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읽는 시, <죽은 시인의 사회>
기픈옹달
/ 2016-03-08
/ 조회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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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가 있어 써둔 글을 옮깁니다. 이번 1-2월에 온지곤지에서 영화를 소재로 강의했는데 그 강의안을 수정한 것입니다.
지옥 - 헬튼과 헬조선 사이
영화를 보며 ‘헬튼’이라는 말에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학교를 조롱하며 내뱉는 저 말에서 ‘헬조선’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지옥불반도’. 아마 2015년을 장식한 수 많은 말 가운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말일 것이다. 누군가는 2015년을 ‘헬조서니즘’의 탄생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하긴 신문과 잡지, 언론, 정치인의 입에까지 이 표현이 오르는 것을 보면 분명 이 말은 문제적 표현이다.
거꾸로 돌아보면, ‘지옥’이라는 표현이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된 표현 가운데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17살, 고등학교 나이 또래의 영화 주인공들이 경험한 현실은 입시라는 경쟁에서 비롯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전통’이라는 것도 결국엔 재학생 가운데 다수를 아이비리그 대학에 보냈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1989년에 제작된 이 오래된 영화를, 그것도 이국 청소년의 삶을 마치 우리 이야기처럼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대다수 사람이 이 지옥, 입시 지옥의 불길을 통과했고, 통과하고 있고, 통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 보면 배알이 꼴리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도의 갈등, 압박, 폭력은 우리네 삶에서는 일상적인 게 아니던가. 영화에서 헬튼이라 조롱했던 그 지옥의 현실보다 더 깊고 어두운 곳에 우리가 처해있는 건 아니냐는 질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명문 사립고등학교에 다닌다. 교정은 아름답고, 다방면에 걸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을 길러내기 위한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아무리 똑같이 입시에 시달린다고 하지만, 우리는 라틴어를 공부하지는 않는다. 대신 미적분을 공부한다고 하면 될까? 그렇다면 그 장면은 어떤가? 가죽 축구공을 차고, 조정을 배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저들이 모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식이라는 사실을 번뜩 깨닫게 된다. 언뜻 언급되는 아버지의 직업이란 이렇다. 의사, 변호사, 판사 등등. 아버지 덕분에, GM 소송을 처리했다는 그 아버지 덕분에 부잣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함께한 녹스를 보며 이질감을 느낀 건 바로 이런 까닭이다. 저들 사이의 대화에서도 이런 문제가 살짝 언급된다. ‘누완다’라고 이름을 바꾼 찰리는 이들 가운데서도 잘사는 집 도령으로 꼽힌다.
따라서 영화를 보면서 저 정도의 학교에 다닌다면, 저런 교육을 받았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저들은 헬튼이라며 자신들의 현실을 지옥에 빗대어 표현하지만, 거꾸로 저 말은 얼마나 낭만에 푹 적셔진 말이던가. 만약 영화 속에 들어가 주인공의 친구가 되었다면 이렇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니네가 지옥을 알아?!’
영화를 처음 보았던 약 20여 년 전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억압적인 학교, 그리고 그 속에서 저마다 꿈을 찾기 위해 갈등하는 이들의 삶에 동감하면서도 이들이 마냥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학교도 부럽고 선생도 부러웠다. 비단 키팅 같은 선생이 내 곁에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저런 기품있는 교장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적어도 저들은 교실 안에서 쌍욕을 내뱉으며 함부로 몽둥이를 휘두르지는 않는다. 게다가 합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영화를 보면서 ‘진짜 지옥은 여기 있다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입시 지옥’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그건 ‘지옥’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 아닐까? 아니면 혹시 나이가 들어서 ‘입시’와는 거리가 먼, 학교와 영 동떨어진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런 걸까? 궁금해서 ‘입시지옥’이라는 말과 ‘헬조선’을 각각 검색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훨씬 더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입시지옥’이라는 말도 간간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빈도가 덜하다. 고로 슬픈 현실은 이렇다. 바로 여기가 지옥이다! 나라 전체가 지옥인 지옥불반도에선, '입시지옥'은 이제 특별한 것도 아니다.
기분 나쁘게 ‘지옥’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말이 이미 사회적 용어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지옥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넘친다. 여기에는 다양한 문제가 섞여 있다. 정치에 대한 불신, 경제에 대한 위기감, 취업-결혼-육아로 이어지는 정상적 삶의 붕괴… 이런 현실에서 영화에서 말하는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좀 공허하게 들리기도 한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죽은 '시인의 '사회’
살다 보니 ‘영화 같다’는 말처럼 허망한 말이 없더라. 현실을 뛰어넘는 때로는 얼토당토않은 일을 두고 영화 같다고 하는데, 사실은 현실이 영화를 압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영화는 현실을 확장하기보다는 현실의 일부, 한 토막을 겨우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현실의 한 토막을 보여주지만 그 가운데도 사유해야 할 부분이 있을 테니. <죽은 시인의 사회> 역시 마찬가지. 저렇게 낭만적인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며 발로 차버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전달되는 몇 가지 주제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란 잘못된 번역이다. 원제는 ‘Dead Poets Society’ 이를 그대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 ‘Society’는 ‘사회’라고 옮기기보다는 ‘모임’ 정도로 옮겨야 옳다. 즉 이들의 굴속에서 가진 모임의 이름이 ‘Dead Poets’였다는 것. 그러나 워낙 널리 알려진 제목이고, 뭔가 멋진 구석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쓰고 있다. 이른바 ‘초월번역’.
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모임’,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동아리’라는 데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옥이라며 조소한다. 그러던 그들의 삶이 바뀐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키팅 선생의 존재도 매우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또래들의 모임, 비밀 결사와 같던 그 모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함께 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던. 그 작은 동굴 속의 모임.
돌아보면 어렸을 적 이 영화를 보며 셋의 부재가 아쉬웠다. 시, 친구, 선생. 돌아보면 영화처럼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조금씩은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 문학 선생. 그의 수업을 통해 만나는 작품은 무엇 때문이었는지 재미있었다. 책을 읽는 친구. 함께 서점을 다니며 같이 읽을 책을 고르기도 했다. 같이 시집을 읽어보자며 뜻을 모아보기도 했다. 부족한 안목에 그나마 고른 시집이라는 게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집이었지만. 김소월의 시집은 다 읽었던 것 같은데 한용운의 시는 다 읽지도 못하고 던져두고 말았다.
영화를 보며 다시 생각하는 것인데 학창시절 저들과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더 깊이 시를 읽을 수 있었을 테다. 그 영향 때문일까?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문예반에서 시를 지어보겠다고 바둥거렸는데 거기서도 함께 시를 읽고 이야기할 손꼽을 정도였다. 결국 다 채우지도 못한 내 습작노트는 나만의 부끄러운 기억이 되고 말았다.
‘카르페 디엠! : 현재를 즐겨라!!’ 그런데 어떻게? 여러 길이 있겠지만 개별적 차원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즐김’이란 개인적 차원에 그치는 것은 아닐 테다. 인간이란 말 그대로 사람들 사이(人間)에 있는 존재여서 자신을 그 사이의 틈에서 확장시켜 나가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다.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수다스럽다. 그것을 전염시키고, 전달하고, 표현하고 싶기에. 그렇기에 그 욕망을 풀어내는 공간은 갈등이 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른 욕망들 꺼내놓고자 하기에. 그것도 더 많이.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출발점 필요하다. 이들의 모임이 단순히 ‘친목 모임’이 아니었다는 데 주목하자. 이들은 시를 읽었다. 시, 넓게 말하면 문학이야 말로 이들의 유대를 지탱해주는 튼튼한 버팀목 이었다. 영화에서 '시'는 분명 이들을 엮어주는 매우 훌륭한 재료였다.키팅 선생이 시를 매개로 학생들과 만났고, 학생들은 시를 통해 우정을 쌓았듯이.
영화의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을 이야기해보자.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학교를 떠나며 키팅은 자신의 물건을 찾기 위해 교실에 들린다. 마침 영문학 수업시간이었다. 키팅의 자리를 대신한 교장은 교과서를 처음부터 다시 나가려고 한다. 반복되는 질문, ‘시란 무엇인가?’ 영화에서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대체 시란 무엇인가?
시詩… 참으로 먼 이야기이다. 시란 따분하고 재미없고 심심하며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채기 힘든 아리소한 말의 묶음 아닌가? 게다가 외워야 할 것은 어찌나 많은가? 심상이며, 은유니 환유니 하는 말들에, 음보, 운율, 형식 등등. 궁극적으로 수능 공부를 위해 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네 현실을 생각하면 시는 결코 정복하기 쉽지 않은 대상이다. 시 문제만 나오면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기에 고전시가가 더해지면 문제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거꾸로 키팅이 쓰레기라며 서문을 찢어버리라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시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시는 수학이 아니다. 시의 가치를 그래프로 그려서 점수를 매길 수 없다는 키팅의 말을 기억하자. 시는 죽지 않는 말들의 보물 창고다. 그렇기에 ‘죽은 시인’이란 어쩌면 모순적 표현일 수 있다. 시인의 삶은 무덤으로 들어가겠지만 그의 말들은 늘 살아서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 넘치기 때문이다. 시란, 문학이란, 글이란, 책이란 그렇게 죽음을 건너오는 목소리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삶을 즐겨라’, 어떻게? 삶을 즐기려면 죽음과 싸워야 한다. 살아있어야 즐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거꾸로 어떻게 죽음과 대면하여 저항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죽지 않는 말로 가능하다. 죽지 않는 말, 죽음을 건너온 말, 죽음에도 무뎌지지 않는 말을 담아보라. 그 말들의 생명이 곧 우리의 생生이 될테니. 이것이 죽음과 맞닿은 지옥에서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