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에세이 계획서 +1
희음
/ 2017-05-26
/ 조회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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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워진 프랑켄슈타인에서 스스로를 기우는 프랑켄슈타인으로!
“자본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먹어야 살 수 있으며, 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을수록 더 오래 사는 죽은 노동이다.”
맑스는 자본가를 인격화된 자본이라고 말하고, 그 자본에서 흡혈귀를 본다. 산 노동을 빨아먹는 죽은 노동. 여기서 ‘흡혈귀’라는 비유는 조금 단순화된 듯하다. 피를 ‘빨아먹는’ 행위, 그 피로 자신을 살찌우는 행위만이 맑스의 관심이다. 그러나 흡혈귀에게 물린 인간은 원래의 '인간' 상태로 계속 피를 빨리며 살아가지도, 장엄하거나 혹은 초라하게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맞지도 못한다. 즉 흡혈귀에게 물린 인간 또한 독이 묻은 그의 이빨로 인해 제2, 제3의 흡혈귀가 되어 버리는 것. 그들 역시 근근이 제 목숨만을 이어가면서 세상의 악을 늘려가는 존재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자본가의 이빨에 한 번 물린 이상, 그들은 이 이빨 안에 든 보이지 않는 독의 영향력으로부터 순순히 빠져 나올 수 없으며, ‘축 처진 어깨’로 관을 닮은 그들의 검은 공장 속으로 매일같이 본능처럼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임금노동자로, 임금노동을 떠받치는 재생산 노동의 주역으로, 그리고 산업예비군으로, 뒷골목의 부랑자로 그들은 기껍게, 또 자발적으로 흡혈의 세계에 보다 강력한 힘을 실어주고 있다.
어둡고 축축하나 억지스럽지 않은 하나의 비유로써 맑스가 조명을 쏠 때, 나는 그와 유사하나 조금 다른 빛깔의 비유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를 비추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 그 조명의 정 중앙에 있다.
이름 없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그 괴물은 단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라고 불릴 뿐이다. 창조주에게, 즉 자본주의라는 세계에 속해 있는 그는 자본주의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계속 토해내어지는 일개의 피조물, 즉 프롤레타리아트이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손을 통해, 다시 말해 과학적 지식과 자본주의라는 문명에 의해 인공적으로 ‘기워진’ 자다. 그렇듯 세련된 근현대의 역사적 토대 위에서 만들어졌지만 그의 모양새는 형편없고 흉측하다. ‘괴물’이라는 이름 없는 이름에 걸맞게. 그를 만들어낸 창조주, 프랑켄슈타인마저도 기겁해 뒷걸음질칠 만큼. 괴물은 아파하고 고뇌하지만, 그는 그의 이름 없음을 뛰어넘지 못하고 그저 방황하거나 그 주인의 주변을 끝없이 맴돌 뿐이다.
그 괴물이 어느 날 몇 권의 책을 읽게 된다. 이후로 그의 고뇌와 슬픔은 더욱 깊어지지만, 그는 조금 다른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책이라는, 지식이라는 문명은 창조주에게서 비롯되었을지 몰라도 그것을 향유하는 것은 비단 창조주만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자본 편의 자양분들은 그 맞은편에도 다르지 않은 영양소로, 무기를 가는 숫돌로 쓰일 수 있다. 그것은 ‘만든’ 손에서 ‘만들어진’ 손으로의 이전을 통한 역습에 대한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
‘기워진’ 프랑켄슈타인에서 ‘스스로를 기우는’ 프랑켄슈타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힘과 그 거듭남의 서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창조주와 더불어 향유하게 된, 지적 깨우침과 슬픔과 비참이라는 자양분에 힘입어,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을 죽이고 스스로도 죽는 결말로 이야기를 닫아버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의 허리를 비집고 들어가 다른 가능성을 보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과학적 지식, 자본주의적 문명으로 자신의 몸을 새로이 기우는, 더는 흉측하고 슬픈 신체가 아닌 단단하고 미려하고 당당한 신체로 거듭나는 노동자 계급의 상을 그릴 것이다. 지식이 어떻게 그들에게 스며들고 틈입하여 그들의 무기를 벼리게 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하나의 운동과 전환적인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을 것이다.
댓글목록
케로로님의 댓글
케로로누군가가 RUR이나 프랑켄슈타인으로 써주면 좋겠다 싶었는데, 역시 희음님이. 게다가 제가 상상한 바와는 다르게, 역시 희음님^^ 세미나 때 잠깐 이야기하신 그 이미지와 한맥락 같아요.(엉뚱하면서도 신비롭고 왠지 끌리는...) 수동적으로 양산된 듯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떻게 능동적인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의 절실한 고민이 담긴 상징적이고 이미지적인 에세이가 될 듯해요.('연대'의 이미지 재창조 같은...) 조각들을 기운다는 것은 언뜻 누추해보이는데, 그것이 퀼트 이불 같은 거라면 너무나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들고요. 책과 지식이 계기점이 된다는 측면에서 희음님에게 공부란 어떤 의미일까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