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에세이 계획서 +2
정아은
/ 2017-05-25
/ 조회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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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회사를 그리워하는가
정아은
문제의식
협업과 분업 파트를 읽던 때, 예전에 회사 다니던 때를 내가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는 내가 회사 다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회사 이외에는 군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공동체가 파괴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회사 다니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지금도 어떻게 회사 같은 데 속할 수 없을까 하고 틈만 나면 궁리하는 것은 내 성별과 관련돼 있지 않을까? 내가 여성이라는 종족에 속해 있기 때문에, 회사라는 공간에 강제로 징집되어야만 가정이라는 ‘사랑의 얼굴을 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논리전개
1. 여성이 머무르는 공간, 가정
2. 자본주의의 자장에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여성의 위치 변화
-가정의 각종 행사에서 면제됨
-의미 있는 사회적 관계망이 생김
-집안에서 온종일 가사노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집에서 논다며?”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음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편하게 먹고 산다는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음
-작게는 쇼핑의 문제부터 크게는 거주지를 정하는 문제까지, 여러 현안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음
-직접 번 돈으로 가용할 시간을 살 수 있음. 즉 가족들을 위해 자신을 언제나 ‘대기’ 상태로 만들어야 하는 여성이 가부장제 하에서 ‘부분적 자유’를 살 수 있게 된다는 것. 남편과 비슷하게 벌거나 더 많이 벌어야 ‘도우미’를 당당하게 ‘쓸’ 수 있는 메커니즘.
-수입이 보장돼 있지 않은 여성은 이혼도 못 함. 싫어서 미쳐버리겠는 남자와 마르고 닳도록 살아야 함.
3. 마르크스의 한계
-노동자의 재생산에 대해 들여다보았음에도, 인류의 반인 여성이 행하는 커다란 규모의 불불노동(가사노동)의 세계를 지나쳐갔음. 각주 하나로 처리하고 넘어감. 재생산의 요소에 끌어들이기 시작하면 각종 잡다한 요소가 들어와 논지를 흐릴 수 있다는 이유로. 그러나 그 ‘잡다한’ 요소 중 하나에, 인류의 반이 인생을 저당 잡혀 있음. 가족들과 눈만 마주치면 밥을 해주거나, 빨래를 해주거나, 간식을 챙겨주거나, 온갖 잡일을 당연히 해주도록 평생 동안 가정돼 있는 내게는 자본론의 모든 다른 구절보다 이 각주 하나가 커다랗게 들어옴. 내 삶과 가장 관련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여성이 노동을 함으로써 속박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성별분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했음. 이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스스로 ‘자연스러운 재생산’을 하도록 내버려둔다는 언급에 드러남. 그 ‘자연스러움’에는 인류의 반인 여성이 매일매일 눈뜨면 마주쳐야 하는 엄청난 양의 불불노동이 들어 있음을 보지 못함. 여성의 가사노동을 천연자원처럼 그 자리에서 늘 퍼올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장악하고 빨아먹듯 남성이 여성의 노동력을 장악하고 빨아먹고 있는데 그 영역을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버림. 여성인 나의 눈에 이 두 세계는 동등한 규모와 치명성을 갖고 있어 보이는데.
4.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상황
-18세기에는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면 된다는 운명론적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이 의지를 가지면 자신의 생을 바꾸어나갈 수 있다는 계몽주의가 유행했음. 그 여파가 아이라는 존재에게도 미침. 이전에는 내버려두면 알아서 큰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이제는 어떤 어른이 의지를 갖고 잘 인도해주어 ‘잘’ 커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됨. 이때 아이를 잘 인도해줄 ‘어떤 어른’으로 갑자기 ‘어머니’가 호명되고, 수많은 남성 지식인들이 ‘어머니가 아이를 직접, 성의 있게, 잘 키워야 한다’는 논리를 설파함(그것이 어머니의 ‘본능’, 여자에게 태어날 때부터 장착된 ‘자연스러운’ 특성이라면서). <에밀>을 쓴 루소가 그 대표임. 이 사상이 한 세기 동안 알차게 무르익어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에는 이미 모성신화가 상당히 공고해졌음. 그리하여 가사일에, 아이 양육에 대한 부담까지 더해 가정에서의 강화된 불불노동에 시달렸을 여성들의 이중노동의 고충을 마르크스는 보지 못했음. 시대의 한계.
-마르크스는 시대 상황 상 그랬을 수 있으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부분을 놓치면 안 됨. 여성이 행하는 온갖 종류의 불불돌봄노동은 ‘계속 지켜나가야 할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전통’이 아님.
마무리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사이로 난 험하고 가파른 길. 여성은 그 위에서 곡예하듯 살아야 함. 현실의 내 삶과 연계해 생각하면 무턱대고 자본주의를 적대시할 수 없음. 악으로 악을 물리친다고 할까. 여성에게 자본주의는 한시적이나마 도구가 될 수 있음. “비자본주의적으로 살아라”는 말을 들으면 씁쓸해짐. 왜? 여성은 이미 비자본주의적으로 살고 있으므로. 타의에 의해 이미 충분히 비자본주의적으로(‘자연스러운’ 돌봄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므로. 오히려 여성은 좀 더 자본주의적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여성할당제가 한시적으로 필요하듯, 일제에 예속되어 있었던 한국에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의 달성보다는 우선 ‘민족국가’를 이루는 것이 당면한 과제였던 것처럼, 여성도 가부장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시적으로 자본주의와 친할 필요가 있음. 둘 다 ‘악’이지만 택하라면 나는 자본주의를 택할 것. 가정에의 예속은 24시간이지만 자본에의 예속은 출퇴근 시간 사이로 한정돼 있으며,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땐 잠시나마 도망칠 수 있으므로(퇴사하고 좀 쉬는 등등의 방법으로). 그러나 가부장제에서는 못 도망감. 영원히 영원히.
-<자본론>을 읽으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생각보다 들지 않았지만(오히려 자본주의를 잘 이용해먹어야겠다는 생각과 애정이...) 현상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방법, 시선의 각도와 강도를 배워감.
댓글목록
케로로님의 댓글
케로로
두 가지 주제 중에서 고민하시더니 실용적(?^^)인 선택을 하셨네요. 협업 과제 때, 아은님의 과제가 신기해서 이야기 나누었던 기억이... 그때만큼 절절한 느낌의 문제의식... 여성의 가사노동 문제 세미나 시간에도 여러번 나왔는데, 제게 다른 주제만큼 절실히 와닿지 않았던 이유가, 누군가의 재생산을 위해 불불노동을 한 경험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여성인 제가 이럴진대 남자들은 오죽할지... 역시 계속 이야기를 해야! 세미나 때 급여명세서에 가사노동 항목 넣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기억나요.) 남의 것을 신나게 무료로 이용해먹다가 그걸 다시 상품화해서 이익을 남기는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에 다시 한 번 감탄하고, 이전 체제와 결합되었을 때 더 심한 착취가 일어난다는 말도 생각나고...
과중한 엄마의 역할에 대해서도 집에 가는 길에 같이 이야기 나누었던 기억도 나요. 그걸 이용한 자본주의적 상품들에 대해서도... 가사노동뿐 아니라 맑스가 <자본>에서는 퉁치고(?) 넘어간 가정에서의 재생산의 문제는 이야기할 게 많은 탐구거리 같아요.
아침 댓바람부터 기나긴 댓글을....우렁각시가 내 에세이 써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우렁각시는 불불노동의 아이콘이네요.-.-;;
연두님의 댓글
연두
역시 케로로님의 답글이!
여성인 우리에게 이중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그 와중에 가부장제까지 더해져 한국은 여성에겐 몹쓸 나라죠. 뒷풀이에서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가정에서의 불불노동, 돌봄 노동을 맑스가 계산이 복잡하니 넘어가겠다고 했던 부분에 매우 열받았던 한 사람으로 아은님이 이 주제를 잡아 써 주신다니 기대가 되요. 자본주의적 삶을 탈주하기 위한 방법으로 돌봄과 선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면서도, 그것이 가정 안에서 여성에게 당연하게 요구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전략의 딜레마와 감정적 갈등,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