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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국가에 대한 체험, 영화 <덩케르크> +5
삼월 / 2017-09-21 / 조회 2,13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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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집이 아니다

 

영화 《덩케르크》는 전쟁을 체험하는 영화다. 전쟁을 체험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의 굉음, 땅이 갈라질 듯 울려오는 진동, 암흑과 섬광 속에서 공포에 떨면서 도처에서 죽음에 맞닥뜨리는 일. 때로는 내가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일. 그리고 이 모든 죽음과 살인이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을 체험하는 일이다. 국가는 때로 우리를 전쟁 속으로 밀어 넣는다. 우리는 전쟁영화를 통해 전쟁과 국가를 동시에 체험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 얼마 후인 1940년의 어느 봄, 프랑스의 해안 덩케르크에는 목숨을 걸고 해안가로 달려온 수십 만 명의 병사들이 모여 있다. 이 죽음의 해안은 원래 프랑스 지명으로 됭케르크라 불리지만, 영화의 제목은 영국식으로 덩케르크이다. 영화의 서사가 영국의 입장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서사가 언제나 누군가의 입장에서 진행되기 마련인 것처럼 전쟁에는 ‘편’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편을 나누는 주축은 국가이다. 영화에서 연합국 병사들은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밀리고 쫓겨 덩케르크 해안에 이르렀다. 바다 저 너머로 영국 땅이 어렴풋이 보이는 곳이었다.

 

해안가에 모인 젊은 병사들은 살고 싶었다. 조국의 승리나 전쟁에서 패배하여 도주한 부끄러움 같은 건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생존은 전투 이상으로 어려웠다. 천신만고 끝에 올라탄 배는 독일군의 폭격이나 어뢰 공격으로 부서졌고, 자꾸만 파도에 밀려 죽음의 해안으로 되돌아왔다. 점점 더 생존은 절박한 문제가 되어갔다. 그때 덩케르크 해안가에 배들이 나타났다. 거대한 전함이 아닌 조그만 낚싯배나 요트들이었다. 영화에서 사령관은 영국인들이 몰고 온 그 배들을 home이라 칭한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집이 우리를 데리러 올 수도 있다. 우리나라 자막에서 home이라는 단어는 ‘조국’으로 번역되었다. 영화의 공식 포스터 문구도 ‘조국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어색한 문구로 대체되었다.

 

‘조국’이라는 단어에는, 수십 만 명이 오로지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이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은 생경한 스펙터클이 있다. 그 생경한 스펙터클에서 국가를 만들어내는 무엇인가를 엿본다. 집이 국가로 확장되는 순간, 가족이 국민으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에 국가는 힘을 발휘한다. 집을 국가로 확장하고, 가족이 국민이 되는 일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국가는 이웃의 확장, 공동체가 확장된 모델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가 파괴된 곳에서 익명과 화폐의 교환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이 자리 잡는다.

 

국가라는 사회에서 개인의 실존은 위태롭다. 노동과 생산을 위한 주체로 다시 태어날 뿐이며, 언제든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국가를 신뢰하는 온건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교육은 늘 이 폭력이 아주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불가피하게 일어난다고 선전한다. 무력한 주체인 국민으로 다시 태어난 인간은 절반은 그 선전을 믿고, 절반은 의심한다. 가끔 ‘이게 나라냐’라고 묻지만, 국민으로서 국가 자체를 거부하지는 못한다.

 

국민이라는 무력한 주체들 안에는 공동체에 대한 기억들이 선사시대의 유적처럼 남아있다. 그들은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공동체의 기억들로 이따금 회귀하려 한다. 이 영화에서처럼 전쟁터에 있는 청년을 내 자식처럼 느끼는 순간들이 그때이다. 세월호 안에서 죽은 이들이 내 가족처럼 느껴지고, 강남역 근처의 화장실에서 칼에 찔려 죽은 여성이 내 자매나 나 자신처럼 느껴지는 순간들도 마찬가지다. 그때 우리는 국가라는 사회의 익명성을 잊어버리고, 공동체라는 지나간 기억 속에서 사고하고 감각한다. 병사들을 구하러 가는 것은 조국이 아니라 집, 바로 공동체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국가는 마치 종교의 신처럼 그 사고와 감각의 순간을 파고든다. 엄밀히 말하자면 주어는 국가가 아니다. 국가를 만들고 그 힘을 이용하려는 누군가가 그렇게 한다. 아주 유치하고 조잡하게도 국가에 어머니나 아버지의 이름을 붙인다. ‘조국’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마치 우리가 그 품에 기대어 쉬고, 힘들 때는 고통을 호소할 수 있고, 때로는 부모를 돌보듯 국가를 위해 당연히 희생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친다. 한 나라의 국민을 그렇게 가르쳤을 때 또 다른 나라의 국민을 가르치는 일은 아주 쉽다. 국가에 소속되지 못한 국민이 어떻게 노예가 되거나, 죽어 가는지를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마침내 국민이 국가에 소속되었을 때,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고, 그들을 전쟁터에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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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것이 승리다

 

일부는 죽고 일부는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숙인 채 청년들에게 빵을 나눠주던 노인은 살아 돌아온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며, 끝까지 청년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때 청년들은 전쟁에 패배하고 살아 돌아온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청년들을 전쟁터에 보낸 노인의 죄책감을 패배자에 대한 조롱으로 오해한 것이다. 집은 승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뿐이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승리다. 청년들이 이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히틀러를 위한 선전영화에서 병사들의 사열 장면을 스펙터클로 구현했다. 그 스텍터클을 통해 선전영화에서 전쟁과 국가는 그 자체로 웅장하고 감격스러운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히틀러 선전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영화는 독일군과 연합군 병사들의 전투를 스펙터클로 구현하지 않았다. 굶주림 속에서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이제 막 해안가에 도착한 병사는 줄지어 서 있는 수십 만 명의 병사들을 본다. 드넓은 백사장부터 긴 부둣가의 끝까지 빽빽하게 사람으로 들어차있다. 전쟁터에서 탈출하려는 병사들의 끝도 없이 긴 줄에서 전쟁의 스펙터클은 사라졌다. 거기에는 이제 새롭게 구현된 생존의 스펙터클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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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스펙터클에 압도당한 병사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목이 마르고, 배설의 욕구를 느낀다. 옷을 훔치기 위해 시체를 묻어주는 병사를 도와주고, 몇 모금의 물을 얻는다. 그들은 생존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전개될 것을 예감하면서도, 서로 돕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모두 함께 생존을 추구하다가 누군가는 죽게 된다. 어이없이 죽어가는 자도 있고, 굉장히 숭고하게 죽어가는 이도 있다. 모든 죽음은 누군가의 생존을 향해 가는 죽음이었지 조국을 위한 죽음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몰두하는 죽음의 해변에서의 일주일, 병사들을 구하러 가는 요트 위의 하루, 독일군 전투기와 격전을 벌이는 공중에서의 한 시간은 그렇게 지나간다.

 

생존은 그들에게 무엇보다 긴박하고 중요한 서사이다. 누구도 이 서사를 말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단지 마주치는 눈빛만으로, 저 멀리 바다 위나 하늘 위의 한 점처럼 보일만큼 멀리 있을 때도 그 서사를 알아듣는다. 서로의 생존을 도우면서 그들은 때로 함께 승리했다. 그러나 모두 함께 승리하지는 못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죽은 이들에게 기꺼이 영웅의 칭호를 부여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미 승리했으므로 영웅의 칭호를 탐낼 필요가 없다. 생존의 승리 앞에서 영웅을 칭송하고 조국의 승리를 다짐하는 처칠의 연설은 초라하고 조잡하다. 저 멀리 아주 오래된 공간과 시간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지지직지지직 잡음이 끓고, 꾸며낸 듯 부자연스럽다. 그 잡음과 부자연스러움에서 우리를 국민이라 칭하며 전쟁터로 보내려는 국가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댓글목록

유택님의 댓글

유택

이 영화를 추천받아서 봤는데
무슨 갤러그나 테트리스 같은 느낌의 영화라서
당시 마구 욕하면서 극장을 나왔거든요. ㅎㅎ
이렇게 글을 읽으니 새삼 다르게 영화가 보입니다.
영화보다 삼월님의 글이 완전 멋지다에 한 표 던집니다.
같이 공부했던 푸코와 맑스가 떠올라요.
잘 읽고 갑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전쟁과 국가에 대한 체험' 이라는 제목이 참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국뽕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많았었는데......
사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경험을 감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다른 전쟁영화와 차별되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경험의 감각'은  놀란의 장기인 시간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더욱 극대화됩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은 경험의 강렬도에 따라 때로는 길게, 또는 짧게 느껴지므로 일주일, 하루, 한 시간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시간은 살아남은 후에도 각 개인마다 다른 길이로 계속 반복되기도 할 것입니다. 
삼월님이 중점을 둔 '전쟁과 국가'에 대한 분석은 정확하고 날카롭습니다.
이러한 성찰과 분석적 태도 없이, 국가의 대의를 위해 희생한 개인을 찬양한다며 이를 단순히 '국뽕영화'냐, 아니냐로 손쉽게 판단해버리는 것은 너무도 거친 투망으로 실체없는 의미를 건져 올리려는 오류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승리의 서사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가장 고통스럽지만 가장 숭고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승리의 면류관을 빼앗아가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그 국가의 실체를 보게됩니다. 처칠의 연설이 초라하고 조잡하다고 한 삼월의 진술은 그런 의미에서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재밌게 보았던 영화를 좋은 비평으로 다시 떠올리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
삼월~~ 화이팅~!!!!

희음님의 댓글

희음

저도 삼월에게 화이팅을 전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1차적으로는 '시간'과 '스펙터클'과 '개인과 전체'라는 대상을 조합하여 내놓는
놀란의 잘 빠진 매만짐 기술에 탄복을 했더랬어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한 찬탄과 감동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 가지 않더군요.
분명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전쟁에 대한 성찰이란 건 찾아볼 수가 없었죠.
예컨대 거기에는 개인들의 생존 분투와 그 고통과 고독의 무릅씀에 대한 찬사는 있었으나
그러한 생존을 향한 걸음의 지리멸렬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영화의 어디에도 담겨 있지가 않았죠.
그런데 삼월 님의 후기와 토라진 님의 댓글을 읽으니
놀란이 노리는 포인트는 그 방식에 있어서나 그 시선에 있어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 토라진 님 말마따나 '처칠의 연설이 초라하고 조잡하다고 한 삼월의 진술'에 저도 통쾌해요.ㅎㅎ
그 연설 이후에서야 비로소 부끄러움을 떨치는 병사의 포즈 또한 비판적으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영화 읽기 중 잊혀진 공동체에 대한 기억을 연관지은 부분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어요.
요런 멋진 영화평으로다가 영화 세미나 개봉박두 상황을 넌지시 알리는 검미까!!!!^^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 신체가 공동체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신체를 유기체라는 하나의 동일하고 통일적인 무엇으로 간주한다는 거지요.

유기체 수준에서 신체를 유기체적 동일성으로 상정할 때,
사회체 차원에서 국가주의로 가는 것은 쉬워보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관없는 신체'가 유기체적 통일성에 반대하는 것은
사회수준에서 국가주의에 대항하는 코뮨주의에 대한 모색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공동체가 결합된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

사월님의 댓글

사월

기관-유기체-동일성-통일성-초월적구도 : 나쁜거
기계-분자-생성-차이-일관성구도 : 좋은거
들뢰즈 공부 끝! 아님 말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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