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프로포절 +1
비욜
/ 2017-05-26
/ 조회 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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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지아/맑스 <자본론>/에세이 프로포절/2017-05-26/정은하
보여지는 것들과 은폐되는 것들
문제의식 :
<자본론> 강의를 들으면서, 자본주의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는 맑스의 혜안에 감탄하면서도, 강의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 ‘내가 전혀 몰랐던 실체적 진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것인가’ 라고 생각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자본이 착취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몰랐나‘라고 생각하면, 이전 다니던 직장 떠올리면 자동 이불킥 하게 되는 내 신체가 이미 대답하고 있고, ’자본가의 탐욕에는 내적제어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 놀랐나‘ 싶으면, 이미 창밖의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게 낀 미세먼지가 이미 그 해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난 그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자본이 작동하는 방식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체험의 방식으로 충분히 겪고 있기 때문에, <자본론>은 이미 내가 경험하고 있었던 것들, 정확히 설명을 하지는 못하지만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들에 관한 명쾌한 ’해설서‘ 같은 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가 설명하는 ’자본‘은 새롭다. 내가 직접적으로 살아가고 있고, 매 순간 겪어나가고 있음에도 맑스의 ’자본‘이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맑스가 이야기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자꾸 다른 방식으로 보이게 하는 교묘한 이론과 장치들이 많기 때문에, 실제 보이는 것과 인지하고 있는 것 사이의 불일치와 혼선이 일어나면서, 자꾸 이 생산방식의 근본원리를 잊게 만들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자본‘은 매번 새롭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번 에세이에서는 맑스가 이야기 하는 자본주의가 드러나는 방식 또는 형태가 무엇인지, 그래서 그 형태로 인해서, 자꾸 어떤 착시가 일어나고, 어떤 사고의 전도가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 어떤 사실들이 은폐 되는 지에 대하여 텍스트 중심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착취를 피할 수 없으면, ‘즐길 수’ 까지야 없겠지만, 적어도 본인이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착취를 당하는 상태만이라도 면해보자는 것이 이번 에세이의 목표이다.
본문에서 다뤄야 할 것 같은 주제들: (일단 생각나는 대로.... ^^)
- 맑스의 논점 : 모든 잉여의 원천은 노동자의 불불노동에 있다. => 이걸 가장 은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 자본주의의 생산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재생산이다
- 자본주의의 형태 : Form – 가치형태, 상품형태, 화폐형태, 임금형태, 교환형태
- 자본주의의 환상과 은폐
상품형태, 화폐형태 – 물신주의로 그안의 담긴 인간관계를 보지 못하게 한다.
교환형태 – 시장의 자유, 평등, 벤담의 원칙
자본의 허위운동(자본이 자본)을 낳는다.
임금형태: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의 혼선, 노동이 대가(시간급제,야근수당. 등)
잉여가치율의 해석과 정식 : 노동자와 자본가는 협력관계, 공헌에 따른 분배
축척에 의한 형성된 자본주의적 기울어진 판을 읽어내지 않으면, 자본가-노동자는 단순히 상호 독립적이고, 우연적인 두 항으로만 보인다. 부-빈곤의 축적이 동시적으로 발생
댓글목록
케로로님의 댓글
케로로정확하게 설명을 못 하지만 뭔가 혼란스러웠던 제 마음을 명쾌하게 표현해주신 문제의식이에요. <자본> 읽으면서, 내가 이걸 전혀 몰랐단 말이야, 몰랐었네, 아니야 알았잖아, 몰랐었네, 이제 알았다. 여전히 모르고 있네를 계속 반복하는 느낌이었거든요. 보여지는 것들과 은폐되는 것들 사이에서 대혼란. 맑스의 눈이 정확히 장착되어야 하는데, 자꾸 엉뚱한 렌즈가 끼어들고... 비욜님이 정리해주시면 헷갈릴 때마다 읽어보고 주기적으로 시력 점검해야겠어요 ㅎㅎ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은폐는 자본주의가 영원불변의 절대적 형태(최종 종착지)라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스스로도 속고 있는 착시가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