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에세이-『자본』 ‘서문’의 문헌학적 탐색ㅠㅠㅠ
선완규
/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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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야 뭐라든 너의 길을 가라”
Segui il tuo corso, e lascia dir genti
― 『자본』 ‘서문’의 문헌학적 탐색
선완규
세상의 책 중에 가장 많은 ‘서문’이 있는 책이 『자본』이다.
본문으로 들어가려면 100여 쪽에 이르는 여러 사연을 지나야 한다.
『자본』은 시대의 정세와 굉장히 긴밀하게 연결된 텍스트다.
정세와 밀접하다는 맥락이 여러 서문이 달라붙는 결정적 이유이다.
시대가 급변하면서 맑스와 엥겔스는 ‘무엇인가’를 더하고 싶어 했고,
번역자와 함께 번역판 발간에 참여하면서 ‘어떤 말’을 더 달았다.
독일어 1판 서문, 독일어 2판 후기, 독일어 3판 서문, 독일어 4판 서문,
프랑스어판 서문과 후기, 영어판 서문 등을 바탕삼아,
맑스의 삶과 시대 속에서 『자본』의 ‘서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1. 『자본』 전야, 맑스는 아팠다
맑스의 글쓰기는 시적이다. 순간 떠오른 영감을 잡는다. 그가 써놓은 수많은 노트가 단서다. 메모와 노트가 실증적 증거다. 상황적 증거도 상당하다. 맑스는 추방된 사람이다. 국적을 빼앗겼기에 국적 없이 산 난민이었다. 유럽을 떠돌아야 하는 그의 포지션은 ‘뚜렷한 실마리를 잡아 진득하게 쭈욱~ 써야 하는 산문적 글쓰기’에 맞지 않는다. 철학, 경제학, 역사학, 문학을 당대의 삶과 정세로 연결하는 ‘맑스의 눈’은 이런 시적 사유의 바탕이었다.
『자본』의 초고라 할 수 있는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가 23권에 이르는 노트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이질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다. 이 노트의 내용과 시대의 맥락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하려면 ‘절단과 채취’를 해야 하는데, 이때는 편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1841년 스물 셋에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로 철학 박사학위 논문을 쓴 뒤, 1843년에 창간한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라인신문은 곧 폐간되는데, 맑스는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이센에 ‘프로메테우스(맑스)가 독수리(프로이센)에게 괴롭힘 당하는 그림(광고)으로 저항한다. 시적이다.
맑스는 저술가이면서 편집자다. 맑스가 살던 시대가 그런 사람을 굉장히 요청했다. 우리에게도 있었다. 1980~1990년대 초까지의 사회과학 시대가 그랬다. 저술가들은 스스로 편집자가 되어 자신들의 생각을 책, 팸플릿, 무크로 기획․저술․편집․제작하여 유통하였다. 합법공간에서는 ‘유시민 등이 책’으로, 비합법공간에서는 ‘이진경 등이 팸플릿과 무크’로. 시공간과 형태와 내용은 달랐지만, 이념과 정세에 무척 민감한 시기였다.
『자본』의 전야는 안타까웠다. 『자본』이 출간되기 3년 전 1864년 10월 4일 ‘맑스가 졸링겐에 있는 칼 클링스’에게 보낸 편지는 이랬다. “저는 작년 내내 아팠습니다(종기와 부스럼에 시달렸지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치경제학에 관한 저의 책인 『자본』은 벌써 간행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몇 달 후면 마침내 종료되고 부르주아지에게 그들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일격을 가하기를 희망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이 언제나 제게서 한 명의 충실한 선구자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은 믿어도 좋습니다.”
1866년 2월 10일 엥겔스에 보낸 편지는 더 슬프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무척 심했던 간 고통이 사라진 1월 1일부터 멋지게 진척되던 내 논문을 중단한 것이네. 물론 ‘앉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네……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누워서 계속 작업을 했다네……나는 원래 나의 계획 밖에 있던 ‘노동일’에 관한 절을 역사적으로 확장했네. 지금 내가 ‘삽입한 것’은 자네의 책(『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 대한 1865년까지의 보충이네” 맑스는 아팠다.
2. 1867년 7월 25일, 맑스 드디어 『자본』을 출판하다
― 독일어 1판 서문(판은 edition, 쇄는 print)
『자본』독일어판 1판 서문은 1867년 7월 25일에 씌었다. 맑스는 『자본』 제1권이 1859년에 출간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속편이고,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내용은 『자본』 제1장에 요약했다고 밝히며 시작한다. 그리고 맑스는 『자본』 제1장의 어려움, 연구 대상 선정에 대한 해명, 경제학 연구의 어려움 등을 설명한다.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 다짐으로 마무리한다. 독일어 1판 서문에는 ‘본다’는 것과 관련해 세포를 들여다보는 현미경이야기 나온다. 생물학에서는 ‘세포’를 현미경으로 보지만, 경제학에서는 이성의 눈, 추상력으로 본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어떤 학문이든 언제나 처음 시작하는 것이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제1장, 특히 상품분석을 다루는 절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나는 가치의 실체와 가치크기는 되도록 평이하게 분석하였다. 가치형태는 화폐형태를 완성된 모습으로 가지며 아무 내용이 없고 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그럼에도 인간의 정신은 2천 년 이상이 지나도록 이것을 해명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보다 훨씬 내용이 풍부하고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다른 가치형태들을 분석하는 데에는 웬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완성된 신체를 연구하는 것이 그 신체의 세포를 연구하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강_44쪽)
― 1872년 봄 페테르부르크에서 『자본』 러시아어판 발간
1872년 6월 21일 ‘맑스가 호보켄에 있는 프리드리히 아돌프 조르게에게’ 보낸 편지가 재밌다. “러시아에서는 이미 인쇄가 완료된 책들을 독자층에게 전달하기 전에 검열관청에 제출해야 하는데, 이 관청이 검열을 통과시키지 않으려면 법원에 고소를 해야 합니다.……[비록 저자는 사회주의자이고 책은 사회주의적 성격이지만 서술이 아무나 접근할 수 없다는 점, 서술이 수학적으로 과학적인 증명을 보유……이 저서를 법원에 고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이에 따라 이 저서에 면허가 주어졌습니다. 이 저서는 3,000부가 팔렸습니다. 러시아에서 일반에 알려진 것은 3월 27일이었는데 5월 15일에 이미 1,000부가 팔렸습니다.”
3. 1872년 3월 18일, 『자본』 프랑스어판 발간에 참여하다
― 프랑스어판 서문
프랑스어판 서문은 ‘맑스가 산 세바스찬에 있는 모리스 라 샤르트에게’보낸 편지가 그대로 실렸다. “『자본』의 번역을 정기적인 분책으로 나누어 출판하겠다는 선생의 생각을 크게 환영하는 바입니다.” 프랑스어판 『자본』은 분책했다. 노동자 계급이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면 하는 전제였다. 첫 장보다가 던져버릴까 노심초사하다가 그만의 방법을 찾았다. ‘학문의 가파른 마다하지 않고 계속 올라가는 사람만이 절정에 이를 수 있다’. 노동자를 향해 쓴 글이다. 맑스는 노동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했으나, “빨리 알아내고자 하는 성향을 지닌 프랑스 대중은 책의 앞부분만 읽고는 더 이상 읽기를 중단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한다. 그렇지만 “학문을 하는 데에는 평탄한 길은 없으며, 가파른 험한 길을 힘들여 기어 올라가는 노고를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만이 빛나는 정상에 도달할 가망이 있습니다.”는 말로 포기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강_62~63쪽)
4. 1875년 4월 28일, 프랑스어판은 또 하나의『자본』
― 프랑스어판 후기
맑스는 프랑스어판 출간 작업에 적극 참여한다. 그는 프랑스어판 후기에서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것을 사과하면서, 프랑스어판 교열작업을 착수하면서 어떤 논의는 축약하고, 또 어떤 논의는 확장하는 등 새로운 개정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자본』이 분책되어 내용이 추가되거나 수정할 것이 많았다. 원본인 독일어판에는 없는데, 프랑스어 번역본에 새로운 내용이 들어간 것이다. 번역본이 원본이 되는 상황이다. 맑스는 후기에 “이 프랑스어판은 독일어 원본과는 다른 독자적인 학문적인 가치가 있으며 독일어에 능통한 독자들도 참고할 만한 것이다.”(강_64쪽)라고 하면서 프랑스어판을 독자적인 책으로 인정하자고 한다.
5. 1873년 1월 24일, 장문의 후기를 집필한 맑스
― 독일어 2판 후기
『자본』에 붙어 있는 서문과 후기 중 가장 길다. 그만큼 할 말이 많았다. 1873년에 2판을 인쇄한다. 2년 전인 1871년 파리코뮨이 끝난다. 파리코뮨은 1871년 탄생한 역사상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자치정부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하고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파리 시민들의 직접 선거룰 통해 선출된 80여 명의 코뮨 평의회 의원들의 대부분은 노동자였다. 72일 만에 무너졌다. 맑스는 생각이 많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중요한 개념이 있었고, 부르주아, 국가 등등 입장이 더욱 명확해진다.
『자본』 2판 후기는 1판에 수정사항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맑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독일경제학에 대한 비판과 『자본』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재비판이다. 그러면서 『자본』의 연구와 서술방법에 대한 설명한다.
맑스는 “독일에서는 경제학이 오늘날까지 외국의 학문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독일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이 영국/프랑스보다 더디었고, 따라서 경제학이 육성될 수 있는 토양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은 항상 영국/프랑스로부터 수입될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독일에서 경제학이 뒤죽박죽인 것은 그것이 단순히 외국에서 수입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제대로’ 수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자본』 비판에 대한 재비판이다. 맑스는 『자본론』에 적용된 방법이 거의 이해되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자본』의 방법론에 대한 여러 비판들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형이상학적 분석적, 실재관념, 헤겔) 맑스는 이러한 비판들에 일일이 반론을 제기하기보다는 자신의 방법론, 역사유물론이라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면서 흥미롭게도 러시아 서평자 카우프만의 글을 길게 인용한다. 이 서평이 인상 깊었던 것 같다.
맑스는 1848년 혁명에 대해서도 말한다. 맑스의 삶은 1848년 혁명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를 1848년 혁명으로 산다.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썼고, 프랑스에서는 1848년 혁명이 일어났다. 계급혁명이었다. 신분해방을 이룬 것이 1789년 프랑스 혁명이라면, 보편자였던 부르주아가 특수 계급이라는 사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성이 드러난 게 1848년 혁명이었다. 맑스가 더 심혈을 기울여 밝히고자 했던 것은 부르주아 독재다.
―1883년 3월 14일 런던, 맑스 영원히 잠들다
6. 1883년 11월 7일, 엥겔스가 맑스를 대신해 집필하다
― 독일어 3판 서문
『자본』의 세 번째 판본의 서문은 엥겔스가 썼다. 맑스의 죽음 때문이다. 제3판 서문은 방법론이나 논쟁보다는 무엇이 어떻게 수정되었는지를 ‘투명하게’ 밝힌다. 제3판의 개정은 주로 프랑스어판에 기초해 이루어졌다. 엥겔스에 따르면 특히 정정과 보충은 거의 ‘자본의 축적과정’에 국한되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본의 축적과정’의 본문이 최초의 초고를 거의 그대로 반영해 문체나 어법, 논증의 제시에 있어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정은 이미 맑스가 기본적으로 해놓았으며, 엥겔스 자신은 이를 “원래의 본문과 가장 적합하도록 번역”만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7. 1886년 11월 5일, ‘영어판 서문’이라는 귀신에서 벗어나다
― 영어판 서문
“오늘 아침 나는 서문의 마지막 교정본을 출판업자에게 가져다주었네. 그것으로 마침내 나는 이 귀신으로부터 벗어났네. 바라건대 14일 후에는 자네에게 『자본』1권 영어 번역본 한 권을 보낼 수 있을 것이네” 엥겔스가 호보켄에 있는 프리드리히 아돌프 조르게에게 보낸 편지다. 1886년 11월 29일이다.
엥겔스는 영어판 번역이 늦어진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서문을 시작한다. 또한 누가 영어판을 번역했는지 밝히고, 영어판이 독일어 제3판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맑스의 ‘일련의 노트’와 프랑스어판을 추가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엥겔스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용어의 사용’이다. 엥겔스가 이윤과 지대, 매뉴팩처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은 ‘용어’가 기존의 부르주아 경제학의 토대 위에서 설명되는 경우 이에 대한 과학적 개념을 얻을 수 없으며, 또한 생산양식이 변화함에 따라 기존의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이 창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기존의 경제학이 ‘이윤과 지대’의 통속적인 용법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그 “기원과 성질에 관해, 또는 그 가치에 분배를 규제하는 법칙에 관해 명백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한편 모든 공업을 구별 없이 매뉴팩쳐라는 용어로 사용한 결과 “노동의 분업에 근거하고 있는 진정한 매뉴팩쳐의 시기와 기계의 사용에 근거하고 있는 근대적 공업의 시기”에 대한 구분이 불분명해져 버렸다고 주장한다.(29쪽) 모든 공업을 매뉴팩쳐로 규정하는 것은 근대적 생산형태를 영원하고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행태이며, 이러한 태도는 “근대적 자본주의 생산을 인류 경제사의 과도적 단계로 보는” 이론, 즉 역사적 이론에서는 경계해야 할 태도라는 것이다. 엥겔스는 『자본』 제1권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독립적인 저서라는 점과 제2권은 제3권 없이는 불완전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8. 1890년 6월 25일, 엥겔스 『자본』을 꼼꼼히 마무리하다
― 독일어 4판 서문
제4판 서문에는 특별한 내용은 없다. 다만 본문과 주(註)를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하는데 주력했다고 엥겔스는 밝히고 있다. 프랑스어판, 영어판, 맑스의 메모를 이용해 몇몇 보충을 했고,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보충적인 설명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또한 수많은 인용문들을 완전히 교열하는 데 힘썼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엥겔스가 중심적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는 맑스의 인용에 대한 논쟁이다. “맑스가 인용한 인용문의 정확성이 의심받았던 단 한 번밖에 없었다. 그런데 맑스가 죽은 뒤에도 이것이 문제로 되고 있기 때문”에 그 논쟁의 경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맑스의 인용문이 ‘위조’를 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비판이 이루어졌는데, 그 비판자는 자신이 차츰 불리한 위치에 처해지자 논의의 핵심을 벗어난 부차적인 문제만을 물고 늘어졌다는 것이다. 맑스 사후에야 이 논쟁은 종결을 맞았고, 맑스가 승리했다고 엥겔스는 전한다.
9. 1987년, 한국어판 『자본』이 탄생하다
― 강신준 교수 ‘김영민’이라는 가명으로 번역
그는 『자본』으로 삶이 바뀌었다. 1974년 고대 독문과 입학, 독일에 가서 철학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긴급 조치로 1학년 마치고 군에 입대하여 1978년에 복학. 철학을 공부하려던 학생이니『자본』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마침 독일에 누나가 있어 부탁했다. 『자본』의 표지를 벗기고 괴테 책의 표지를 입혀 보냈다. 주요 내용을 발췌한 문고본이었다. 제대로 된 『자본』을 보고자 서울의 대학도서관을 다 뒤졌다.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성대 사서가 독일어 원본『자본』을 찾아주었다. 복사를 할 수 없었다. 당시에 중앙정보부 요원이 학교 안팎을 사찰. 의정부까지 가서 책 전체를 한 번에 복사하고 나서 파지까지 전부 다 수거하고서야 자신만의 『자본』을 가질 수 있었다. 1986년의 어느 날, 이론과실천의 대표가 원고 뭉치를 보따리에 싸서 주었다. “운동권 학생 6명이 오랫동안 강독을 하면서 나눠서 번역을 한 원고다. 그 원고를 출판하고 싶은데 출판을 해도 될 상태인지 한 번 봐 달라.” 검토 끝에 이 상태로 내기는 힘들다고 전했다. 그러자 이렇게 제안했다. “그럼, 교열을 봐!” 이렇게 최종 원고가 만들어졌는데,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다. 애초에 남의 원고니까, 고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원고가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찍어내는 게 의미가 있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당연히 찍으면 고발이 되고, 유죄가 될 가능성이 크니 가명으로 출판을 했다. 어차피 문화공보부에 납본을 하고 1주일쯤 뒤 검열을 받으면 판매 금지가 될 테니까, 딱 한 주만 팔자, 이런 각오였다. 실제로 그 한 주일 동안 전국에서 상당히 팔렸다. 물론 그러고는 바로 고발되었고. 이론과실천 대표와 편집장은 곧바로 따로 도망을 갔다. 그 와중에 당시 대표의 아내였던 강금실 변호사가 남편을 변호하고자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하고.
담당 검사는 기소를 못했다. 기소하려면 『자본』이 이적 표현물이라는 걸 입증해야 했다. 그런데 검사가 대여섯 번을 읽어봐도 무슨 소리인지 몰라 답답해했다. 검사가 기소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대표는 자수를 했고, 조서를 꾸미던 도중에 검사가 마침내 기소를 포기했다. 우여곡절 끝에 『자본』을 옥죄던 족쇄가 풀린 것이다. 이렇게 『자본』은 한국의 독자를 처음 만난다.
10. 서울출판사의 『자본』, 북한판 『자본』
놀랍게도 해방 직후에 발간된 한국어판 자본론이 있었다고 한다. 1947~48년에 서울출판사에서 최영철, 전석담, 허동의 공역으로 자본론이 발간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자본』을 한글로 최초로 번역한 학자는 역시 남로당 계열이었던 전석담 교수다. 전 교수는 국민대학교, 동국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다 월북해서, 나중에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북한판 자본도 있었지만, 해방 직후 맑스, 엥겔스가 잠시 주목을 받다가 곧바로 한국전쟁. 북한에서 맑스, 엥겔스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계열이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이들이 숙청 당해 북한에서는 사실상 맑스, 엥겔스 연구의 명맥이 끊겼다. 북한판 『자본』은 러시아판을 중역한다. 이 러시아판은 레닌 사후 스탈린의 해석이 대폭 반영된 책이었다.
11. 백의출판사의 『자본』
1989년 백의출판사도 자본론을 발간했다. 이 책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출판사'에서 간행한 『자본론 제2권』(1957년)을 대본으로 삼아, 일부 수정하여 편집·발행한 것이다.
12. 김수행본 『자본』
금서 목록에서 풀린 후 1987년 서울대학교에 부임한 김수행 교수가 번역(영어 중역)한 자본론(1989년, 비봉출판사) 2권이 출간되었다. 서문에서 자신의 책을 읽을 청년들이 “자본주의를 가장 이상적인 경제체제로 여기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처럼 현실에 순응하지 않기를, 계급투쟁을 통한 역사발전론을 주장한 마르크스처럼 역사변혁의 주체가 되기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13. 맑스 그리고 『자본』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참고문헌
고병권, 『자본』 강의록, 2017.
강신준, 『자본 1-1』 경제학비판, 2008.
한네스 스캄브라스 엮음 김호균 역,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 1990.
비탈리 비고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마르크스 ‘자본’ 탄생의 역사』, 2016.
― 용두사미 ㅠㅠ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