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에세이
삼월
/ 2017-06-16
/ 조회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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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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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카리아트 선언
20170617 삼월
한 무리의 유령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 - 프레카리아트라는 유령이. 전 세계의 정부, 자본가들이 이들을 억압하는 동시에 이용하고 있다. 이들에게 찍힌 낙인은 무능력과 게으름이다. 무능력과 게으름은 국가와 자본이 태초부터 노동자를 규율하고 통제하기 위해 찍어왔던 낙인이다. 프레카리아트는 그 낙인 아래 이미 규모 면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늘어났다. 프레카리아트의 규모를 이렇게 늘린 장본인은 바로 자본이며, 프레카리아트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자본과 국가에 맞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 불안정노동에 허덕이면서 몇 개월 간 마르크스의 《자본》을 꾸역꾸역 읽어온 몇몇 인물들이 해방촌에 모여 이 선언문을 기초했다.
1.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
지금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부단히 대립하고, 서로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투쟁은 늘 사회를 개조시키거나, 계급들을 몰락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봉건사회가 몰락하면서 탄생한 시민사회는 이 계급대립을 폐기하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계급, 새로운 억압조건, 새로운 투쟁형태들이 낡은 것을 대체했다. 부르주아지는 애초에 이 계급대립을, 서로 적대하는 두 계급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으로 단순화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분명히 존재하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로 그 정체를 규정하기 힘든 프레카리아트라는 한 무리와 만나게 된다. 유령과 같은 이 무리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을 먼저 살펴보려고 한다.
자본의 근본 문제는 소유의 불균형이 아니라 소유관계에 있다. 소유의 불균형은 소유관계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마르크스는 《자본 Ⅰ》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코 평화적이거나 목가적이지 않았던 자본의 축적과 자본관계의 재생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자본관계는 소유와 노동의 분리를 전제로 하며, 자본의 축적은 소유의 개념을 바꾸면서 진행되었다. 이용하는 자 중심의 ‘공유’는 타자를 배제하는 사적 ‘소유’의 형태로 바뀌었다. 토지를 수탈한 자들은 그 토지를 이용하던 인간들을 청소했다. 생산수단에서 박탈된 자들,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임노동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공적인 것을 관리한다는 스스로의 명분을 저버렸다. 토지의 명목상 소유자였던 국가, 혹은 공동체의 우두머리는 사적 소유의 관리자가 되어 사적 소유를 수호하기 시작했다. 공동체와 ‘공유지에 대한 기억’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소유의 개념이 변화되면서 인간은 신체적으로 생산수단으로부터 박탈되는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공유의 기억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이 박탈이 자연스럽게 인간을 자본가의 작업장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인간이 노동자가 되는 데에는 다시 폭력이 동원된다. 사적 소유의 수호자가 된 국가가 기꺼이 그 폭력을 수행한다.
헨리 8세, 1530년: 나이가 많아 노동능력이 없는 거지는 거지 면허를 받았다. 이에 반하여 건강한 부랑자는 채찍으로 때리거나 구금하였다. … 부랑죄로 두 번 체포되면 반복해서 채찍질을 당하고 한쪽 귀를 잘리지만, 3회의 중범은 중범죄자이자 공공의 적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에드워드 6세: 그의 재위 첫해인 1547년의 한 법령은, 노동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그를 게으름뱅이로 고발한 사람의 노예로 선고하도록 규정하였다. … 주인은 노예에게 아무리 지겨운 노동이라도 채찍과 쇠사슬을 사용해서 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노예가 14일 동안 계속 일을 하지 않으면 종신노예로 선고하고 이마와 등에 S자로 낙인을 찍으며, 만약 3번 도망가면 국가에 대한 반역자로 사형에 처한다.
엘리자베스, 1572년: 허가증이 없는 14세 이상의 거지는 그들을 사용하려는 사람이 2년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가혹한 채찍질을 당하고 왼쪽 귓바퀴에 낙인이 찍힌다. 그런 다음에도 다시 그를 사용하려는 사람이 2년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동일한 형벌이 가해지지만, 18세 이상일 경우에는 사형에 처해진다. 3회 누범은 국가에 대한 반역자로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해진다.
16세기 영국에서 부랑자는 공공의 적이며, 국가에 대한 반역자였다. 마녀 대신 화폐위조범을 처형하게 된 시대에 부랑자는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 자본의 축적을 방해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 악랄한 법률들은 왜 부랑자가 나타났는가를 묻지 않는다. 공유지라는 생산수단과 공유의 기억을 박탈당한 인간이 왜 부랑을 하게 되었으며, 왜 도시에서도 그를 사용하려는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단지 사용되지 못하는 자에게 낙인을 찍고, 목숨을 위협하면서 노동을 강요할 뿐이다. 고용되지 못하면 죽는다는 이 법률의 공포는 지금 이 시대 노동자들의 유전자에도 각인되어 있다. 그 부랑자들은 형벌과 고문 속에서 노동자로 다시 태어나야 했던, 우리 노동자들의 선조이다.
2.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레카리아트
지금 우리 사회에 노동하지 않으면 노예로 삼는다거나, 고용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하지 않는 자에 대한 멸시, 고용되지 않는 데 대한 두려움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살아간다. 노동하지 않거나 고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회 전체의 부를 위협하거나 스스로의 쓸모없음을 인정하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게 노예상태나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작업장으로 걸어들어 가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이미 노예상태이거나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노동이라는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도 제발 나에게 그 형벌을 지속해달라는 간청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서 생산수단과 공유의 기억을 박탈한 이들이 왜 우리 중 일부를 고용하지 않고 내버려두는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은 인간의 노동력이고, 인간에게 노동을 시킬 때만 자본의 축적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은 언제나 가능한 적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려고 한다. 열 사람에게 열흘 동안 시킬 일을 다섯 사람이 스무 날 동안 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다섯 사람의 노동시간을 끝없이 늘려, 마침내는 다섯 사람이 열흘 만에 그 일을 마치도록 닦달하는 꼴이다. 이때 다섯 사람은 과로에 시달리고, 다섯 사람은 실업으로 고통 받게 된다. 어느 작업장에서나 그런 일은 흔하게 벌어진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생산(또는 노동자의 유리)은 그러지 않아도 축적의 진전과 함께 가속화되는 생산과정의 기술적 변혁(그리고 거기에 맞추어 불변자본 부분에 대한 가변자본 부분의 상대적 감소)보다 더 빠르게 진행된다. … 노동자계급 가운데 취업한 노동자들의 과도노동은 산업예비군의 대오를 팽창시키지만, 거꾸로 이 예비군은 다시 그들 간의 경쟁을 통해 취업 노동자계층에게 압력을 증가시킴으로써 취업노동자들이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물론 자본 전체에도 굴종하도록 만든다. 노동자계급 가운데 한 계층이 다른 계층의 과도노동에 의해 강요된 태만이라는 벌을 받는 것(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은 개별 자본가의 치부수단이 되는 동시에 사회적 축적의 진전과 같은 속도로 산업예비군의 생산을 촉진한다. … 임금의 일반적인 운동은 오직 산업순환의 주기적 변동에 따른 산업예비군의 팽창과 수축을 통해서만 규제된다.
고용되지 않는 노동자는 산업예비군으로서 기능한다. 노동자는 실업상태에 있을 때도 자본을 위해 이용된다. 부의 축적은 빈곤의 축적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 효율을 높이기 위해 실업자, 산업예비군, 혹은 불안정노동자라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이 존재들은 추방을 통해 더욱 자본에 예속된다. 이들은 고용되지 못한다는 공포에 떨면서 살아가지만, 노동할 때조차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자본의 세계화와 노동의 유연화가 급속하게 진전된 1990년대에 이 존재들의 일부가 스스로를 ‘프레카리아트’라고 규정하기 시작했다. 정규직으로만 운용되던 작업장에 비정규직이 고용되기 시작하고 파트타이머와 간접고용이 확대되면서, ‘프리’라는 단어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자유를 느낄 수는 없었다. 어느새 ‘프리’는 생산수단에서 박탈되어 노동자가 되어야만 했던 우리의 선조들에게서 맑스가 읽어냈던 그 자유를 의미하고 있었다. 1990년대 일본의 불안정노동은 ‘프리’와 ‘아르바이터’의 합성어였던 ‘프리타’운동을 통해 자신들을 ‘프레카리아트’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이는 일본의 비정규 노동운동이 자신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프레카리아트’ (precariat)라는 개념과도 강한 상관성을 갖는다. 이 말은 원래 이탈리아의 사회운동에서 만들어져 사용되기 시작한 개념인데, 불안정함을 뜻하는 ‘프레카리오’(precario)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라는 말을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임시직이나 계약직, 파트타이머나 아르바이트생, 파견사원 등 이전의 노동자들이 갖고 있던 최소한의 안정성마저 상실한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에 포함된 애초의 노동자 또한 포함한다. ‘노동자’란 말의 외연이 해체되면서 다양한 비정규 노동자나 실업자까지 포괄하는 지점으로까지 확장된 말이다. 노동의 안정성이 사라진 만큼 외연의 뚜렷한 경계가 사라진 셈이다. 비정규 노동조합이 가입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이 개념에 상응한다.
3. 프레카리아트의 입장
프레카리아트가 당면한 문제는 고용 불안에 한정되지 않는다. 빈곤에 시달리며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것은 물론이고, 육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도 없다. 스스로를 인류의 일원, 세계의 주체로 느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삶을 지탱할 활력도 잃게 된다. 무능력과 게으름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생존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에 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국가와 자본에 고용의 안정을 요구하는 일에 치중할 때, 프레카리아트는 자본에 더욱 단단하게 예속된다. 우리의 선조들이 사적 소유의 수호자가 된 국가의 폭력 아래 강제로 노동자가 되어갔던 것처럼.
생산수단과 공유의 기억을 박탈당한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이제 고용의 족쇄와 단결의 가능성마저 빼앗긴 우리 프레카리아트. 우리는 국가와 자본이 우리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용의 안정을 요구하며 매달리지 않는다. 그저 국가와 자본이 보여주는 노동에 대한 모든 환상과 공포에 회의적 미소로 응답할 뿐이다. 국가와 자본이 그 응답에 전율하지 않아도 좋다. 자본은 프레카리아트의 규모를 점점 늘려갈 것이고, 단단한 족쇄로도 묶이지 않은 우리 프레카리아트가 잃을 것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살아가야 할 삶이 있다. 그 삶을 위해,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공모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