으로 상이한 두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두 상품에 공통적이면서 질적으로는 동일하나 양적으로는 차이나는 어떤 것으로  환원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추상적 인간 노동력의 지출’ 즉 상품의 가치라는 발견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품의 가치량이 바로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며, 이것은 ’주어진 사회의 정상적인 생산조건과 그 사회에서 지배적인 평균적 노동 숙련도와 노동 강도 하에서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데 걸리는 노동시간(노동량)‘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치는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고 오직 사물과 사물의 교환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그런데 왜 이 사실이 놀라운 것일까? 이것은 상품의 물적 속성과는 완전히 외적인 ‘생산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의 ’가치‘라는 객관적 형식을 띠고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상품형태로부터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의 불일치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바로 노동의 사회적 관계와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생산자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들이 모두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또는 ‘물건의 속성’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맑스는 이러한 현상을 상품사회 일반의 ‘물신적 성격’이라 표현하며 우리의 전체 삶이 바로 이 허구적 물신성을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 <자본>의 큰 줄거리이다. 허구라고 해서 이 상품의 물신적 성격이 단순히 환상이나 상징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특정 생산양식 하에서 물건이 취하게 되는 사회적 특징을 단순히 자의적 산물이라 치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상품의 물신성과 그것으로 발생하는 모든 사회적 현상은 ‘믿을수록 더 진실성이 생긴다는 점’에서 유사 종교 현상과 더 가깝다.

 생각해볼수록 복잡한 사회적 관계들이 (상품의 가치 또는 화폐처럼) 하나의 독립적인 사물처럼 현상된다는 것은 굉장히 기이한 일이다. 그러한 다른 예로는 언어 또는 번역, 사회의 상징 또는 기호체계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물적 실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교환을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그것의 실체성을 의심해 보거나 그것들을 소유하여 축적하려는 욕망이 일지는 않는다. 하지만 화폐와 상품은 독립된 물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유 가능해지고 동시에 그러한 사회적 관계를 사유화하려는 욕망이 생기면서 축적의 욕망이 발생한다. 이것이 상품사회에서만 나타나는 물욕과 구분되는 ‘치부욕’이다. 그것은 상품의 사용가치와는 무관하게 순수히 가치의 축적을 욕망한다. 특히 가치가 화폐형태를 띠게 되면 화폐의 탈코드적 성격으로 인해, 부는 점점 ‘질적으로 제한되지만 양적으로 무제한’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그리고 ‘부의 무한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의 욕망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치부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 아니라 상품사회 안에서만  존재하는 굉장히 특수하고 역사적 산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사회가 인간의 욕망을 닮았다는 이야기는 허구이다. 그 사회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물을 그 발생 원인과 닮았다는 이야기는 그냥 동어반복적 표현일 뿐이다. 다만 상품사회가 ‘충족되면 바로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버리는 인간욕망의 성격을 잘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3. 보이는 것과  은폐되는 것 사이 – 임금 받는 노예의 탄생

 

 맑스가 자본의 기만성을 비판했다면 바로 상품사회 평면에 내재화 되어있는 이 물신적 성격 때문이다. 노동을 수행하면서 맺게 되는 기본적 사회관계들이  단순히 ‘물건들 사의의 관계‘로 또는 ‘물건의 속성’으로 위장되어 나타난다는 이 기만적 성격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노예와 농노들은 자신들의 지배계급과 맺고 있는 인격적 예속 관계가 적어도 ‘물건들 사이의 관계’로 은폐되지 않았기에 자신의 노동력이 착취되고 있는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산관계가 농노들과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노동력이 무상으로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왜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분명히 보이는 것과 작동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선 상품의 생산관계가 상품 형태를 띠게 될 때, 상품의 가치는 단순히 그 상품의 물적 속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수적 지표로 보인다. 그래서 그 가치가 실재로 의미하는 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사회적 관계와 성격’이라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상품의 교환비율 즉 가치가  사회적 필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단순 통계학적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적 관계’ 즉 자본의 경쟁 관계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이고, 내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방치된 채로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적노동의 사회성은 ‘사회적 절차와 합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자의 욕망을 충족 시켜야 하고 사회의 평균적 생산 속도와 강도를 따라야 하며 수많은 익명의 것에 결과를 맡기되 생존은 철저히 개인에게 맡겨지는 그러한 사회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데 가격으로 나타나는 상품의 가치는 도무지 노동자가 처한 이러한 현실과는 무관한 것으로만 보인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관계가 단순 물건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날 때, 교환자들의 운동은 단순히 ’물건들 자체의 운동‘으로 보인다. 그래서 상품이 직접 운동하는 것과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데, 그 결과 우리는 지대가 토지로부터, 임대료가 건물로부터, 돈이 돈을 낳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상품의 허구적 운동에 의거해서 온갖 상품이 판매되고 개인의 부가 결정되며 심지어 국가경제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하지만 공황 또는 부동산 폭락과 같은 사회적 현상으로 인해 자신이 소유한 상품의 가치량이 강제적으로 결정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이윤이 사회로부터 나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이제 우리의 시야를 조금만 더 확장해서 상품의 교환을 상품 소유자 사이의 관계로 바라보자. 그럼 이 상품의 교환은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거래행위였다는 사실이 보인다. 앞뒤 상황을 다 제거하고 이 거래행위만 고립적으로 바라본다면, 이 행위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두 상품 소유자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 하기 위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동일한 가치의 상품을 맞교환’하는 모습을 띤다. 그리고 많은 부르조아 경제학자들이 이것이 바로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방식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장이 ‘자유, 평등, 소유, 공리’의 원칙에 맞춰 아주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믿음을 유포한다. 특히 이들은 동일한 시장 원리가 노동시장에도 적용된다는 주장을 내세우는데, 이 이유는 자본과 노동의 교환이 일반 상품의 교환과 동일한 성격을 띠고 그럼으로써 ‘가치를 증식’시키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특수성을 일반 상품과 구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리는 맑스의 <자본>이 바로 이 허구성을 증명하는 데 대부분의 페이지를 할당했음을 안다. 자본가는 결코 노동자의 잉여노동에 대해서 지불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잉여의 실체라는 점, 자본가가 자신이 취득한 이윤의 근거라 주장하는 투자 자본 역시 또 다른 노동자의 불불노동의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자본의 큰 기술이 들어간다. 바로 이러한 착취관계를 교묘하게 은폐시키기 위한 너무나도 많은 장치와 이론, 이데올로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당하게 다~~ 지불되었다. 그리고 너희에게도 다 이로운 일이다~’ 라는 것이다. 이중 가장 큰 기술이 노동자의 임금인데, 노동과 자본의 교환이 ‘임금형태’로 나타날 때 가장 큰 착시가 일어난다.

 노동자들은 가치와 잉여가치를 모두 생산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노동력을 대해 지불을 받기 때문에 노동자는 항상 자신이 지불받을 것을 미리 생산한다. 그래서 임금은 노동자가 생산하고 자본가가 취득하는 생산물 중 일정 몫을 화폐형태로 지급하여 돌려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외관상으로는 자본가가 지불자처럼 보이게 되면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채권 채무 관계가 전도되어 나타난다. 또한 임금이 실재로는 ‘노동력의 가격’을 의미하는데도 노동자는 노동을 제공한 후 지불을 받기 때문에, 임금이 ‘노동의 대가’처럼 나타난다. 하지만 임금이 ‘노동의 가격’으로 나타날 때, 노동일이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으로 나뉘어진다는 사실도 은폐되고 모든 노동이 다 지불되었다는 환상을 일으킨다.  특히 시간제, 성과급제, 시간외 수당과 같은 임금형태들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노동 강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임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는 언제나 노동에 대한 정상적 가격을 지불했다는 환상을 일으키고 심지어 통 큰 선심을 베풀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도 만든다.  

 <자본>에는 자본의 착취관계를 은폐시키는 데 공헌을 한 많은 경제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이 소개가 되어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바로 시니어 교수이다. 그는 잉여가치율을 잉여노동/필요노동(= 또는 불불노동/지불노동) 대신 자본가의 이윤율 정식을 (잉여가치 / 생산물의 가치) 사용함으로써 노동자의 착취도가 실재보다 현저히 낮은 것으로 보이게 하고, 절대로 100%를 넘지 않은 합리적 선에서 조정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맑스는 이러한 시니어 교수의 정식이 단순히 개인적 오류 또는 착각이 아니라 아주 불순한 계급적 함의를 담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 정식은 마치 전체 가치 생산물 중 각자의 공헌에 따라 자본가 몫 와 노동자 몫이 분배 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본가는 자본의 대가로 ‘이윤’을, 노동자는 노동의 대가인 ‘임금’을 챙겨가는 협력관계라는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는 자본적 생산관계의 적대적 관계를 윈-윈 관계인 것처럼 왜곡 시킨다. 바로 이러한 왜곡의 끝장판이 바로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 ‘기업이 노동자들을 먹여 살린다’라는 어이없는 통념들이다.

  이렇게 착취관계를 은폐시켜 주는 것만큼, 자본에는 노동력의 착취도를 올려주는 많은 직접적 간접적 방식이 존재한다. 굳이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노골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아도 좋다. 기술혁신을 하여 생활수단의 가격을 떨어뜨려 상대적 착취도를 높이는 방식, 노동 강도와 노동 속도를 높여 노동 생산성을 올려주는 방식, 시간급, 성과급제 같은 임금형태를 사용하여 띠 나지 않게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방식, 유통의 회전 속도를 올리는 방법 등등 간접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이 넘쳐난다. 이러한 방식이 얼마나 착취를 세련되고 정밀하게 은폐 시켜주었는지, 우리는 일상에서도 ‘혁신,투자,개발,테크놀로지,근면,성실’ 이러한 단어들을 굉장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자본의 속도와 시간관념을 내면화 하여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발전의 징후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타이머라고도 스스럼 없이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건강에 인생에 외모에 투자하고, 자기 개발과  삶의 혁신을 꿈꾼다.

 

4. 결코 보이지 않는 것 – 자본관계의 재생산

 

   <자본>의 가장 큰 반전은 마지막에 나온다. 상품으로 시작되었던 우리의 시야를 노동자 계급 전체로 그리고 생산과정을 하나의 연속적인 재생산과정으로 확대했을 때, 드디어 이 생산양식의 실체가 보인다.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자본관계의 재생산’ 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재생산 과정을 통하여 자본가는 한번 선취한 자본가의 위치를 영원히 고정시키고, 노동자는 끊임없이 ‘임금 노동자’로 재생산된다. 노동자는 노동과정 안에서는 생산의 주체로 노동과정 밖에서는 소비의 주체로 자동 모드 전환하며, 알아서 생활 수단을 모두 없애버리고 난 후 어제와 동일한 모습으로 노동시장에 나타난다. 한편 자본은 계속해서 다른 자본과 합병하여 몸집을 불리면서, 끊임없이 잉여 노동자를 밖으로 추방시킨다. 그래서 한 쪽으로는 부를  한 쪽으로는 무수한 산업 예비군과 함께 빈곤을 쌓는다. 이 모든 것이 맑스가 ‘보이지 않은 끈’으로 표현했던 자본의 실질적 포섭과정이고 ‘추방하면서 포섭’하는 자본의 절묘한 기술이다. 그리고 이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저 노동자와 자본가가 만나는 저 유명한 장면이 어떤 과정의 귀결이었는지를 이해한다. 우연적이고 독립적으로만 보였던 자본과 노동의 만남이, 사실은 ‘자본’이라는 하나의 독립변수가 움직이면서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직 자본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자본에 의해서 모든 상황이 재편되고 설계되었던 이 평면의 비밀이 마치 설국열차의 반전과 같이 드러난다.

 

 ”노동에 대한 수요는 자본의 증가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노동의 공급은 노동자 계급의 증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서로 독립된 두 개의 힘이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한 쪽으로 무겁게 되어 있는 주사위처럼, 자본은 두 측면 모두에서 동시에 작용한다. 자본의 축적이 한편으로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키고, 동시에 실업자들의 압렵은 취업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며, 따라서 일정한 정도까지는 노동의 공급을 노동자의 공급과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 이런 도태위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수요, 공급 법칙의 작용은 자본의 독재를 완성한다.(김수행  <자본> 872) “

 

 자본에 대한 양가적 감정과 함께 잘 없어지지 않던 생각이 ‘자본의 이 모든 문제점들도 운용만 잘하면 보완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라는 희망사항이었다. 그래도 북유럽의 선진국을 보면 자본이 굉장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 같고, 그 정도 노동환경에서 생산하는 잉여노동은 충분히 수용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무려 지상낙원으로 이라고 표현하지 않는가. 그래서 자본의 본질이 문제가 아니라 ‘운용의 문제’가 아닐까라는 희망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 평면 자체가 기하하적으로 기울어 있고, 부의 축적은 동시적인 빈곤의 발생과 그 계급의 착취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이상, 어느 정도 이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 것 같다. 저들의 합리적이고 착하게(?)만 보이는 자본도 분명히 어느 제3국의 빈곤과 착취 덕분에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5. 물신과 소외의 세계

 

 자본의 이러한 기하학적 평면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 평면은 (상품과 화폐로) 매개되어 있는 사회이고 상품과 화폐의 물신주의가 난무하고 노동의 착취가 기본적으로 내재화 되어 있는 공간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부분 인간으로 그것도 언제나 대체 가능한 부분으로만 존재한다. 모든 것이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관계와 활동의 직접성이 사라지고, 이 활동을 증명하기 위해 이 매개물의 획득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왜냐하면 잉여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한 나는 내 활동의 생산성을 증명할 수 없고, 화폐로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한 나는 내 존재를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활동의 수단이였던 이 매개물이 목적으로 전도되어 나타나고, 화폐와 상품의 물신주의는 점점 더 힘을 얻게 된다. 이제 수단이 되어버린 노동에서 우리는 더 이상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오직 피로와 슬픔만 느끼며 그 안에서 정신적 에너지 마저 고갈되어 버린다. 그러한 노동자가 잠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노동과 분리된 활동, 즉 먹고 마시고 생식할 때 뿐이다. 바로 동물로서만 존재하는 순간에만 그는 진정으로 자신과 함께 있다고 느끼며 편안함을 느낀다.  그 과정에서 신체의 감각능력도 점점 제한되고 축소된다. 입은 오로지 굶주린 위장과 음식은 피로한 몸을 급하게 충전시켜줄 재료로, 집은 잠만 자기 위한 공간으로 그리고 내 신체와 정신은 오로지 노동의 도구로만 전락된다. 바로 소외와 중독 사이에서 흔들리며 살아가게 된다.

 이 안에서는 자본가 역시 절대 승자가 아니다. 자본의 무한증식 욕망에 때문에 자본가 역시 무한한 결핍감에 시달리며 그가 얻은 결과물을 또 다른 수익 목표를 위해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일을 무한 반복한다. 그리고 또 다시 자신이 욕망을 실헌시키기 위해서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또 다른 소외가 일어난다. 

 이 모든 허구적 욕망과 소비적 감정들은 왜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이 원인은 이 공간의 기초를 이루고 이 모든 현상들의 근간을 이루는 ‘추상노동’ 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동질적이고 평균적인 인간의 평균적인 작업형태의 평균 시간량‘이라는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상품세계와 상품화된 인간 그리고 그것을 근간으로 구축되어 있는 이 사회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허구개념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양태는 절대로 독립적이고 수적으로 구별이 되어 부분으로 분할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바로 양태를 ’유한하고 가분적이며 부분‘들로 생각하는 것이 모든 상상의 출발이며 이 양을 ’무한하고 유일하고 불가분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바로 지성의 적합한 인식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어떤 수로도 설명될 수 없는 많은 사물들 -  이는 수가 모든 것을 규정할 수는 없음을 충분히 보여줍니다-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수와도 같을 수 없으며 주어질 수 있는 일체의 수를 넘어서는 많은 사물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사물들이 그 부분들이 다수성 때문에 모든 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성이 명백한 모순 없이는 수를 허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스피노자의 편지에서)”

 

 또한 양태가 전체와 맺는 관계도 기계의 부품과 같이 합성되고 분할 가능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다. 자연에는 공허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부분들은 이 공간이 존재하지 않도록 그 전체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구별될 수 없고 부분으로 분할될 수 없는 무한한 부분으로 살아간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는 전체와 부분의 구별 마저 없어진다. 이러한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꽃 한송이에 온 우주가 담겨’있는 형상처럼 하나의 관념에는 사유 속성 전체가 담아져 있고, 물 한 방울 안에는 연장 전체가 분할 불가능하게 존재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만약 물질의 단 한 부분이 소멸한다면 곧 그 순간 연장 전체는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관계가 단순 관념적 수사 같이 느껴지는가? 하지만 나는 이것을 <자본>을 읽으며 정말 절감한 것 같다. 맑스가 ‘10 아마포 = 1 저고리’라는 단순한 교환 등식 하나 가지고, 이 상품 교환 속에 깃들어 있는 자본주의적 사회 속성을 모두 발견하고 설명해 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안에 깃든 추상 노동개념을 발견하고 동질화되어 버린 인간상, 분업화되고 단일화된 생산체제, 그리고 그 등가적 관계가 지시하는 물신적 풍조와 공동체 해체 상황 모두 말이다. 이렇게 하나의 관념은 세계를 담고 있고, 하나의 존재 안에 세계가 들어와 있다. 단지 이것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현자의 ‘맑은 눈’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은 이렇게 존재하는 데 ‘추상적 인간‘이란 척도로 삶을 분할 시키고 강제시킬 때, 우리의 신체는 끝없이 반발하고 상상력이 요동치면서 한없이 수동적 정념에 휩싸여 자신의 예속을 스스로 바라는 노예적 인간상을 만들어 내는게  자본의 현주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6. 나가며

 

 이제 <자본>을 다 읽었다. 그리고 나름 그것의 은폐된 기술들에 속지 않을려고 노력한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래서? 라는 의문이 남는다. 내가 사는 사회구조의 작동방식과 성격을 알았다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지혜가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너무나도 모든 것이 실질적으로 포섭되어 있고 이 시스템이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며 저절로 진화하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알고리즘을 스스로 고쳐가며 진화하고 있는 알파고의 모습과 같이 느껴져 전율이 느껴진다. 그리고 연대적 힘 이외에는 이 구조의 법칙이 변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안 이상 이상하게 개인적으로는 더 무력해진 느낌마저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포섭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저항할 수 있는 지점이 삶 전반에 깔려 있다는 이야기 일 것이다. 공부해가며 점점 그러한 지점들을 발견하고 실험해 보는 게 앞으로의 숙제일 것 같다. 스피노자는 사물의 질서를 적합하게 인식할 때, 그 이성으로부터 또 다른 욕망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왜 내 욕망과 행동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적합하게 인식하는 것이 첫 수순일 것이다. 그 첫 걸음을 <자본>과 함께 띤 기분이다.

 

“감정이나 의견에 의해서만 인도되는 사람과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과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쉽게 알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자신이 대부분 모르는 것들을 행하는 반면, 후자는 자기 이외의 아무에게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들이며, 그런 까닭에 가장 많이 욕구하는 것들만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전자를 노예라고 부르고, 후자를 자유인이라고 일컫는다. (에티카 4-66 주석)”

 

 

참고문헌 .......................................................

고병권,  자본 <강의록>

마르크스, 김수행, 비봉  <자본론>

스피노자 <에티카>

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댓글목록

케로로님의 댓글

케로로

아, 글이 너무 좋아요. 제가 <자본> 읽으면서 느꼈던 점(하지만 제 에세이에 담을 수 없었던 점)을 정말 잘 표현해주신 것 같아요. 비욜님 글 보니 스피노자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꼼꼼히 읽고 싶은데, 제가 너무 졸려서... 그치만 부끄럼이 많은 저는 오프라인에서 잘 표현 못하니까, 또 비욜님과는 이야기할 기회가 적으니까 이렇게나마. (근데 왜 파일 다운이 안 될까요? php로 다운되어요. 저만 그런지T.T 아 확장명 바꾸니까 되었어요)
내일 뵐게요. 다른 분들도 평온한 밤 보내시길...

주호님의 댓글

주호

몽땅 다 갈아엎어버리고 다시 쓴다고, 수요일날 제게 말씀해 놓으시고는!
저 빼고 다들 왜 이렇게 대단하신지... 비욜 님 에세이 보면서 제가 배웠던 <자본>의 내용에 대해 다시 복기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아라차도 그렇고, 비욜님도 그렇고 스피노자 얘기를 자꾸 하니까 저도 스피노자 공부 해보고 싶어요!
스피노자 세미나를 만들까... (세미나 부자될듯) 만들겠다고 했던 맑스 세미나부터 일단 만들어야겠죠?
제가 자꾸 이런 말하니까 사람들이 개드립치지 말라고, 입조심하라고... 흑흑 ㅜㅜ
아무튼 고생하셨어요! 내일 밝은 얼굴로(과연?!) 만나요!

삼월님의 댓글

삼월

에세이 정말 좋았어요. 소제목들도 다 좋았고요.
발표 전 날까지 베짱이처럼 빈둥빈둥 놀면서, 비욜님한테 '난 힘들까봐 아무 산도 안 올라갔어요.'
이따구 소리나 했던 게 어찌나 부끄럽던지. ㅠㅠ
작년에 토할 것 같이 힘들게 <에티카> 읽은 보람도 다시 느끼게 해 줘서 감사해요.
비욜님의 성실함, 진실함, 조용한 배려들, 오래 기억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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