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 영화 <니가 필요해>
삼월
/ 2016-03-12
/ 조회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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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가 필요해
이 영화의 제목은 ‘니가 필요해’입니다.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들었는데, 멜로영화의 제목처럼 달짝지근한 맛이 나서 조금 놀랐습니다. 그 때문인지 영화를 보기 전에 분노와 서러움을 각오하고 본 것에 비해 뒷맛이 씁쓸하면서도 살짝 달짝지근하게 남았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 과정을 냉정하게 기록하면서도 그 안에서 조합원들이 울고 웃는 순간들을 따뜻하게 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감독이 가진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겠지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고단한 삶 이외에도 한 인간으로서 그들을 울고 웃게 했던 순간들을 눈여겨본 시선 때문이었겠지요. ‘니가 필요해’라는 제목이 영화를 다 보고나서야 그렇게 와 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왜 가끔은 이 사회에서 우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걸까요?
2. 새로운 계급론, 금수저와 흙수저
그러고 보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 빈곤의 문제들은 어디서나 매체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여기서 눈길을 끈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목을 받거나, 아니면 관심을 차단하거나. 우리는 사회의 그 어두운 면에 대해 때로는 주목하지만, 어느 때는 아예 관심을 두려 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우리 역시 빈곤과 불안정노동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불안정노동의 문제는 늘 우리 뒤를 쫓고 있는 우리의 그림자입니다. 이에 대한 두려움이 신세한탄을 넘어 수저계급론과 같은 새로운 계급론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수저계급론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을 금수저와 흙수저로 나눕니다. 이 구분은 부의 대물림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시선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자신이 금수저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말하자면 금수저를 쥐어줄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자칭 흙수저들의 시선입니다. 흙수저를 자처하는 이들은 이 사회가 능력으로 자신들을 평가하지 않는다고, 평가의 기준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아니면, 평가받을 능력을 기를 여건조차 자신들에게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단지 자신이 금수저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한탄만 되풀이한다면 새로운 해답을 끌어내지 못합니다. 해답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왜 나는 금수저를 물려받지 못 했는가’하는 질문보다는 조금 더 날카로운 질문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3. 비정규직의 컨베이어벨트는 정규직의 컨베이어벨트보다 빠르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들이 얼마나 쉬운 해고와 열악한 대우에 시달리고 있는지는 굳이 영화 속의 예를 들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일 년을 채우지 않고 반복되는 계약, 정부기관에서도 절대로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지 않는 무기계약직, 시설관리와 보안 등의 업무를 외주화시켜버리는 일이 관행이 된 회사들. 굳이 거창하게 노동문제를 들먹이지 않아도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 몇이 모이면 자연스레 하게 되는 이야기들 속에 이 문제들이 섞여 있습니다.
영화 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보다 조금 더 생생한 증언들을 해 줍니다. 이들은 IMF 구제금융 시절 외국계회사에 넘어간 자동차회사의 협력업체 직원들입니다. 회사는 관리하기 좋게 이들을 1차, 2차, 3차 협력업체로 나누어 배치하여 그 안에서도 등급을 만들었습니다. 업무에 투입되는 순위, 해고되는 순위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GM대우에서 일하는 줄 알고 있었고, 실제로 GM대우를 위해 일을 했지만 소속은 수십 개의 작은 회사들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도, 유지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가끔 이들이 정규직 노동자의 빈 작업대를 메우러 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작업대 컨베이어벨트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그때 그들은 분노했을까요? 그러지 못했습니다. 몸이 조금이라도 편했으니까요. 그런 날은 집에 가서 잠자리에 누울 때 느끼는 피로도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화를 내지 못했습니다. 가능하다면 하루라도 더 정규직의 작업대에서 일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규직이 달고 다니는 하얀 명찰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정규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에게 떨어진 회사의 명령은 해고였습니다. 이들은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회사 앞에 천막을 치고, 회사 안으로 진입하려고 시도하다가 매를 맞고, 철탑이나 정문 같은 높은 곳에 올라가 몇 달씩 지내기도 했습니다. 몇몇은 생활고에 못 이겨 다른 일터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한 조합원이 생계를 위해 다른 공장에 다닌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휴게실과 마실 것이 없어 음료를 집에서 준비해 가야하고, 화장실에 화장지도 비치되지 않아 가지고 다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19세기 노동자들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이 이야기는 부당해고 문제와는 또 다른 충격을 줍니다. 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가끔 역이나 행정관청 같은 공공시설물에서도 청소노동자가 화장실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들이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드러내주는 장면들입니다. 외면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될, 지금 우리의 모습들이지요.
4.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해를 넘기는 농성 속에서 조합원은 줄어들고, 이들은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사측에서 복직에 대한 제안을 해 올 때마다 복직에 대해서도 고민합니다. 단지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시작한 농성인데, 그것이 다인가 하는 고민도 들기 시작합니다. 복직을 하게 되면 다시 새벽에 출근해 저녁 늦게까지 일해야 하고, 쉴 새 없이 야간이나 주말 근무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가 행복했었나, 하는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농성이 장기화되고 화제가 되자, 지역사회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민주노총이나 시장, 심지어 GM대우의 사장도 그들을 찾아옵니다. 복직에 대한 제안은 더 달콤해졌지만, 회사는 여전히 노동조합을 배척하고, 그들을 전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일부라도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투쟁의 성과를 남기기 위해 민주노총에서는 사측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합니다. 전부복직이 아니라 일부복직의 타협안에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질문합니다. 노동조합이 뭐지? 권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투쟁했는데, 같이 투쟁한 동료를 버리라고 하는 노동조합이 대체 뭐지?
이 질문은 노동조합 활동을 하지 말자는 결론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 질문으로 인해 그들은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자신들만의 답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학습과 전술로 익힌 노동조합이 아닌 자신들의 방식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어갈 용기도 갖게 됩니다. 하루 종일 일만 하던 때가 행복했었나, 하는 고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고민은 삶에 대한 허무와 세상에 대한 좌절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정규직 노동조합은 조합사무실의 책상 하나도 이들에게 내어주지 않지만, 그들은 스스로 열심히 선전물을 만들고 비정규직 동료들을 설득합니다.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노력합니다. 질문하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지만, 질문하지 않고서는 결코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은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5. 한계지점
수저계급론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수저가 아닌 것에 대한 한탄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잣대로든 사회의 구성원들을 나누는 것에 대한 반감, 계급 자체의 정당성에 관한 의심처럼 무엇인가를 파고드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단지 조금 더 안정된 자리에 안착하기 위해 자기계발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학원가를 떠도는 이 땅의 청년들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사회의 한계지점에 대한 사유이고, 그 한계를 뛰어넘을 답을 줄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금수저가 되어 흙수저들을 내려다보며 안도하는 것일까요? 누군가의 모욕과 좌절을 발판 삼아 당당하게 일어서는 것일까요? 인간다움과 행복에 대한 질문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지루할 정도로 빤한 말인 것 같지만 정작 우리 스스로 그 질문을 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당연히 답도 스스로 고민해본 적이 거의 없겠지요. 어쩌면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은 ‘당신이 필요해’라는 단순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가 어떤 사람이건, 얼마의 능력을 가지고 있건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라는 것 말이지요. 당신이 필요하다는 말이 우리에게 해답이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