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에세이 계획서 +3
효진
/ 2017-05-23
/ 조회 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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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쓰요....
가제: 도약하는 인간 - 『자본』 곁에서 전태일을 읽다
『자본』은 시간의 이빨을 부러뜨리는 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아니 대개의 눈에는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의 『자본』 읽기란 시대착오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대착오를 더 밀어붙여 보자. 그나마 ‘과학’의 외양을 어느 정도 가진 『자본』 곁에서, 한층 더 구질구질한 이름을 떠올려 보기로 한다. 내가 아는 한 한국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 전태일의 말과 글을 『자본』을 옆에 두고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전태일이라는 인물은 항상 노동운동의 열사로서 호명된다. 말하자면 운동의 제단에 자신을 희생양으로 바친 사람으로서 호명된다. 영화의 스펙터클을 통해 소신공양의 수준으로 들어 올려지기까지 한 그의 죽음.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의 4부 제목은 “전태일 사상”이다. 전태일이란 인물은 사상의 원천이 될 수 있을까. 또 그를 사상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니, 전태일 사상은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는가. 전태일 사상이란 것이 가능하다면/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인가. 과학보다 멀리 가는가, 과학만큼도 가지 못하는가.
전태일의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의 언어 속에서는 ‘나’의 포기와 확장, 변형의 테마가 반복된다(“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나의 나인 그대들”, “저희들의 전체의 일부”). ‘나’는 무엇보다 욕망의 주체인데, 인간 조건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들며, 맑스 이래의 통찰은 그것이 자본주의 존속의 심리학적 근거를 이룬다는 것을 알려준다. 자본주의 경제의 회로는 평균화된 욕망의 주체인 ‘나’들에 의해 지탱된다. 그리고 이 ‘나’의 다수는 욕망의 주체임으로 항상 자본의 대상(노동력 상품)이 되는 프롤레타리아들이다. 자본은 이 ‘나’들을 모아 자본의 재생산-축적을 위한 활동을 조직해 나간다. ‘나’들은 생산과정의 부속으로 화한다. 이들은 부분인간이 되어 생산의 목적 아래서 기형화한다.
맑스는 극한적 상황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는 장면들을 묘사한다. 하지만 몰릴 대로 몰려서 거의 본능적으로 비명처럼 내지르는 반격만이 아니라, 반격을 ‘구성’하기 위한 원리를 찾을 수는 없을까. 자본에 의해 조직된 신체(편제Gliederung)를 내부로부터 해체하고 새로운 신체를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원리를 찾을 수는 없을까. 전태일의 언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회적 신체에 대한 묘사들(“나는 그 덩어리가 자진해서 풀어지도록 그들의 호흡기관 입구에서 향을 피울 걸세. 한번 냄새를 맡고부터는 영원히 뭉칠 생각을 아니하는 그런 아름다운 색깔의 향을 말일세. 그렇게 되면 사회는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부스러기란 말이 존재하지 않을 걸세”)을 『자본』에 비추어 보며 생각해 보려 한다.
전태일의 언어는 매우 제한적으로 남겨져 있어서 이렇다 할 의미를 길어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고, 또 그가 많은 부분에서 비범한 시각을 보여 줬다 해도 그건 마치 현실의 빈틈을 의도치 않게 찌르는 백치의 말에서 아주 멀리 나간 것이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서 자본주의가 전제하는 인간의 모델을 뒤흔드는 면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이 글을 구상 중이다. 생체 상품으로서의 인간은 자기 노동력을 팔기 위해서라면 한없는 전락도 감내해야 한다. 상품의 운명은 항상 ‘목숨을 건 도약’에 걸린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다른 도약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주인공 산드라는 마지막에 어떤 도약을 감행하지 않았나. 전태일이 보여 준 도약의 결과는 우리 노동 현실을 바꾸었고 또 여전히 바꾸고 있지 않나. 소신공양의 스펙터클을 도약의 스펙터클로 대체할 수는 없을까.
여기까지 대강 써놓고 보니 뻔하고 뜬구름 잡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떨어질 것 같아서 걱정이 되네요... 게다가 종합소득세 신고 때문에 미추어버리겠... ㅠㅠ
댓글목록
케로로님의 댓글
케로로종합소득세 신고를 일찌감치 마친 1인(부럽쥬) 전태일 평전을 아직 읽지 않은 1인(왠지 부끄럽군). 인용해주신 한 구절만으로도 기분이 묘해져요. "현실의 빈틈을 의도치 않게 찌르는 백치의 말"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닐까,(효진님 떠오름. 백치 빼고^^) 그동안 '목숨을 건'에 계속 찍어 왔던 방점을 '도약' 쪽으로 이동시키는, 일종의 조명 이동이라는, 이번 파레지아의 맥락과 잘 연결될 것 같아요.(뭔 소리야? 망했쓰요 망한 김에 더 망해보자면) '전태일 사상'이라는 말에서 '사상'의 의미도 뭔가 박제된 것이 아닌 실천적인 것으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효진님의 경험과 날카로운 통찰력과 뜬구름의 조합, 기대되어요.
효진님의 댓글
효진
으으... 종소세 신고를 일찌감치 마치셨다니 넘나 부러울 따름이고... ㅠㅠ 전태일 평전은 꼭 읽어보셔요! 어느 선생님이 "그 책을 읽고 나면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완전히 딴 것이 되어 버린다"고 하였다나 뭐라나... 크흠크흠! 하여간 '도약'이라는 키워드를 가져가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강의록부터 다시 읽어 보며 생각해 보려고요.ㅎㅎ
아무튼 제가 케로로님 댓글에 대댓글을 단다면 무슨 말을 보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을 위해서이지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곡의, 정말 좋아하는 라이브랍니당...
https://youtu.be/W5wc1R0AQ_M
케로로님의 댓글
케로로
추억돋는 헤어스타일이네요ㅋㅋ 언뜻 (목소리 톤 때문인지) 엔야가 떠올랐는데, 길모어 등의 연주 때문인지, 강인함이 느껴져요. 그러면서도 신비로운 느낌도 있고요.(이런 느낌 좋아요!)
노래를 듣다 보니 현실에 파묻히지 않으면서 붕 떠서 날아가지도 않은 그런 상태가 가능할까(그러고 싶은데) 잡생각이 떠오르고, '도약'이라는 키워드까지 결합되니,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산드라가 '도약'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틀 낮 하루 밤 동안 그렇게 뛰어다닌 덕분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에세이를 쓰려면 일단 <자본>과 강의자료와 내 과제를 다시 보면서 연구노트를 작성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구나, 교훈으로 마무리.^^
에세이 잘 쓰셔서 내가 <전태일 평전>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해주시와요(선곡에 대한 고마움을 에세이 부담으로 갚는 심보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