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레지아_맑스] 에세이 :: 연두 +2
연두
/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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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퇴사기
2017.06.17. 연두
1. 낯설어진 도시, 밀려나는 자
- 서울, 메트로폴리스
자주 다니던 길이었다. 그런데 이 곳이 너무 거대하게 느껴졌다. 버스든 지하철이든 택시든 무언가 타고 익숙하던 길을 지나는데도 이 도시를 관통하던 와중에 나는 가끔 진땀이 날 정도로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서울은 끝이 없었다. 지난 몇 달간은 거의 매일 택시로 출퇴근했다. 마침 강남순환고속도로가 일부 구간 뚫려서 집에서 양재IC까지 관악산을 관통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택시 이용시의 출근시간이 15분 가량 줄었다. 그 길은 관악산에 터널을 뚫어 서울대 아래로 지나가는, 강남 사람들의 자제들을 서울대로 편하게 다니게 할 용도라는 우스개 소리가 돌 만큼 여러 가지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간사업자에 의해 개발이 되었던 길이다. 여튼 그 길은 마침, 딱 회사가 있는 양재IC까지 뚫려서 좀비 상태의 나를 실어나르기엔 안성마춤이었다.
2016년 마지막 날, 그 날은 대중교통으로 출근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신림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강남역에서 다시 신분당선으로, 또 버스를 타는 출근길. 한해의 마지막날이니 출근길도 한산한 느낌이었다. 팀장을 비롯한 팀원 20명 모두 휴가를 가고 텅빈 사무실. 나도 남은 연차를 며칠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의 회색지대 때문에 입사 만 1년이 지난 12월 중순 이후부터 31일까지는 연차를 쓸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회사를 떠났는데 남은 휴가도 쓰지 못하게 하다니 고약하다. 아침에 여유롭게 회사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사서 올라왔다. 홀로 있는 자유로운 팀 사무실, 그 곳에서 갑자기 나는 또 심하게 어지럽고 구역질이 났다. 나는 의자에 뒤로 기대어 누웠다 책상에 엎드려 보았다 하며 두어 시간 보낸 후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몇 달 간의 공사 후 보름쯤 전에 새로 이사해 온 우리 팀 사무실은 내부 공사에 사용된 각종 화학물질로 늘 환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건축 담당 팀원들은 다들 우리가 인간 공기청정기가 되어 한두달 걸러내면 실내 공기가 좋아질 거라고 농담인지 미친 소리인지를 했다. 20대의 인간 공기 청정기들이 없어서 공기질이 나쁜가, 그래서 어지러운건가 잠시 미친 생각을 했다.
- 골드 미스에서 노처녀 실업자로
30대 끝자락에 한국 대기업에 들어갔다. 몇 달 쉬던 차였음에도 스카우트되어 얼떨결에 입사가 결정되었다. 사측에서 쉽게 결정을 하니 역시 내 시장 가치가 괜찮구나 싶었다. 그래도 웬지 썩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다. 과연 남성적인 한국 대기업으로 들어가는 것이 내게 옳은 결정인가. 나는 답을 낼 수가 없어 최종 과정인 인사 담당 임원 면접까지 가고야 말았다. 그 직전의 절차였던 인사 담당 팀장 둘과의 면접에서 한 명은 내게 결혼할 것인지.를 물었었다. 그들은 어떤 답을 기대했던 것일까. 그것이 우리나라 3대 대기업의 경력직 면접의 수준이었다.
마지막 채용절차는 인사담당 임원과의 면접이었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는 그의 요청에, 나는 오랫동안 이 곳에서 일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지, 말하자면 이 회사의 매력과 강점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번뜩이는 눈매에 수트 속으로 제법 탄탄하게 관리잘 된 몸을 갖고 있던 그는 자기 세대야 한 번 입사하면 회사에 뼈를 묻는 세대였으므로 회사의 매력 따위는 되짚어볼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대신 본인이 어떻게 임원이 되었는지 알려주겠다 했다. 그것도 동기들보다 빨리. 입사할 나를 위한 조언이라고 했다. 즉, 본인이 최종 의사결정권자인데 그 자리에서 나를 합격시켰으니 이제 여기로 와서 잘할 일만 남았다는 거였다. 그는 자신이 출근 1일차부터 6시에 자기 책상에 앉았으며 평생 그렇게 해 왔다고 했다. 6시 출근은 자신의 수칙이며 그것을 변함없이 지키는 것으로 사내에서 유명하다고 하였다. 나는 약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에겐 삶이란 회사생활이겠지. 가족과의 시간은 돈으로 모두 땜질했을 것이다. 여튼 합격통지를 면접 현장에서 바로 들으면서 최종면접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나는 12월 중순에 입사하기로 했다. 그런게 계속 끌려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왜 내가 선택하는데 끌려가는 느낌이 드는 것인지 의아했다. 입대를 기다리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잠시 생각했다.
그 즈음엔 매일 새벽 잠을 설쳤다. 팀장에겐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고, 동의 하에 업무량도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런데 과중한 업무에서는 근로하는 팀 분위기를 해칠까 그는 나를 인재 교육원 강사로 종종 내보냈다. 출근 시간인 8시 전에는 사무실에 반드시 도착해 있어야 했고, 12시간 이상 회사에 있어야 하면서 출퇴근에 2시간 정도 걸리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오후 11시를 못 넘기고 피곤에 찌들어 쓰러졌고, 6시 전에는 깰 일이 없었다. 퇴사 의사를 팀장에게 밝히고 난 후 과로에서 점차 벗어나자 참을 수 없는 불안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대기업 명함을 버리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실은 이런 질문도 좀 우스웠으나 나는 사뭇 진지하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왜냐면 나는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던 거다. 소속감도 없었고 입사를 열렬히 원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그 명함이 나를 꽤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골드 미스의 삶을 연장하며 자존심을 잃지 않아도 좋을 만한 여유 공간과 경제적 자유을 보장받았던 나는 올드미스, 노처녀 백수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짙은 두려움이 나를 새벽에 흔들어 깨우고 가슴을 옭아맸다. 세 시고 네 시고 깨면 노트를 하며 내 두려움을 받아적었다. 퇴직하면 나는 아무도 아니다. 이 나이에 백수라니 결혼은 평생 못할 지도 모른다. 내가 나약한 걸까. 어떻게든 버티며 견뎌내야만 하는 것일까. 퇴사 후 아프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마라톤의 승자가 되는 모습을 그리며 끝까지 달리자는 마음과 지금 당장 멈춰버리고 싶은 마음이 끊임없이 싸웠다. 나는 도피하고자 하는가. 문득문득 찾아오는 숨쉴 수 없을 갑갑함이 나를 사무실 바깥으로 밀어냈다. 공황장애였을까. 시베리아 고기압이 몰고 온 맑은 냉기가 겨우 나를 숨쉬게 해 줬다. 회사 바로 옆엔 울타리를 공유하는 대형마트가 있었다. 옆문으로 나가 대형마트 안을 통과해 커다란 주차장 울타리를 따라 몇 번이고 뱅뱅 돌았다.
나는 그저 사라지고만 싶었다. 가끔은 그 산책이랄지 탈출일지의 첫머리부터, 9층에서 로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그 길부터 눈물이 터지기도 했다. 그 눈물은 그들이 내게 던진 폭언과 모욕이 문득 되새김질되어 참을 수 없어서인지, 그 모욕적 상황을 적극적으로 방어하거나 전환시키지 못한 내 한계를 인정해야했기 때문인지, 성공은 커녕 실패하고 있는 내가 초라해서인지, 노처녀 백수의 삶이 야기할 자존심 상실이 벌써부터 두려워서인지, 채 1년도 안 되어 내가 얻게 된 왼쪽 가슴의 석회화 조직이 억울해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2. 피의 낭비, 혹은 생명의 절약, 시간거지
출근 첫날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원증을 계열사 카드로 발급받아야 했다. 발급비 5천원도 내야 했다. 이런 건 부당거래 아닌가? 왜 카드 기능이 없는 사원증을 발급받을 수가 없는 거지? 불편부당함을 제기하니 옆자리 사원이 민망해했다. 점심시간은 12시에서 1시까지 1시간을 정확하게 지켜야했다. 1시 전에 출입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모두들 10분 전쯤 자리로 돌아와 앉는 것이 일상적인 듯했다. 8시 3초에 출근했는데 인사팀에서 경고를 받았다는 얘기도 들렸다. 첫날은 할 일도 없으니 5시 20분쯤 퇴근하려고 팀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6시가 퇴근 시간이라고 했다. 8시부터 6시까지가 움직일 수 없는 업무 시간이었다.
역시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공채 기수들로 끈끈하게 연결된 그 조직에서 경력직, 그것도 여자 경력직은 눈에 띄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 팀은 창업자의 3세인 부회장 E가 직접 챙기는 조직이었다. 사내에는 시샘과 견제가 가득했다. 팀장은 해외에서 일한 경험만 있는 외부 경력직 출신으로 입사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젊은 부장이었다. 다른 부장보다 많게는 열 살 가까이 어렸다. 팀장은 부회장 E가 회사 걱정으로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며 걱정했다. 가끔 그가 안쓰럽기까지 한다고. 그래서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도대체 그 헛소리는 무슨 뜻일까. 팀장의 과도한 인정욕구는 우리 팀을 과중한 업무와 압박으로 몰아넣었다. 팀장 스스로도 과로했다. 그는 잠을 자지 않는 듯 24시간 이메일, 문자에 답변하고 지시했다. 그가 각혈을 한다며 차장 K는 그의 건강을 걱정했다. 우리 팀의 2/3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전세계로 출장을 다녔다. 나는 타 부서에 가이드라인을 주고 쓴소리를 해야 했다. 어느새 나는 우리 팀의 총알받이가 되어 있었다.
그 곳은 낭비가 심한 곳이었다. 실무자들의 시간과 노동은 무한정 낭비되었다. 상사의 불명확한 지시를 기반으로 기획서와 보고서 초안을 대충 만들고 수없이 고쳐댔다. 상사에게 약속된 보고 시간이 그 분의 바쁜 일정에 의해 미뤄져도 그 분의 자리 근처에서 그저 대기하며 적절한 시점을 노리거나 이름이 불리길 기다려야 했다. 나보다 높은 분의 시간이 나의 시간보다 명백히 더 중요했다. 나는 퇴근 이후의 저녁 시간을 계획할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를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의 모든 시간이 잠재적 노동 시간이 되었다. 나는 식욕과 생기를 함께 잃어갔다.
직급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그들은 직급이 깡패라고 했다. 나는 차장 승진을 앞둔 말년차 과장이었다. 그 분이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마음을 헤아려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했다. 팀장 혹은 차장 K는 내게 무조건 하거나, 뭐라도 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나를 낭비하는 것이 자기들의 목표이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내가 그들의 아바타인양 아주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수행만 하도록 하였다. 때론 앵무새나 복사기가 되어야 하기도 했다. 그들은 언제든 서열을 정하려 뒤로 으르렁댔다. 공식적 회의를 통해서는 웬만해선 어떤 결정과 약속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입장을 바꿀 여지를 만들기 위해 상황을 적당히 뭉개거나 회의 주제가 아닌 다른 주제로 상대를 불리하게 만드는 싸움이 종종 벌어졌다. 부서간 협업은 쉽지 않았다. P 사에서는 부서간 협업은 기본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업무가 부서간 협업을 통한 프로젝트 형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협업과 소통 능력이 인사 평가의 핵심적 요소였다. 동료들끼리도 소통 능력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그것이 종종 회사의 자랑이기도 했다. 이 곳은 달랐다. 노골적인 충성심의 경쟁을 통해 상사의 신임의 확보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길이었다. 충성심은 맹목적 추종과 헌신으로 증명되어야 했다. 업무상 이해관계가 충돌하거나 이견이 생기면 기세로 상황을 종료하려 했다. 내겐 싸움의 기술이 없었다.
한참 진행하던 프로젝트로 바빴던 여름 두어달은 오전 8시에 출근해서 매일 같이 10시 이후, 일주일에 하루이틀은 자정을 넘겨 퇴근하기도 하였다. 난 심신이 모두 완전히 지쳐버렸다. 주말에도 하루 정도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래 일해도 너무 지쳐버려 역량 만큼 정상적으로 일을 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미친 듯이 버텨내고 있었다. 체력이 떨어지는 마흔에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문화의 한국 대기업으로 온 결정이 정말 무모했음을 후회했다. 그 곳은 나의 생명력을 쥐어짜주길 요구했다. 자괴감이 쌓이는 나날들이었다.
그 와중에 대통령의 스캔들이 터졌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법 했다. 공표된 목적, 일하는 원칙과 순서 대신 서열과 힘의 논리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 품위없이 웅장하고 권위적인 느낌의 청와대 건물과 위용을 자랑하는 이 재벌 기업의 본사 건물이 정확히 똑같은 이미지로 드러났다. 회사 정문 옆에는 시위대가 자리잡고 있었다.협력업체 노조원들인 그들은 초여름 무렵 회사 앞에 둥지를 틀었다. 주장은 이러했다. 노조가 사측으로부터 부당하게 탄압을 받던 중에 노조원 중 누군가가 자살을 했는데, 노조 탄압 과정에 원청업체인 우리 회사가 관여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회장의 사과를 원했다. 회장의 사과라니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다. 왕 회장이 납시면 직원들은 그의 동선 내에서 눈에 띄어서도 안 되는데 말이다. 이미지의 간극이 지나치게 컸다. 겨우내 텐트를 비닐로 둘러싸서 한기를 힘들게 차단해 놓고 밤을 거기서 보내던 그들은 매일 출근길의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 회사에 기여를 하고 월급을 받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어느 날엔 그들이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는가 싶기도 하고, 어느 날은 우리나라 재벌 대기업이란 그런 일을 하고도 남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여튼 정문을 나가서 산책이라도 할라치면 안 그래도 미칠 지경인데 머리가 더 복잡해지곤 했다.
3. 멈춤, 지금, 여기
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냥 멈추기로 했다.
대학 선배K는 어느새 홍콩에서 도쿄로 들어와 있었다. 6년만인가 꽤 오랫만에 만나게 되었다. 숙소 근처인 록뽄기에서 만나 일요일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 했다.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저녁 메뉴를 정하고 자리를 잡았다. 그는 어떻게 지내니. 라고 물었다. 퇴사하고 일단 쉰다고, 한국 대기업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비난했다. 도대체 너희들 싱글 여자애들은 왜 그딴 소리를 하냐고, 마치 감투라도 쓴 것처럼 하나같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열을 내었다. 얘기를 흘려 보내며 잠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까 고민했으나 전개를 좀 더 두고보기로 하였다. 그가 내일 하루 자기 집에서 자도 좋다고 하였으니 숙박비도 아끼고 말이다. 십수년의 해외생활을 싱글로 버티려니 마음이 팍팍해졌겠지, 라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를 섞어 쓰려니 미칠 지경일 지도. 초반의 폭발 이후에 그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회사가 맘에 안 들면 이직을 하면 되지 왜 대책없이 그만두냐고. 고용된 상태에서 이직할 만한 곳을 찾아야 하는 건 상식 아니냐고. 자신이 채용 담당자의 입장이라면 너를 뽑지 않으리라고. 그걸 하지 않은 나는 정말 바보라고. 커리어의 그림이 아주 좋아지려고 했는데 왜 그걸 살리지 않았냐고. 그 때 잠시 지난 경력이 아까운 생각이 들어 퇴사 시점을 회상했다. 그리곤 금방 현실로 돌아왔다.
이 사람은 내게 왜 이럴까. 내가 퇴사한 것과 그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은가. 그가 나의 결정을 비난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무례했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는 내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이왕 그만두었으니 맘 편하게 돈이 떨어질 때 일을 다시 시작하라고. 마치 내게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는 내게 후하게 자기 생각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의 자신의 회사 생활을 이야기했다. 글로벌 회사의 도쿄 지사, 일본 회사의 도쿄 본사, 글로벌 회사의 홍콩 지사, 다시 도쿄 지사로 복귀. 그는 자신의 화려한 이력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홍콩에서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본인이 얼마나 과중한 업무에 혹사당하면서도 자신이 약속한 만큼 이상의 성과를 내보이며 성공적으로 살아남았는지를 내게 말했다. 매주 아시아 곳곳으로 출장을 다녀서 비행기만 봐도 토할 지경이었다고 했다. 레드아이로 비행하며 도시를 이동했겠지. 나는 그 토할 상황을 왜 참았냐고 묻고 싶었다. 도대체 왜. 그가 알아서 대답했다. 지난 커리어가 아까웠다고.
록뽄기면 도쿄에서 땅값이 매우 비싼 도심이다. 예상컨대 그는 꽤 비싼 월세를 내며 살고 있었다. 그의 멘션은 싱글이 머무르기엔 넓고 쾌적했다. 그러니 내게 선뜻 거실 소파베드를 내주기도 하였겠지. 그의 집은 그의 취향을 반영했을 물건들로 가득했다. 제법 멋졌다. 가구도 전체적으로 잘 어우러졌고, 파리에서 구매했을 법한 소품들은 고풍스러우면서도 모던했다. 거실엔 전자기타 4대, 벽 진열대엔 양주와 고급 일본 소주, 책장엔 한국에서 화제가 될 만한 신간서적, 그 위로는 각종 향수가 보란 듯 전시되어 있었다. 그의 세면대엔 화장품이 그득했고, 습한 날씨 탓에 욕조와 욕실 바닥엔 곰팡이와 물때도 곳곳에 끼어 있었다. 그는 저녁에 곰팡이와 물때 가득한 그 욕조에서 반신욕을 했다. 넘치는 취향, 가득한 화장품, 욕조의 때. 그러자 나는 또 울렁증이 났다. 넘쳐나는 물건들을 보는 게 너무나 지겨웠다. 구역질이 났다.
- 1년 휴직 내내 병원을 다니는 S
(사십대에 막 들어선 나의 주변에는 위태로워 보이는 이들이 꽤 있다. 고등학교 동창인 S는 작년 봄 무렵 휴직을 했다. 병가였다.......)
- 우정과 돌봄의 관계
나는 노처녀 실업자가 되었다. 그러나 노처녀 실업자로 추락하지는 않았다. 불안함에 잠식당하고 증폭된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은 과거의 나였다. 퇴사 후 겨울이 끝날 무렵에 마르크스를 만났다. 나를 돌봐주는 오랜 친구 광합성이 파레지아 과정을 소개해 주었다. 대기 1번이었던 나는 운 좋게 파레지아에 합류했다. 이 곳에서 다시 우정을 나눌 친구들을 만난 것 같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으며 내게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그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 역사성을 선연하게 깨달을 것. 나의 진실 그리고 내가 마주치는 세상의 진실도 모두 그 역사성에 기인하는 것일 테며, 어떤 것도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지금 멈추어 선 이 곳이 내겐 다른 역사가 될 것이며 내 근육엔 다른 기억이 새겨질 것이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발표회라는 잔치가 끝난 후, 인사글을 쓰려고 새벽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실패한 후,
연두님의 글 마지막이 떠올랐고, 그리고 무척 감사했어요.
아직 저는 작별인사를 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 같았고, 연두님이 말해준 우정이 제 마음을 달래줬어요.
연두와 광합성이라는 이름. 듣기만 해도 우정으로 충만할 것 같은 이름들.
그런 관계를 기대하며 살 수 있다는 게 희망이라는 거겠지요?
조곤조곤한 문장들이 딱 연두님만큼 우아하고 예뻤어요. 아프고 날카롭기도 했고요. 잘 읽었어요, 여러 모로.
삼월님의 댓글
삼월
아 참 깜빡할 뻔했네.
파일이 첨부가 안 되어 있네요. 이미지도요.
수정해서 첨부해 주시거나, 아님 제 메일로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