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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자본》 에세이 도전을 위한 넋두리 +12
유택 / 2017-06-05 / 조회 889 

본문

맑스 자본 에세이 도전을 위한 넋두리

 

I don’t feel that it is necessary to know exactly what I am. The main interest in life and work is to become someone else that you were not in the beginning –Michel Foucault- [나는 내가 누군지 정확하게 아는 게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내 삶과 작업에서 중요한 관심사는 처음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푸코의 말입니다. 이 긴 문장을 한 친구가 짧게 표현한 멋진 말이 있습니다. I am what I do. 그렇습니다. 제가 한 것들이 저를 구성하고 그것이 저입니다. 주체는 알아내고 발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단하게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제가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자본>과 함께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을 읽었던 지난 3개월의 시간은 공부 좀 하고자 했던 내 열망의 리즈()’ 시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글을 썼다. 그것이 입을 다물고 떠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파스칼 키냐르의 표현 mentioned by 반디) 그렇습니다. 좋은 글과 말들이 제 영혼과 만나지 못한 채 제 혀로 바리~ 직통하여 줄줄 흘러 새나가버리는, 소위 빈꽃병(‘세네카의 표현)과 같다는 지적 속에 저는 눈감고 또 분투했습니다. 빈꽃병조차 확 던져 깨버리겠다고. 허나 so cool 소쿨~하게 깨지지 않고 떼구르르 구르다 만 빈꽃병이 한강에 둥둥 떠다니는 까망비닐봉다리를 만나 조잡하고 초라하게 둘둘 감긴 형국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맑스의 <자본>을 끼억끼억 다 읽었고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이 끝나가는 지금, 저는 저를 얼른 구원 해야만 합니다. 자기 구원은 자기가 해야 한다고 하도 그러니까요. 물론 그럴려면 타인이 필요합니다. 좋은 타인들은 저에게 이미 충분하고, 다시금 공이 저에게 패스 된 지금 이 순간. 자기 구원을 위한 에세이 도전이라는 긍정의 시련앞에 섰습니다  

 

감히 맑스 <자본>에 도전한 이유

마르크시즘이라는 말로 유명합니다. 여태 제 손을 거쳐간 몇 개의 사회과학책들만 떠올려봐도 항상 마르크스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왜 유명합니까? 그래서 저는 얼른 알아야 했습니다. 너무 궁금했으니까요.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다른 책을 더 잘 읽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이라는 책에서 자본의 현재의 역사를 분석했는데 그 면면이 반어적인 의미에서 놀라울 정도로 뻔~하게 우리가 현실에서 직관적으로 느끼고 숙지하고 있는 사안들을 낱낱이 피곤하게 무수한 말들로 풀어냈습니다. 이건 이래서 은폐 되어 있고, 저건 저래서 틀렸고. ‘따따부따꼭 따지기 잘 하는 피곤하고 얄미운 캐릭터 같았습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서 쓴 책이라고 하기에 그 따짐은 저에게 완전 이로운 것이니(자본의 계산법) 얄미워 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 또 다짐했더랬습니다. 도전했으니 열심히 따라가자고. 개가 팽팽해진 목줄에 이끌려 앞만 보고 절도 있게 일직선으로 전진하듯 말입니다. 한 발 두 발 총총~    

 

맑스를 읽으면서 느꼈던 주관적 감상들

의외로 술술 잘 읽혔던 <자본> . 그것은 이미 노동자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판매하여 화폐를 벌고 그 화폐로 또 교환되는 여러 가지 상품들을 구매하며 사는 방식이 내 삶의 본질인바, 마르크스가 열 올리며 구구절절 분석할 때마다 그냥 피식 코웃음이 났습니다 너무 뻔한걸 몇 페이지에 걸쳐 이리 말하고 저리 말하고.. 솔직히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겨워서였습니다. 나중에는 이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이 말 같아서 제가 이해하고 있는 건지 헷갈렸는데, 마지막 고샘 강의가 끝나고 좀 인텐시브하게 강의록을 한번에 주루룩 읽으니 그나마 맥락이 좀 잡히는 것 같아 혼자 기뻤습니다. ‘그래 나 돌대가리는 아니였던게야~~절반의 성공~!야호~!그럼 이제 하산???ㅎㅎㅎ’. 

 

맑스 <자본>은 내 삶에 어떤 변형을 요구하는가

<자본>에서 제가 특히 주목해야 하는 지점들이라고 권유되어진 부분은 임금노동()’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또한 제 주위 노동자 친구들의 관심사이기도 하고요. 돈 벌어 돈 쓰고 돈 벌면서 너무 지쳐 여유도 없고 가끔 인터넷뱅킹으로 쌓인 돈 보며 흐뭇하게 행복해 하다가 갑자기 곤두박질 쳐지게 사무치는 까망비닐봉다리 같은, 홑껍데기 같은 외로운 싱글 게이 삶. 이거 뭡니까? 이리 될라고 돈 벌었습니까?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니가 몰라 그렇다며 주위에서 나무랍니다. 차를 사서 드라이빙 하는 맛을 아는 건 어떻겠느냐 돈을 벌어도 그 돈으로 너를 기쁘게 할 상품(심지어 여행상품도 포함해서) 찾지 못하는 너의 오롯한 문제다 등등. 그런가요? 난 왜 돈을 미친듯이 벌어왔는가요. 제 가처분의 시간(인간동물이 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매불망 그토록 기다렸던 제 가처분의 시간들은 대체 어디로 갔습니까. 심지어 제 감성까지도 이젠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하루를 놀면 하루 일당(시간급-임금편에서)이 얼마라는 식으로 감각하는 신체가 이미 되어 있었습니다. 돈을 벌지 않는 다양한 행위/행동/활동에서도 의미를 찾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억지춘향격으로 스스로 세뇌하지만 좀처럼 세뇌되지 않습니다. 자본적 인간 대표 유형 저는 생각보다 강력했습니다. 안 되면 항상 이라도 하고픈데 금방 바닥납니다. 영혼까지 탈탈 털리며 금새 들통납니다. 무시무시한 금권력, 돈의 힘 앞에서 여지없이 난 매일매일을 다시 태어나는 순백의 아기처럼 맑고 초롱한 눈으로 신새볔 직장으로 달려나갑니다. 그것도 버선발로. 그렇게 쌔빠지게 벌어들인 그득하게 쌓인 그 상품들과 그 돈으로 전환된 내 죽은 부분 생명들, 이미 지나가버리는 내 부분 시간들 내 부분 삶들. 삶이란 무엇인가요.

 

이제 그 다음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마르크스 자본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새삼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 또한 여전합니다. 그래서 세미나 시간에 열중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세미나 시간에 풍차 돌리기 적금에 눈이 희번뜩~ 번쩍~ 귀가 뚜잉~ 했습니다. 돈이 돈을 벌어다 준답니다. 이 얼마나 마르크스가 그거 제발 아니라구~ 아니라구~’ 열변을 토했던 소리입니까.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착취를 보라 했거늘 여전히 직관으로 와 닿지 않고 있습니다. 왜 전 제 돈만큼은 돈이 돈을 벌고 이자를 낳아 매달 따박따박 이자돈이 들어오기만을 바랄까요. 그 돈이 이자를 낳으려면 은행이 그 돈을 투자해서 이윤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윤은 즉 잉여가치는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름 모를 누구 누구들의 불불노동(지불되지 않는 노동)에서 착취되어져 되돌아 온 제 소중한이자돈! 옴마야~ 이자를 바랬던 저는 고사이 말짱 <자본> 헛공부 했나 봅니다

 

이 넋두리를 갈기는 이유

저를 위해서 에세이를 기필코 쓰고는 싶은데 도저히 발동이 안 걸립니다. 강의록만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옴매 내 시간~~~!!!! 에세이 계획서라도 써서 학우들과 토론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뒤늦게 아쉽습니다. 기회는 다 지나갔습니다. (앗싸~)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 역시나 3개월 동안 돈 벌 때 아니면 죽자꾸나 놀아야 한다는 강박에 맑스-파레지아 성실도로 치면 70(?)으로 스스로 평가하겠습니다. 수우미양가 중 ~~~!’  아래는 며칠 동안 열심히 강의록 읽고 제 나름대로 요점을 발췌/정리해 보았는데.. 저거 다듬어서 에세이로 내겠다고 반장한테 대들었다가 말 같잖은 소리로 치부당하며 일언지하에 강력히 거절당했습니다. 갈 길이 멀지만 이건 저에게 분명 시련’(푸코적 의미)일거에요. 부당함을 당했을 때 이렇게 생각하라고 합디다. 삶에서 부당함은 죽을때까지 생기는 법, 그러니 타인으로부터 부당함을 겪어도 그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라고. 긍정으로서의 시련. 젠장~ 시련 같은 소리~!!!!! 한밤의 에세이 도전기 넋두리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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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샘 강의록 읽으면서 정리하다 보니 꼭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읽는 것 같아서 혼자 고맙고 즐거웠습니다다시 한 번 강의 감사했습니다. ^^ 

 

134일 강의 [자본에 대한 반시대적 고찰]

 

맑스의 <자본>은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서입니다. 이 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맑스주의자였던 알튀셰르는 투명한 독해는 없다고 했습니다. 항시 모든 것은 하나의 시각과 조명을 통해 해석되는 것입니다. 독서에서도 그렇지요. 따라서 이 <자본>을 읽을 때도 우리는 어떤 시각을 견지해야 할 것인지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그것이 <자본>을 공부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첫 질문입니다. 흑인은 흑인이다. 하지만 어떤 조건에서 그는 노예가 된다 맑스하면 떠오르는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을 이야기 해야겠습니다. <자본>은 역사적 사회형태로서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책이지 역사를 관통하는 영원한 법칙을 말하려는 책이 아닙니다. 역사유물론이란 하나의 방법론으로 각각의 시대에 맞는 그 시대의 고유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를 유동하고 운동하는 유기체로 보는 시각입니다. 변증법 또한 비슷합니다.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에 맑스의 변증법에서 자본주의는 외부에서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자기극복의 원리를 찾습니다. 정치경제학은 부르주아 사회와 더불어 태어난 학문입니다. 1848년 대혁명은 보편자로서 부르주아가 등장한 신분 혁명이자, 부르주아 독재라는 계급에 대한 혁명’, 두 가지 차원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은 부르주아 계급을 변호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며, <자본>은 그에 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서 투쟁한 책입니다. 진리 자체가 당파적인 것이라는, 즉 진리란 입장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자본>의 부제인 정치경제학 비판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부르주아의 권리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리가 충돌하는 지점, 각자의 올바름이 대척하는 지점, 그 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입니다. 여기서 계급투쟁이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38일 강의 [상품의 존재론 혹은 유령론-맑스의 특별한 눈에 대하여]

 

<자본>의 서술 출발점은 상품입니다. 그러나 좀더 살펴보면 상품 자체가 아니라 상품규정, 즉 어떤 재화상품이 되게 해주는 그 무엇에 대한 것입니다. 상품의 가치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즉 가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가치란 물리적, 화학적 성질들을 모두 제거한 뒤에 남아있는 비물질적인 어떤 것, 감각적인 것에 붙어 있는 초감각적인 어떤 것입니다. 맑스를 이해하려면 사물에 본래적으로 내재하는 가치라는 관념을 우선 버려야 합니다. 한 상품의 가치가 일정량의 다른 상품과의 교환을 통해서만 표현된다는 점으로 미루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관계입니다. 사회적 존재로서 나의 정체성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즉 나는 내가 타인과 맺는 관계입니다. 상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완전히 다른 상품이 교환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떤 동일한 것이 상품들에 공통으로 녹아 있다고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추상노동입니다. 상품들이 모두 노동생산물이기 때문에 교환 가능해집니다. 노동이 상품의 가치의 실체이기 위해서는 추상노동이어야 합니다. 상품의 교환은 추상노동공통성을 전제하지만 이것은 역사적으로 생산된 것입니다. 그리스 신분제 사회는 노예가 있었고, 인간은 동등하지 않았습니다. 고로 추상노동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신분적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추상노동의 핵심에는 역사적 인간론, 무엇보다 근대의 인간형(평균인)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치란 두 상품의 교환에서 드러나는 관계이지 어떤 사물이 아닙니다. 화폐는 그 관계가 하나의 사물로서 현상한 것입니다. 화폐가 사물이 아니라 관계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마치 화폐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맑스가 그토록 강조하는 물신주의(Fetischsmus)입니다.

 

3315일 강의 [화폐라는 짐승-화폐의 발생과 기능에 대하여]

 

맑스는 시선을 상품에서 상품소유자로 옮기고 있다. 상품교환이라는 것이 매우 독특한 인간관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그 소유자들이 사적소유자로서”, “독립된 인격으로서만나야 한다. 따라서 상품들의 교환과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의 출현은 공동체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결국 화폐의 발생은 공동체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화폐는 자신을 가능케 한 전제의 역사적 발생을 은폐하고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가치척도로서의 화폐와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가 있다. 화폐가 가치척도인 것은 그것이 인간노동의 사회적 화신이기 때문이고, 상품의 유통은 화폐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때 화폐는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사회적 관계를 은폐한다. 그렇다면 화폐는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4322일 강의 [자본-아비는 자식을 낳아 아비가 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 아래서만 일정액의 화폐자본이 될 수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 16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특히 그는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의 형성에 주목한다. 화폐자산가의 성장은 전통적 공동체가 몰락하고 화폐공동체, 화폐적 인간관계로서 새로운 사회가 출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화폐가 자본으로 변신하려면 잉여가치가 있어야 한다. 자본이란 잉여가치를 낳는 가치, 다시 말해서 스스로 가치를 증식시키는가치이다. 돈이 돈을 낳는다는 세인들의 말은 여기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자본 정의 핵심인 잉여가치가 어디서 왔느냐다. 등가교환을 했는데 어떻게 잉여가치가 새롭게 생겨날 수 있는가. 그것은 특별한 너무나 특별한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화폐와 교환 혹은 구매했다. 그러나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그 사용으로 다른 상품의 가치를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노동력은 사용가치가 가치의 증식에 있는 유일한 상품이다. 노동력이라는 특별한 상품이 잉여가치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출현에는 무엇보다도 노동력의 상품화가 결정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중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화폐소유자와 노동력 소유자의 인격적 대등한 만남, 즉 인격적/신분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팔 수 밖에 없게 한 생산수단 즉 토지로부터의 자유, 이 이중의 자유와 함께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도래했다.

 

5 329일 강의 [생명을 주고 가치를 더하는, 그러나 죽어가는, 노동]

 

인간노동은 합목적적이기 때문에 노동 소외가 일어난다. 즉 목적을 위한 의지의 예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억지로 사람에게 일을 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노동 속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떠나 있다고 느낀다. 노동자는 사회적 활동[노동]에서가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분리된 활동,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일에서만, 기껏해야 거주와 의복에서만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낀다.” 인간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동물로서만 존재할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동물이 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싶어하게 된다. 노동력의 가치와 그것의 사용으로부터 얻는 가치는 다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살아있는 노동을 자신이 조달한 원료와 노동수단에 들어 있는 죽은 노동과 결합시킴으로써 자본, 즉 자기 증식하는 가치로 전화시키는데 성공한다. 노동자의 노동행위로 가치의 보존 및 이전가치의 증식이 동시에 나타난다. 가치 생산물을 이루는 노동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나뉜다. 필요노동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부분이고, 잉여노동은 노동력을 지출했지만 자신이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 생산한 부분이다. 잉여가치율은 필요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비율인데, 이것은 곧 노동자에 대한 착취도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잉여가치를 낳아주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착취당하는 시간인 것이다.

 

6 45일 강의 [흡혈귀와 좀비 그리고 공포의 집]

 

자본의 잉여가치가 노동력의 가치노동력이 생산한 가치의 차이, 다시 말해 잉여노동에 달려 있다.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과 자본가의 이윤을 위한 잉여노동을 수행한다. 이처럼 노동일은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단순 합계이다. 말 그대로 노동자가 하루 중 노동하는 시간이다. 노동일의 정확한 길이는 없다. 자본가는 좀 더 일을 시키고자 하고 노동자는 좀 더 일을 적게 하고자 할 뿐이다. 즉 노동일을 둘러싸고 권리 대 권리’ ‘힘과 힘’ ‘계급과 계급이 맞부딪친 길고 힘겨운 역사가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는 문명사회지만 또한 과로사회이다.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 고유한 것이므로, 자본주의는 과로를 규제할 내적 원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노동자는 인격화한 노동시간일 뿐이다. ‘풀타이머’ ‘하프타이머라 부르듯이. 상품의 가치형성과정이 사실상 노동자의 생명을 짜 넣는 일이라는 점에 비추어볼 때 노동일의 무차별적 확장은 노동자에 대한 살인과 다를 바가 없다. 노동일을 무제한적으로 확정하고 싶어하는 자본가의 충동을 강제로 제압한 것은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노동자들이 구원자는 곁에 있는 동료 노동자였다. 그들은 단결하여 하나의 계급을 형성했고 그 힘으로 국가를 강제하여 자본을 규제했다. 그것이 표준노동일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였다.

 

7 412일 강의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

 

노동일의 연장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하고, 노동생산성의 향상으로 필요노동시간이 단축되는 경우, 잉여가치율의 상승을 통한 잉여가치증대가 나타나는데, 이를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한다. 노동생산성은 증대하는데 왜 노동은 줄지 않을까. 그것은 애당초 노동일을 단축시켜주기 위해 노동생산성이 추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이 추구하는 것은 노동일의 단축이 아니라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이다.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이야말로 자본이 목적하는 잉여노동시간, 다시 말해 잉여가치를 증대시켜주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노동형태 중 첫번째로 협업이 있다. 인간이 함께 있음을 해서 생겨나는 집합적 이익, 즉 어떤 잉여의 요소가 생겨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가 이것을 전유한다. 그 어떤 지불도 없이 말이다. 두번째로 협업의 발전적 형태인 매뉴팩처가 있다. 매뉴팩처가 구성되면 생산노동의 리듬은 노동자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독립된 수공에서나 단순협업에서는 보기 어려운 노동의 연속성, 일률성, 규칙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철저히 자본의 독재 아래 놓여 있게 된다. 유기체에서 기관으로 전락한 인간, 전체로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거인이지만 개인으로서는 온전한 인격을 유지하지 못하는, 전체를 떠나서는 실존할 수 없는 부분인간/부분노동자로 되어간다.

 

8 419일 강의 [자본의 꿈과 기계의 꿈]

 

매뉴팩처가 노동력에서 시작된 변화라면 기계제 대공업은 노동수단에서 시작된 변화이다. 노동자 앞에 기계가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들의 체계에 따라 할당된 장소에 노동자들이 분배된다고 할 수 있다. 도구의 교체가 아니라 주체생산자의 교체이다. 기계의 도입은 자본가에게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킨다. 즉 기계를 전면적으로 도입한 대공장의 경우 노동자는 고유의 노동 리듬을 잃어버리고 전적으로 기계의 리듬에 맞추어 노동해야 한다. 자본가가 노동과정 자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것, ‘실질적 포섭이 일어난다. 그에 반해 형식적 포섭이란 자본가가 작업량이나 근무 시간 정도를 외면적으로 강제했던 이전의 방식이다. 기계의 도입은 노동강도의 강화, 노동 인구 과잉 초래, 실제적으로 노동일의 연장을 시킨다. 특히 기계에 의해 밀려나거나 위협받는 노동자들의 경쟁을 초래하여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렇다면 기계는 노동자의 적인가. 맑스는 기계 자체와 그것의 용법을 구별하라고 주문한다. 공격할 것은 기계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회형태라는 것. 모순과 적대는 기계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9 426일 강의 [착시의 교정-임금을 둘러싼 온갖 헛소리에 대하여]

 

잉여가치의 산출이 생산의 목적인 사회는 자본주의 이외에 없다. 자연은 자본주의를 낳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역사의 선물이다. 역사적으로 특수한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자연의 진화법칙에 따른 필연적 산물로 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가치의 실체로서의 노동과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노동의 가치로서의 임금이라는 생각은, 하루 노동이 모두 지불되었다는 환상을 만들어냄으로써, 노동일이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으로 분할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맑스는 임금 형태 중 시간급과 성과급을 언급하고 있다. 시간급제는 노동자의 명목임금을 노동일로 나누면 시간에 상응하는 임금, 시간당 임금을 구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1시간을 일하든 12시간을 일하든 그 노동력이 재생산되려면 일정한 생활수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제 임금은 이에 대한 고려가 없다. 자본가는 시간당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자신은 줄 것은 다 주는떳떳한 구매자라고 행세할 수 있게 된다. 시간급제 임금의 부당성은 초과 연장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경우에도 확인된다. 노동일을 늘리면 노동력의 하루 가치는 더 빠른 속도로 증대한다. 그만큼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 늘을 연장하면 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일이 늘어나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노동자들 스스로가 이 할증수당을 받기 위해 노동일을 늘리려 한다. 노동일을 늘리면 노동가격의 인하를 불러온다. 성과급제는 시간급제 임금의 변형된 형태에 불과하다. 그것이 시간이 아니라 생산물의 양을 기준 삼아 노동의 가치를 잰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성과급제는 먼저 노동의 질과 강도가 생산물 자체에 의해 통제된다. 하청을 양산한다. 노동자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스스로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동일을 연장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경쟁이 격화되고 평균 임금 수준 자체는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노동강도가 높아질수록 노동력이 저평가된다. 자본주의가 선진화될수록 노동자의 임금은 오르지만 노동이 그만큼 대접받는 것은 아니며, 더 나아가 삶이 꼭 그만큼 낫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10 510일 강의 [다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단순 재생산과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환]

 

자본을 자기 가치증식으로서 정의한다면, 자본주의를 자본이 자본으로서 재생산되는 체제, 다시 말해서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체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재생산과 확대재생산에서 자본화된 잉여가치자본의 축적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가가 들고 온 화폐는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결과였다. 노동자 앞에 선 자본가의 자본은 노동자의 불불노동이 대상화된 것에 불과하다. 즉 노동자계급은 금년의 자기의 잉여노동으로 다음해에 추가노동을 고용할 자본을 창조한 셈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날때는 자본이 자본을 창조한다라고 뒤집혀 나타나는 것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계급은 심지어 직접적 노동과정 밖에서까지도 자본의 부속물이고 개인적 소비까지도 일정한 한계 내에서는 자본의 재생산과정의 한 계기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의 재생산 속에 노동력의 재생산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빈곤한 존재로서 자신을 재생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상품 교환은 그 외관상 아무리 대등한 교환이라 하더라도 이미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축적이 일어난다는 것, 다시 말해 자본의 재생산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품이나 잉여가치만이 아니라 자본관계 자체, 즉 한편으로는 자본가를,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노동자의 생산과 재생산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11 517일 강의 [부의 축적과 빈곤의 축적]

 

부의 축적과 빈곤의 축적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이다. “빈민의 노동은 부자의 보물광산이다.” 다수의 소자본은 소수의 대자본으로 전환/집중이 일어난다. 자본의 기술적 구성이 변하면서 그 결과 대규모 노동력이 생산현장에서 쫓겨난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축적이 일어난다. 실업자들이 많아진다는 소리다. 실업자는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을 감내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이로써 실업과 과로로 구성된 자본주의적 생산 체계가 만들어진다.

 

12 5 31일 강의 [피와 불의 문자로 기록된 연대기]

 

지금까지 맑스가 자본의 현재 역사를 논리적 전개로 보여주었다면 이번 강의에서는 자본 형성의 역사즉 자본의 현재 역사가 생겨나기 전의 이른바 시초축적(본원적 축적)’에 대해서 보여준다.

 

 

댓글목록

케로로님의 댓글

케로로

아놔, 이번 당번님들 후기 댓글을 마지막으로 제가 댓권 이제 놓으려고 했는데, 유택님 때문에 안 되겠네요.ㅎㅎ  내가 분명 분명 더 열심히 공부했는데(나는 성실도 99.999점), 유택님 정리글을 보고 느껴지는 이 좌절감은 뭔지, 열받아서 눈앞에 보이는 까만 비닐봉다리 발로 찼는데 거기에 빈꽃병이 헐...내 발꾸락T.T( 4,5,6강 정리 글, 제 에세이에 가져다 쓸게요. 땡큐^^)
케로로의 탈을 쓰고 파레지아 동기들 아무한테나 막 들이댔는데, 유택님에게는 뭔지 모를 포스가 느껴져서 주춤했더랬죠.(제가 니체 스피노자 들뢰즈 이진경쌤에 관한 세뇌공격을 묵묵히 막아냈는데, 푸코 세뇌에는 유택님 땜에 약간 감염된 듯) 한편으로는 저 눈엔 뭐가 보일까 너무 궁금하기도 했어요.(제가 가장 짐작할 수 없는 눈을 가지신 듯) 낭중에 재미난 책 한 권 써 주시기를 기대하며...( 돈 버는 방법 궁리엔 <자본>이 최고였던 듯. 요즘 <레버리지>라는 책이 나와 깝죽거리고 있더라구요.) 그럼 안녕~

빈꽃병님의 댓글

빈꽃병 댓글의 댓글

한 학기 동안 케로로님의 학우들에 대한 애정 & 열정의 댓글들... !
맑스-파레지아의 빛나는 우정의 역사였습니다. 감사했어요. ^^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유택! 잘 읽었어요.^^
고민과 수고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겼네요.
하튼 공부는 잘 한다니깐!
맑스와 푸코가 잘 믹스된 후기같기도 하고...ㅎ
저도 맑스와 푸코를 같이 읽어서 그런지, 맑스에서 푸코를 읽고, 푸코에서 맑스를 읽는 시간들이었네요.
말하자면 "공유의 기억"같기도 하고..ㅎ
남은 "시련"도 잘 공유해 봅시당(그래야 하는데, 에세이 첩첩산중 ㅠ)

빈꽃병님의 댓글

빈꽃병 댓글의 댓글

저 멀리 달려가는 울 3차원녀 아라차의 꽁무니 놓칠새라 정신줄 잡아가며
일년간 매주 금요일 저녁 푸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제는 5초간의 침묵으로 매주 목요일, 정신없이 계속 따라가렵니다. ^^

정아은님의 댓글

정아은

진정한 여유가 무엇인지를 존재로서 보여주시는 유택님~ 마을버스 타고 가면서 짬짬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제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시겠죠? 아, 이별을 목전에 두니 온갖 애정이 마구 샘솟는군요. 진정해야지. 포스와 성실미와 열정이 넘쳐나는 에세이 예고글 잘 읽고 갑니다. 에세이 매우매우 기대하고 있을게요!

빈꽃병님의 댓글

빈꽃병 댓글의 댓글

ㅎㅎㅎ 목 돌리는 아은님. 좀 제발 책 좀 그만 읽어라 글 좀 적게 써라 말하다가도
화들짝  놀라 스스로 입을 막은게 몇 번..? ㅋㅋㅋ 목건강 잘 챙기셔야지요~
고샘 수업 끝나면 너무 피곤하여 미친듯이 정류장으로 달려가는
우리 마을버스팀으로 오랫동안 기억하겠습니다. ^^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처음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가는 것' 이라는 푸코의 말.
다른 누군가가 다가오는 시간들...... 그 시간들을 함께 했다는 기분입니다. 그동안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해주시니, 그 시간들의 기억과 함께 했던 공기들이 느껴지는 듯 하네요~~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때, 그 변화는 가장 찬란하게 오는 것 아닐까요? 그것이 고통어린 '피와 불의 역사'일지라도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유택님의 솔직한 글과 말들은 항상 어떤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함께 해서 즐겁고 고마웠어요. ~~^^

빈꽃병님의 댓글

빈꽃병 댓글의 댓글

함께 해서 즐겁고 고마웠다니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요. ^^
언제나 보이지 않는 뒤에서 사리살짝 마음 쓰는 토라진님께 항상 감사함을...!

삼월님의 댓글

삼월

에세이계획서로 발표를 했음 얼마나 좋았을라나 싶지만,
늘 시련주는 만큼(!) 좋은 결과물로 보답해주어 시련주는 맛을 느끼게 해 주는 유택!
나도 지쳐있다가 성실한 유택 보면서 정신 차리고 힘낼 때 많아요.
시련과 변화로 더 단단해진 우리를 느낄 때도 많고요.
끝까지 함께 가리라 믿어요. 거절은 거절합니다! ㅎㅎ

빈꽃병님의 댓글

빈꽃병 댓글의 댓글

ㅋㅋㅋ 밉다가도 미워할 수 없는 울 반장.
계속 해서 시련 드릴께. 왕창 디릴께~ ㅎㅎㅎ
푸코가 그러잖아요. 시련으로서의 생! 그래서 작품이 된다...
쭈~욱 시련의 맛을 함께 주고 받으며 느껴보아요~~~~ 꺄르르르르( ㅡ.ㅡ;;;)

소리님의 댓글

소리

성실한 유택! 솔직하면서도 술술 읽히는 글 스타일이 유택의 장점인 것 같아요.
"맑스 <자본>이 내 삶에 어떤 변형을 가했는가"의 내용은 유택만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해요.
끝의 넋두리 부분을 깊이 공감하면서, 푸코와 맑스 파레지아까지 긴 시간 함께 공부하게 된 이 인연에 땡큐를.
에세이까지 파이팅. 시련으로 가득한 인생의 한 부분의 시간을 함께 끝까지 해내봐요!

빈꽃병님의 댓글

빈꽃병 댓글의 댓글

You are what you do!
I am what I do!
소리 반장!
우리 또다시 새로 태어난 순백의 아기처럼 <진실의 용기> 열심히 읽어 보자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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