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내일 발표할 에세이입니다~ +1
유택
/ 2017-06-13
/ 조회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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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발표할 에세이 입니다.
이번 에세이 쓰면서 다른건 잘 모르겠고
공부 좀 제대로 안 된 것 같아서 부끄럽고 아쉽고...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것과 함께 역시 마음으로는 아직 못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그래서 에세이는 스스로 써봐야 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 (영혼 개털리기~)
내일 봐요~ (여튼 난 맑스 에세이 이걸로 끝이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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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파레지아 에세이 6월14일 유택
친구와 가족에게 들려주고 싶은 맑스의 《자본》 이야기
내가 맑스 <자본>을 읽은 이유
눈에 보이는 돈의 형태로 나타나든 가사와 돌봄, 감정 노동의 형태로든 사람들은 평생 노동을 한다. 지금 나 또한 노동을 하고 돈을 받는다. 월급날이 다가오면 그 동안의 노동이 보상 받는 것 같아서 또다시 힘을 낸다. 그러나 언제나 드는 생각이지만 이렇게 한평생 노동만 하다가 살다 죽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그러면 노동 안 하고 살고 싶은 건가. 생각해보면 너무 심심할 것 같기도 하다. 다시 생각해보자. 살아가려면 돈은 필요하다. 노동은 생존에 꼭 필요하지만 지금의 노동현실은 역시 나를 힘들게 한다. 왜 나는 이렇게나 힘든 걸까. 어디서부터 생각을 풀어가야 하는가. 이런 문제 의식이 맑스의 <자본>을 읽은 이유이다.
맑스 <자본>은 무슨 내용인가
<자본>에서 키워드를 뽑아보자. 상품, 화폐(돈), 가치, 공장, 노동, 임금, 계급이 있다. 제일 먼저 상품이 있다. 사용될 상품은 시장에서 돈을 매개로 교환된다. 상품의 가치는 어떻게 매겨지는 걸까? 상품이 만들어지는데 얼마만큼의 노동이 들어갔는가로 측정된다. 그렇다면 노동이 들어간 만큼 공평하게 가치 매겨져 등가교환이 된다면 이 세상은 정말 정의로운 곳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공평과 공정과는 먼 사회다. 그래서 맑스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부르주아를 위한 정치경제학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맑스는 우리를 곧장 공장 안으로 안내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가진 사회에서 공장은 가치가 매겨지는 상품이 생산되는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서 기계는 인간이라는 노동력을 사용하고 빨아들여 가치를 지닌 상품들을 토해낸다. 생산의 주체가 이제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된다.
자본가는 시장에서 사회적으로 합의된 임금을 주고 노동력을 구매한다. 그러나 살아 숨쉬는 이 노동력은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구매한 금액만큼만 자본가가 쓰고 멈출 수가 없다. 따라서 기대했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가 노동력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구매된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이 생산하는 가치’의 차이, 즉 잉여가치이다. 이 잉여가치가 돈을 그냥 같은 돈으로 두지 않고 자본이라는 다른 존재로 전환 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돈과 자본은 다른 개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은 ‘이중의 자유’를 통해 개인 노동자로 탄생하였다. 봉건제가 해체되어 감에 따라 신분적 예속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생산수단(토지)으로부터의 자유가 생겨나고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꼭 필요한 노동자라는 계급 집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자본은 아무런 내적 규제가 없는 체제이다. 잉여가치를 뽑아내어 더 큰 자본으로 재탄생 하는 것만이 자본의 존재 이유이다. 계속해서 자기 증식을 위해 인간의 노동력 즉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착취한다. 자본이 더 거대해질수록 돈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다수의 빈민 노동자가 양산된다. 다수의 실업자는 자본주의에게 꼭 필요한 인구집단이 된다. 대량의 실업자의 존재는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격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해준다. 왜냐하면 대체할 인력으로 준비 되어 있는 실업자, 즉 산업예비군으로 인해 노동하고 있는 현실의 노동자는, 자신 스스로 노동 강도를 올릴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빈민의 노동은 부자의 보물광산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자본은 더 큰 잉여가치를 낳고 더 큰 자본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과로와 실업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적당하게 일하고 골고루 나눠 갖고 쓰며 사는 사회가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이다.
지금까지 맑스가 ‘자본의 현재의 역사를 분석했다면 <자본>의 마지막 부분은 ‘자본 형성의 역사’즉 역사적으로 처음 자본이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고 축적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조상이 아껴 쓰고 열심히 벌고 모아 자연스럽게 종자돈이 마련되었다는 우리가 믿는 이야기는 사실 거짓말이다. 자본 형성의 역사는 식민제도, 국채제도, 조세제도와 보호무역 등의 이름으로, 무수히 많은 인간들로부터 폭력과 범죄를 통한 이루어진 인간 수탈의 역사이다. 그렇게 자본의 시초 축적, 본원적 축적이 이루어졌다. 국가 폭력을 등에 엎고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시작되고 완성된 자본주의, 인간이 인간을 먹은 죄의 역사가 우리의 자본주의이다.
돈이 정말 돈을 낳는가?
‘돈이 돈을 낳는다’는 말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수긍한다. 그런데 그게 맞는 말일까. 이 말은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다. 타인의 노동이 착취되어 돌아온 은행 이잣돈을 우리가 거머쥐는 것은 아닐까. <자본>에서 ‘돈이 돈을 낳는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자본은 자본을 낳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돈은 돈을 낳지 않는다.
자본가는 월급을 우리에게 미리 지불하지 않는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시장에서 구매하여 다 쓰고 난 후, 즉 ‘투자한 사업의 자기 본전을 찾고’ 거기에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잉여가치까지 낳았을 때야만 비로소 월급이라는 이름으로 자본가로부터 지불 받는다. 이때 이 잉여가치는 자본으로 다시 전환 되어 사업에 재투자된다. 자본의 재생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가가 자기의 재산을 털어 투자했다는 그 본래의 사업자본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 이전의 노동자들이 이미 생산해낸 가치들의 축적인 것이다. 이제 잉여가치가 잉여가치를 낳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즉 사업가 소유의 본래 장사 밑천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사실 노동자가 보존하고 생산한 가치들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돈은 돈을 낳지 않는다, 자본은 자본을 낳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 모든 자본주의적 절차들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자의 생명력이 있어야 성립될 수 있다
돈이 조개껍데기로 유통되더라도 화폐적 의미에서의 중요성은 똑같다. 생각해보면 돈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즉 노동사회적 관계가 돈이라는 이름의 사물로 표현된 것이다. 돈이라는 사물에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우리가 돈 속에 은폐되어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돈이라는 사물 자체를 신처럼 물신화하게 한다. 이것이 맑스가 말하는 물신주의이다. 돈이 하나의 종이였다가 어떤 조건에서는 신이 된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세상을 원망하며 돈을 불태우는 사람일 것이다. 돈이 돈을 낳는다는 잘못된 말, 그 말 안에는 무수히 지불 받지 못한 노동 착취의 순환들이 숨겨져 있다.
지금의 노동, 과연 신성한가?
돈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되는데 그 이상을 하고도 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까.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노동 이상으로 일을 강제 당하기 때문에 그럴까. 그래서 항상 일을 떠올리면 뭔가 억울하고 피곤한걸까. 맑스는 인간의 노동에는 합목적적인 성격이 있다고 한다. 인간노동은 합목적적이기 때문에 노동 소외가 일어난다고 한다. 즉 목적을 위한 의지의 예속. 그래서 사람은 사람에게 억지로 일을 시킬 수 있게 된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최대한도로 노동을 강제하려고 한다. 노동자는 가처분의 시간 즉 노동하지 않는 자신의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그래서 현재의 노동은 언제나 소외되고 또 신성하지도 않다. 노동은 언제나 하기 싫지만 억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불공평하고 언제나 과중한 것이 자본주의 노동의 본질이다
지금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일을 통해 돈을 벌고 돈을 매개로 그만큼의 교환가치를 구매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게 아파트가 되었든 유행하는 제품이 되었든 여행상품이 되었든 말이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가처분 시간, 쉽게 말해 개인적 자유 시간을 누리고 싶어한다. 동물처럼 입고 먹고 놀고 잠자고 싶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마음대로 자신의 시간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라는 인간 유형을 만들어내고자 역사적으로 폭력적 규율을 통해 노동자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존재하는 특이한 인간 유형을 만들어냈다.
신분제 사회에서 농노의 노동을 보자. 그들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노동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영주를 위해 부역노동을 바쳐야 했다. 노동이 그 목적에 따라 확연히 양분되어 있어 모두가 이 노동이 누구를 위한 노동이고 저 노동이 누구를 위한 노동인지 알 수 있었다. 노동은 예나 지금이나 힘든 건 마찬가지만 예전에는 최소한 노동의 인간 소외는 없었다.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생산물을 생산한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생산물과 그 가치에서 소외 되어 있고, 노동과정에서도 단지 돈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소외된 노동을 억지로 하고 있다. 그것은 생산수단 없이 단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이름을 가진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뿐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생명은 시간이기도 하다. 노동은 곧 인간의 생명이다. 지금의 우리는 어쩌면 삶의 모든 시간들이 노동을 하는 시간과, 노동을 그 다음날도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해야만 하는 시간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처분의 시간, 정말 내 생명을 느끼고 자유롭게 창조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우리 삶 속에 과연 존재할까. 가처분의 시간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가치로 정의된다면, 즉 가치의 척도가 바뀐다면 아마 세상은 그리고 우리의 삶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돈 받은 만큼 일한다?
임금은 그 배후의 착취적 노동사회적 관계를 덮어버린다. 임금을 받고 그만큼의 노동을 우리는 했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월급 받는 그 순간 만큼은 마냥 우리는 행복하다. 그러나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듯 또다시 고통스러운 노동은 지속된다. 그리고 자본가에게는 노동자에게 월급을 줌으로써 노동력 구매에 ‘줄 것은 줬다’라는 행세까지 하게 만드는 것이 이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제도이다.
정규직도 마찬가지이지만 더 첨예화된 모순을 안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을 생각해 보자. 시간급제 임금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더 많은 임금을 비례적으로 받는다는 도덕률을 심어준다. 성과급제 임금도 생산물의 양을 기준 삼아 가치를 잰다는 점에서 시간급제 임금의 변형된 형태일 뿐이다. 노동력을 판매해서 살아가야 하는 생명체로 보지 않는다. 하루에 8시간 일하는 정규직이든 3시간짜리 시급의 비정규직이든 사람은 생명체여서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먹고 입고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시간당 얼마짜리의 시급 책정에는 그런 사항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즉 재생산 없이 그냥 마구마구 써도 되는 마모되지 않는 기계와 같이 취급 당한다. 더 슬픈 사실은 시간급제와 성과급제, 시간외수당은 노동자로 하여금 스스로 더 노동을 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가족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조금만 참고 더 일하면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그 결과 노동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노동강도는 강해진다. 거대한 실업인구와의 경쟁 속에 노동시장에서의 노동력은 저평가되어 노동가격 즉 실질임금은 하락하게 된다.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
자본주의의 탄생은 공동체 해체와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 연결된다. 예전에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 구성원이 다 같이 굶어 죽으면 죽었지 어느 한 사람이 굶어 죽지는 않았다고 한다. 소유의 개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전 시대에는 공유지와 같은, 공동체의 것, 우리의 것, ‘함께 있음’이라는 개념이 있었던 반면에 근대 자본주의로 접어들면서 타자 추방의 권리를 내포하고 있는 근대적 소유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노동만을 강요당하고 착취되는 다수의 목소리 없는 인구집단일 뿐인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소비의 주체에서 탈락되지 않을 만큼의 최소한도의 임금을 받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수동적 인구집단인가. 여기서 맑스의 계급 적대의 대립 개념이 나온다. 자본가의 권리도 권리고, 노동자의 권리도 권리인 이상 그 둘의 대결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 여기엔 정해진 답이 없다. 순전히 힘의 원리로 조절된다. 그래서 노동자의 단결, 혹은 연합, 힘 없다고 치부되는 무수한 노동자들이 예전의 공유에 대한 기억들, ‘함께 있음’을 기억하고 그 감각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돈의 노예일까? 돈으로 표현되는 노동사회적 관계를 다시 한 번 더 떠올려야 한다. ‘관계’라는 말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말, 자본주의 비판의 핵심이다. 부의 축적은 곧 빈곤의 축적이다. 계급은 재생산된다.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한다. 즉 우리는 타인과 맺는 ‘관계’이다. ‘흑인은 흑인이다 어떤 조건에서 흑인은 노예이다’라는 말처럼, 어떤 역사적 조건과 관계 아래에서 우리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의미 지워지는지 볼 수 있는 ‘다른’ 눈이 중요하다. 역사유물론적 관점으로 씌여진 맑스의 <자본>(1868년)은 여전히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사유의 방식이다.
댓글목록
유택님의 댓글
유택
노들 후원주점에서 처음으로 정아은님 등단한 소설가고 책도 두 권 냈다는 이야기 들음. ^^;;;
어제 급 배달온 목돌리는 코스프레 여왕 애정 결핍녀 정아은님의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 '모던하트'와 다음 작품 '잠실동 사람들'
이제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겠구나~~~
(읽구 나중에 왕창 ㅆㅇ줘야징~~ ㅎㅎㅎ)
하기사 고샘 수업 그리 들어도
고샘의 그 많은 책들 하나도 안 읽는 사람도(저기 보여요!) 있으니 뭐.
아 신나~ 에세이도 완벽히 끝냈고~
이제 푸코 <주체의 해석학>의 거/대/한 총괄 후기만 끝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